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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 성장 이론 - 우리가 놓치고 있던 인류 성장의 거대한 동력
오데드 갤로어 지음, 이은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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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팅은 알에이치코리아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고 작성했다.
‘성장이 끝났다’는 말을 요즘 뉴스와 칼럼에서 자주 보곤 한다. 저출산·고령화, 기후 위기, 불평등, AI 등으로 인한 기술 변화가 한꺼번에 밀려오면서 과거와 같은 고성장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는 피로와 체념이 사회 전반에 퍼져 있다.
하지만 브라운대 경제학과 교수인 오데드 갤로어는 《통합 성장 이론》에서 이러한 직감적 비관을 차분한 증거와 긴 역사로 다시 검증해 보라고 요구한다. 그는 인류 경제사가 실제로 어떻게 흘러왔는지, 그리고 그 흐름을 보면 정말 “성장은 끝났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고 묻고 있다.
오데드 갤로어는 ‘통합 성장 이론(Unified Growth Theory)’의 창시자로, 인류의 경제 발전을 선사 시대부터 현대까지 하나의 이론으로 설명한다. 기존 성장 이론이 산업혁명 이후의 200~300년만을 다루며 그 이전 수십만 년의 역사는 공백으로 남겨 둔 데 비해, 갤로어는 맬서스적 정체기–전환기–지속 성장 단계까지를 연결해 인류 전체 궤적을 하나의 서사로 포착한다.
2011년 영어판 《Unified Growth Theory》에서 제시한 이론을 바탕으로, 한국어판 《통합 성장 이론》은 그 내용을 비전공자도 따라갈 수 있도록 정리한 일종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출발점은 ‘맬서스 함정’에서부터다.
인류 역사 대부분의 시기에는 기술이 조금 발전해도 곧 인구가 늘어나 1인당 소득 상승효과가 사라졌고, 평균 생활 수준은 수천 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았다. 갤로어는 이 오랜 정체기의 이면에 잠복된 성장 메커니즘이 있었다고 보고 있다. 인구가 늘수록 잠재적인 혁신자의 수도 늘어나고, 기술 진보 속도도 아주 천천히 가속된다.

어느 시점부터는 기술 변화 속도가 인간이 생활 방식을 바꿔야 하는 속도를 압도하면서, 부모의 전략이 “아이 수”에서 “아이의 질(교육)”로 전환된다. 바로 이 인구학적 전환이 출산율 감소·인적 자본 축적을 동시에 불러오며, 비로소 1인당 소득이 꾸준히 증가하는 ‘지속 성장 체제’가 열린다는 것이 통합 성장 이론의 핵심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전환이 전 세계에서 동시에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떤 지역은 18~19세기 유럽처럼 비교적 이른 시기에, 어떤 지역은 20세기 후반 이후에야 맬서스의 덫을 벗어났다. 그 시차가 오늘날 국가 간 부의 격차를 낳았다는 것이 갤로어의 설명이다.
이를 위해 그는 기술·인구·인적 자본뿐 아니라 제도와 문화, 지리, 인구·유전적 다양성 등 ‘깊은 역사적 요인’까지 분석에 끌어들인다. 경제 성장과 인류 진화, 국제무역과 인구 구조, 교육과 기술 혁신이 어떻게 서로를 밀어 올리며 성장 엔진을 구성해 왔는지, 방대한 통계와 역사적 사례, 수학적 모델로 촘촘히 엮어낸다.
이 장기 서사를 현재의 논쟁―“성장은 끝났는가?”―와 연결하는 부분이 이 책의 백미다. 갤로어는 통합 성장 이론을 바탕으로 “성장의 시대는 이미 끝났다”는 비관론을 정면에서 비판한다. 인류는 이미 한 번, 아니 여러 번 ‘정체에서 성장으로의 대전환’을 경험해 왔으며, 그 과정은 언제나 인구·기술·교육·제도의 새로운 조합 위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100여 년을 돌아보면 세계 평균 1인당 소득과 기대수명은 장기적으로 꾸준히 상승해 왔다. 코로나19나 금융위기와 같은 충격이 일시적인 후퇴를 만들긴 했지만, 전체 흐름은 여전히 우상향이다. 이런 기본 통계만 놓고 봐도 “성장은 이미 멈췄다”는 직감은 사실이라기보다, 현재의 불안을 과장한 감정에 가깝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그렇다고 갤로어가 낙관론자라는 뜻은 아니다. 그는 성장의 동력이 잘못 설계되거나, 성장의 과실이 소수에게만 돌아갈 경우 불평등이 얼마나 심각한 사회적 비용을 낳는지 날카롭게 지적한다. 인류가 다시 한번 ‘지속 가능성의 한계’에 부딪힐 수 있다는 경고도 빼놓지 않는다.
성장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일이 중요한 이유는 더 많은 부를 쌓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후 위기·인구 위기·세계적 불평등이라는 거대한 압력을 견딜 수 있는 제도와 정책을 만들기 위한 전제이기 때문이다. 성장 엔진을 완전히 멈출 것인가, 아니면 구조를 바꾸어 지속 가능하게 돌릴 것인가는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이라고 말한다.
이 책이 기존 인문학 도서와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은 ‘설명 방식’이다. 많은 인문 교양서는 인상적인 일화나 사상가의 문장을 중심으로 공감을 이끌어낸다. 반면 《통합 성장 이론》은 인류 역사를 거대한 실험실로 삼아, 데이터와 모델로 가설을 검증한다.
맬서스 함정, 인구 전환, 교육 확대,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 무역 개방, 기술 진보를 둘러싼 여러 성장 이론을 하나씩 검토하고, 어디까지 유효한지, 어디서 한계를 드러내는지 꼼꼼하게 비교·비판한다. 그 과정에서 경제학·역사학·인류학·진화생물학이 한 권 안에서 교차하며, 인문학적 상상력과 사회과학적 엄밀함이 동시에 요구되는 드문 교양 경제학서가 된다.
물론 난이도는 만만치 않다. 그래프와 도표, 수식이 자주 등장하고, 각 장 말미에는 학술 논문을 연상시키는 참고문헌이 빼곡하다. 하지만 모든 수식을 따라갈 필요는 없다. 각 장의 도입부와 결론, 사례 설명만 따라가도 “인류는 왜 이렇게 오랫동안 제자리걸음을 했고, 어떻게 갑자기 가속 페달을 밟게 되었는가”라는 큰 질문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

오히려 20년차 이상의 IT 기자 눈으로 보면, 이 수식들은 인간이 미래를 상상하고 자녀와 사회, 다음 세대에 대해 내리는 선택을 숫자 언어로 번역한 것에 가깝다. 성장 이론은 결국 “어떤 환경에서 사람들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기꺼이 희생하고 투자하는가”라는 오래된 인문학적 질문에 대한 다른 형태의 대답이기 때문이다.
한국 독자에게 이 책이 갖는 의미도 분명하다. 지금 우리는 저성장·인구 절벽·AI 전환이라는 삼중고를 겪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성장이 끝났다’는 말은 현실 진단을 넘어 자기암시가 되기 쉽다. 《통합 성장 이론》은 이때 우리가 어디쯤 와 있는지, 인류 전체의 장기 궤적 속에서 현재의 좌표를 다시 찍어 보라고 제안한다.
왜 어떤 나라의 인구 구조와 교육·기술·제도가 성장의 사다리가 되었고, 다른 나라는 그렇지 못했는지, 우리가 지금 어떤 선택을 해야 다음 세대가 새로운 성장 국면에 진입할 수 있을지에 대한 큰 지도를 제공한다.
결국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면서도 근본적이다. “정말 성장은 끝난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성장의 메커니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가.” 갤로어의 답은 후자에 가깝다. 성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만 그 엔진이 복잡해졌고, 잘못 설계하면 불평등과 환경 파괴만 키우는 괴물로 변할 수 있을 뿐이다.
《통합 성장 이론》은 시간을 들여 읽어볼 가치가 충분히 많은 책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성장은 끝났다”는 말 대신 “우리는 아직 성장의 언어를 다 배우지 못했다”는 사실을, 조금 더 확신을 가지고 말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출처 : 박기자의 끌리는 이야기, 책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