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동에 모인 사람들을 방송으로 보며 문득 세월호 아이들이 생각났다.
검찰이.
저렇게 순식간에 대규모로 특수부를 만들고 미심쩍다 싶으면 일단 영장신청하고 압수와 조사를 일사분란하게 할 수 있는 검찰이.
어째서 2014년 그 해에는 그러지 않았는가.
지금 검찰의 행태를 보며 누가 가장 어이없고 분할까를 생각했다. 조국씨 일가는 당사자니 그렇다쳐도 아이들을 잃고 그 이유도 책임자도 모른 채 가슴을 쳐야했던 세월호 유족들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무도 만나주지도 도와주지도 않던 그 해 여름을 지나고 벌써 1993일이나 지난 지금.
박근혜 탄핵을 벌이던 그 겨울에 부르던 노래가 생각났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자꾸 사는게 마땅찮아서라는 변명을 앞세워 아이들을 잊어가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이정도 했으면 충분‘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기억은 정도를 따질 수 없으며 충분함을 평가할 수도 없는 일이다.

아이들은 촛불사이로 내려왔다 갔을지도 모른다.
시퍼런 청년이 되어 아직 이 땅에 살아있는 사람들을 토닥이고 갔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많이 모였던 서초동 뿐 아니라 강남역에도 톨게이트 노동자들에게도 아이들이 노래하며 다녀갔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강력한 검찰이 있었단다 얘들아!
까르르~~아이들이 우스워 죽겠다고 웃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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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19-09-30 22: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효.. 그러게요... 세월호 아이들과 유가족을 떠올리신 나타샤님의 글을 보며 전 또 한 번 부끄러워지네요~~

나타샤 2019-09-30 23:03   좋아요 1 | URL
부끄러운 시대를 사는 탓미죠..^^
 

기록이 기억을 지배합니다. 기억은 흐릿해지더라도 여러 계절 울며 말하고 울며 적은 이 기록이 우리의 기억을 초롱초롱하게 지켜서 별이 된, 우리 곁에 있어야 할 그들의 삶을 복원해 줄 것입니다. 기록을 곱씹어 읽다 보면 어느 때든 곁에 있어야 할 이들이 우리의 기억 속으로 돌아오고, 마침내 달라진 우리를 만날 수 있게 될 것으로 믿습니다.

가난한 소작인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술에 취해도, 술을 안 마신 날도, 자식과 아내를 때렸다. 아무리 열심히 소꼴을 베어오고 나무를 해와도 트집이 잡혀 매를 맞아야했다. 그때마다 이모가 그를 ‘아가‘라 부르며 위로해 주었다. 그래서 그는 두 아들만큼은 절대로 야단치지 않고 때리지 않고 키우겠노라 결심했고, 그렇게 살았다. 이모처럼, 두 아들을 부를 때면 이름 대신 꼭 ‘아가‘라 했고, 화가 나는 일이 생겨도 절대 언성을 높이지 않고 ‘아가, 왜 그러냐?‘고 달랬다.

미쳤다는 말이 두뇌가 병들었다는 뜻이라면, 그는 결코 미친 게 아니다. 다만 가슴한쪽이 베어나갔을 뿐이다. 일 년이 지난 지금도 마음 속에 아가가 그대로 살아있다.
는 것뿐, 자신의 ‘아가‘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다. 

밀란 쿤데라가 창조한 기억 투쟁‘이라는 말은 이제 보편적인 개념이이 개념이 되었다. 기억이 동물이기 때문이다.
투쟁은 지속적이고 집요해야만 효력을 가진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기각은 대체로 생존을 위한 필연적 기술이다. 그러니 기억한다는 것은 고통스러든 슬픔과 고통은 빠르게 잊혀져야 할 운명이다. 그러지 않고는 인간의 행복이 보기능하기에,
기억 투쟁은 이러한 인간의 본성과 운명을 거슬러 오르는 ‘불편한 진실‘에의 고단한 여정일 수 밖에 없다.


세계가 무너지고 돈과 권력이 사람을 배반하는 세상일수록 꿈꾸어야 하고, 바라보고 나아가야 하는 세계인 것이다. 동화는 결코 낭만이 아니다. 잔혹한 삶을 기억하고 지키는 것. 모든 동화의 시작은 거기에 있었다. 약전 또한 그 길 한복판에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 세상에는 416, 304 같은 숫자와 세월호라는 배 이름만 남을 테니까.
그러나 참사의 기억은 사람에 대한 기억으로 남아야만이 반복되지 않을 테니까. 우리는 사람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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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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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미디어가 세상을 전달하고 분류할 때 사용하는 언어가 더해진다. 그것은 전문 경영인들이 사용하는 전문용어나 논리와 매우 비슷하다. 그 언어는 모든 것을 ‘계량화 하고 본질,
혹은 질적인 면에 대해서는 좀처럼 언급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공식적으로 말해지는 것들, 그리고 그것들이 말해지는 방식이 시민들로 하여금 일종의 기억상실에 빠져들도록 부추긴다. 경험이 지워지고 있다. 과거와 미래라는 지평선도 희미해지고 있다. 우리로 하여금 끝없이 불확실한 현재에만살게 하려는 조건들이 갖추어져 있다. 망각 상태의 시민으로축소된 것이다.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여러 물리학자들이 설명했듯이 시간이 서적인 것이 아니라 순환적인 것임을 기억하자. 우리의 삶으 하나의 선 위에 찍힌 점이 아니다. 이 선은 전례가 없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 질서의 일시적 탐욕에 의해 절단되고 있다. 우리는 선 위의 점이 아니라, 원의 중심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가 아는 그 모든 언어로 칭찬하고,
욕하고, 저주하는 일을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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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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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는 현재의 자신에 만족하는 법을 배우게 되고, 그와 함께 어떤 특별한 기술도 익히게 된다. 그는 혼자 살아가는 프리랜서가 된다.

오늘날 세계 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투기 금융 자본은 정부를노예 주인처럼 활용하고, 전 세계 미디어를 마약 공급상처럼활용한다. 이 폭정의 유일한 목표는 이윤과 자본 축적인데, 이를 위해 사람들에게 소란하고, 위태롭고, 매정하고, 설명할 수없는 세계관 혹은 삶의 패턴을 강요한다. 

명할 수 없는 것들은 매일매일 늘어나고 있다. 국가의 정치가들이 하고 있는 논쟁이 더 이상 그들이 할 수 있는 일 혹은해야만 하는 일과 아무 관련이 없기 때문에, 보편적 참정권이라는 것도 의미 없게 되어 버렸다. 오늘날의 세계를 결정하는근본적인 판단은 모두 투기 자본가와 그 대리인들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그들은 이름이 없고 정치적인 발언은 전혀 하지 않는다. 열 살 소년이 추측했듯이 "매일매일 발생하는 문제들, 채우지 못한 욕구와 좌절당한 욕망을 일컫는, 혹은 설명하는 단어는 없다."

 채플린의 익살이 지닌 에너지는 반복적이고 점점 커진다. 매번 넘어질 때마다 그는 새로운 사람이 되어 일어난다. 같은 사람이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인 어떤 사람, 넘어질 때마다 다시일어날 수 있게 하는 비밀은 바로 그 복수성複數性이다.
또한 그 복수성은 그의 희망이 반복적으로 산산조각 나는 일 에 익숙해진 후에도 여전히 다음 희망을 놓치지 않을 수 있게해 주었다. 그는 반복해서 굴욕을 당하면서도 평정심을 잃지않는다. 심지어 반격을 할 때도 그는 유감스럽다는 듯이 평정심을 잃지 않는다. 그런 평정심이 그를 무적의 존재로, 거의 불멸의 존재로 보이게 한다. 희망 없이 반복되는 일상의 사건들틈에서 그 불멸성을 감지한 우리는, 웃음으로 그 알아봄을 인정한다.

스칸디나비아에서는 여름이 되면 사람들이 나이에 상관없이 스스로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옷을 벗는다. 그렇게 햇빛과 물,
그리고 보상을 받는 몸이라는 세 개의 순수가 서로 접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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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진 언어는 하나의 몸이며, 살아 있는 피조물이다. 피조물의 얼굴은 말이며, 신진대사는 언어학이다. 그리고 이 피조물의 집은 발화된 것뿐만 아니라, 발화되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모국어는 한 인간의 첫번째 언어, 갓난아기가 어머니의 입을 통해 처음 듣게 되는 언어다. 그래서 그렇게 불리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 내가 묘사하려는 언어라는 생 명체가 분명 여성적이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아마 음성학적자궁이 있을 것이다.
 하나의 모국어 안에는 모든 모국어가 담겨 있다. 다른 말로하자면 모든 모국어는 보편적이다.

오늘날 주된 정치적 담론에서 사용되는 언어들은 그 어떤 언어 생명체에도 속하지 않는, 무기력하고죽은 단어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 죽은 ‘공허한 말의 사용‘은기억을 지워 버리고 무자비한 자기만족을 낳는다.

당신이 적었죠. "현대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어떤 책이나이론에서 제시한 계획에 따라 자신들의 투쟁을 수행하는 것이아니다. 현대 노동자들의 투쟁은 역사의 일부이고, 사회적 진보의 일부이며, 역사 한가운데서, 진보 한가운데서, 싸움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반드시 싸워야만 함을 배운다."

"나는 있었고, 지금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라고 당신은 말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보여 준 본보기 안에 살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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