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 민중사
문익환 지음 / 정한책방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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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 올림픽이 한창이다. 남북한 단일팀이 구성되고 한반도 기가 펄럭인다. 북의 공연단이 공연을 했고, 고위 간부들이 방한했다. 분단과 전쟁의 위협만이 살길인 자들은 평화의 의미를 깎아내리는데 혈안이 되었지만 조금은, 아주 조금은 '통일'이라는 말이 사람들의 대화 사이에 끼어들게도 되었다.
통일 논의, 통일.
북한의 사람들은 얼굴이 빨갛고 머리에 뿔이 달렸을거라 생각했던 유년의 나는 대학생이 될 때 까지 '통일' 이라는 것이 가능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남한 사람을 보면 죽창을 찌르고 목을 따버린다는 그들이 이웃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으니 말이다.
통일은 책에나 있는 단어였고, 의연한 척 내뱉는 단어였다.
불쌍한 사람들을 품어야 한다는, 내 민족 한겨레 라는 내재된 의미따위는 없었다.
통일은 불가능한 희망사항이었다.
하지만 지금, 북의 사람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만나고 어색하지만 웃음을 나누기까지 통일논의가 싹을 틔우고 줄기를 세우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희생이 있었나 생각해보게 된다.
그 한 가운데 '문익환'이라는 이름이 있다.
통일을 이야기할 때면 늘 선생의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어떻게 해서든 통일을 일구는 씨앗이 되겠다 작정한 그 형형한 눈빛이 말이다.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히브리 민중사'가 그가 세상에 온 100주년을 기념하여 복간했다고 했다.
초판이 세상에 나왔을 때, 변변하게 책 한 권 사 읽을 수 없었던 나는 '하루만 빌려주면 안돼?' 라며 책을 가진 친구에게 부탁했고 하루만에 다 읽어야 했다. 순식간에 읽어낸 책. 정확히 기억되는 부분은 없었지만 가슴이 뛰었고, 예언자들의 이야기에서 수많은 열사들의 얼굴이 스쳤다.
책을 덮고 긴 한숨을 몰아쉬며 울었던 것 같다. 우리의 투쟁들이 우리의 바람들이 기어이 이루어질 날이 있겠구나. 있어야겠구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을거다.

히브리 민중사는 단지 그들의 역사가 아닌 작금의 우리들과 닮아있다. 궁중사가들의 번지르르한 지배자의 서술을 뒤엎는 민중의 시선, 예언운동의 본질. '해방'이라는 말의 뜨거움을 온전히 읽게 된다. 생전에 선생이 강연하시던 모습이 떠오를만큼, 요즘 말로 '음성지원'이 되는 듯한 책을 온전히 내 것으로 붙들고 읽었다. 사흘에 걸쳐 천천히 읽어내며 마음을 다잡는다.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2018년 대한민국을 사는 우리들에게 위로처럼 격려처럼 읽히는 것이다.
통일을 자꾸 미루며 자신들의 이익셈법에 몰두하는 정치인들과 한반도를 전쟁터로 만들려는 강대국들의 속셈과 아직도 건재한 국가보안법, 삶의 터전인 땅을 더는 돌볼 수 없는 농민들과 현장을 떠나 높은 굴뚝에 오르고 거리에 노숙을 하는 노동자들, 한데로 밀려나 목소리 조차 내지 못하는 사람들. 이 모두 히브리의 민중들과 닮아있는 것이다.

뜨거운 사랑으로 싸우고 울었던 호세아.
온몸으로 사랑이었던, 온몸으로 예언자였던 호세아( p 207)
호세아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목사님의 모습이 자꾸 겹쳐졌다.
발바닥으로 살겠다던 목사님의 음성과 표정이 살아오는 기분.
어쩌면 이 끔직한 세상을 더는 볼 수 없었던 하느님이 '가라!' 명하신 예언자는 아니셨을까? 그 명령에 온마음으로 복종하신 건 아니었을까?
사람을 사랑한 인생이 그대로 아픔인 민중들을 사랑한 선생의 이야기가 히브리 민중들을 투영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거룩한 신으로 너희 가운데 와 있지만
너희를 멸하러 온 것이 아니다.
이 백성은 사자처럼 소리치는 나의 뒤를 따라오리라.
내가 소리치면
내 자손은 서쪽에서 달려오리라.
에집트에서 참새처럼 날아오고
아시리아에서 비둘기처럼 날아오면
나는 내 백성을 저희 집에 살게 하리라.(호 11:8~11)'

백성 모두가 '저희 집'에서 살게 되는 것.
그것이 해방의 모습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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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독서 - 바람구두 인생 서평
전성원 지음 / 뜨란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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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인생 서평이라는 말을 이마에 붙인 책을 오래 기다려 읽는다. 전성원. 저자의 약력은 굳이 말하지 않으려 한다.
책이 나오고 대단히 대단한 분들의 서평과 추천이 이어졌다. 변방의 야매독자 따위가 말 한마디 거드는 것은 표시도 안 날 뿐더러 잘 정돈된 밥상 귀퉁이에 이빨빠진 종지 하나 얹는 일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서평도 아니고 굳이 정하자면 나의 글은 '사용후기' 같은 것이다. 제품에 대해 상세설명은 할 수 없으며 내가 써보니 이런게 좋더라, 라는 후기. 상품의 용도와는 다르게 썼지만 그런 용도도 있더라 하는 식의 후기일지도 모르겠다. 설겆이 용 고무장갑을 사서 설겆이할 때는 잘 안써서 모르겠지만 이게 꽉 닫힌 유리병 열때 좋더라구요. 호호호..하는 후기를 쓸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좋아했다'라는 과거형이 적당할 것 같다. 아직도 책을 잔뜩 쌓아두고 읽고 있으며 새로운 책이 나오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책을 살피기도 하고,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어떻게 해서라도 손에 넣어 읽어야 직성이 풀린다. 하지만 책을 읽는게 늘 즐겁고 만족스럽지는 않다.  저자들의 필력이 기대만큼 강력하지 못해서도 아니고 내 눈이 노쇠한 탓이다. 즐거움으로 책을 읽던 시기는 찰나였다. 어느 순간부터 습관처런, 고집처럼 책을 읽었다. 중독된 사람마냥. 책을 읽지 않아도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건만 책을 탐하는 것은 어떤 허기때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이 지식이건 감동이건 지혜건간에 아무것도 내 것이라 움켜쥘 수 없는 현실에서 오롯이 나에게만 남는 것, 독후감(책을 읽은 후의 감상, 혹은 의미)의 맛을 알아버린 것이다.
책은 채워가는 것이고 담아가는 것이라 생각했다. 삶이 다듬어지고 생각이 정리되고 간단없이 행동할 수 있는 용기와 정당성을 얻는 일.
그렇게 읽어 온 책은 아집을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다. 궤변과 적절한 말장난으로 다른 이의 눈과 귀를 후리기에 모자람이 없었던거다.

책을 읽는 것이 '고백'이 된다는 것을 <길위의 독서>를 읽으며 알아챈다. 그쪽 업계(?)에서는 다독가로 유명하다는 저자. 개인 블로그에 써놓은 500여편의 서평들 중 간추린 것이라 했다.
서평을 읽는 건 가끔 참 재미없다. 제일 재미없는 서평은 '출판사 제공 서평'이지만 말이다. 재미없을 수 밖에 없다. 저마다의 소용이 다르고 필요가 다르니까.
라면을 끓일 때 제조방법대로 계량해가며 타이머 놓고 끓이는 이가 몇이나 되겠나. 저마다의 방법과 저마다의 입맛과 취향이 작용할 수 밖에 없다.
어쨌든 책을 받아들고 내가 읽었던 책들을 이 사람은 어떻게 읽었는지 궁금했다.
확실히 결이 다르다.
문화 전반과 당시의 정세와 읽는 이의 세계관과 현실이 하나로 잘 비벼진 글은 어느 한군데 어긋나지 않는다. 그것이 실력이라면 실력이고 연륜이라면 연륜일게다. 내가 이런것도 아는데~하는 거드름은 없다. 자연스레 이어지는 연결이 일품이다.
가장 압권인건 모든 책에 녹아든 그의 삶의 '고백'이다.
평탄치 않게 살아온 그의 모진 삶의 궤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어쩌면 책을 읽는다는 건, 자신을 '고백'하는 행위인지도 모른다. 문장의 행간 사이에 걸린 제 삶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애써 화해하거나 무겁게 인정하는 과정을 훈련하는건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그런 발견과 인정이 책과 나를 연결하는 통로가 되고 사유의 기반이 되며 고백, 혹은 진술의 단초가 되는 것일게다.
내 안으로 꾸역꾸역 쌓아두기만 하는 저장강박이 아닌, 잘 정돈된 삶의 구획정리쯤은 되지 않을까.
책을 읽는 내내 말을 하고 싶어졌다.
책을 읽으며 행간에 비춰진 내 그림자를 보고 모른체 한 죄, 내 몫의 삶이었지만 내것이 아니라 부정한 죄, 한껏 욕심부리며 책을 학대한 죄..등등등 고스란히 고백하고 싶어졌다. 머리에 책을 이고 고통받고 있는 성자의 제단이 있다면 말이다.

잘 꾸려진 책이다. 굳이 저자의 약력이나 살아온 길 을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책 속에 그려지는 그의 진솔한 고백을 읽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어떤 판단도 없이 '전성원'을 읽을 수 있다.
전성원이 읽은 책이 아니라 '그'를 읽을 수 있는 책.
오랜만에 즐겁게 책을 읽었다.

책을 좋아한다. 라고 현재진행형으로 말 할 수 있을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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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2-06 16: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거짓말 안 하고 제 입으로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제 글은 확실히 재미가 없습니다.. ㅎㅎㅎ

나타샤 2018-02-06 16:59   좋아요 0 | URL
재미있습니다. 낯가림 심하고 까탈스러운 제가 챙겨보는 몇 분 중 한 분 이시거든요. ^^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 청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까지
가토 요코 지음, 윤현명 외 옮김 / 서해문집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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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유기체와 같아서 그 실체를 알기가 요원하다. 단순한 기록이 아닌 시대가 가지고 있던 정황과 구조 그리고 세계관을 읽는 방식에 따라, 혹은 관점에 따라 다르게 읽히기도 하니까 말이다.

일본.

군국주의, 제국주의 라는 말이 먼저 떠오르는 이웃나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제강점시기라는 아픈 역사 때문일거다. 사죄도 반성도 없는 일본에 대한 감정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 그들은 어째서 반성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들을 피해자처럼 여기게 되었을까. 어째서 자신들을 아시아의 맹주라고 여기게 되었을까. 단순히 민족감정이거나 선민의식이 아닌 그들만의 무엇의 정체는 뭘까?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라 생각했던 시대의 오래전 지도, 좁디좁은 세계관과 주변국에 대한 이해밖에 없었던 지도를 보면 일본은 보이지도 않았다. 물론 조선도.

그 강대한 나라였던 중국, 청나라는 어떻게 일본과 전쟁을 치르게 되었고, 러시아는? 식민지 시대의 막을 연 1차 세계대전에서의 일본은? 만주사변과 태평양전쟁에서의 일본은? 그 많은 전쟁을 치르고도 여전히 군사력을 키우고 즉시 출동태세를 갖추는 일본. 어째서일까?

 

이 책은 '가토 요코'가 2007년 5일간 진행한 강의를 토대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중학생부터 고등학생 스무명 남짓의 인원과 문답형식으로 이루어진 내용이다. 사실 어리다면 어린 친구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강의이니만큼 깊은 이야기가 나오지는 안겠구나 하는 선입견이 있었다. 하지만 과연 이 내용들을 학생들이 다 이해했을까? 싶을만큼 강의의 내용은 밀도있고 전문적이었으며 때때로 강력한 비판을 동반하기도 했다.

굵직한, 세계정세의 판도를 바꾸거나 영향을 준 다섯가지의 전쟁을 치른 일본.

내용을 들여다보면 간단치 않았을 전쟁들이었다. 6.25 전쟁을 치르고 피폐해진 삶을 다시 추스르는데 걸렸던 시간을 따져본다면 청일전쟁의 발발부터 태평양전쟁까지 겨우 50여년의 시간동안 저들이 치른 전쟁은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다.

자국의 영토에서 치른 전쟁이 아니었다는 것을 감안해도 말이다. 그들이 받았을 내상(內傷) 또한 간단치 않았을것임에도 다시 전쟁을 시작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를 지금의 세대들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가.

책을 읽으며 어떤 선입견으로 읽어나가면 이 책을 일본의 변명처럼도 읽히겠구나 싶은 걱정도 있었다. 어차피 판단은 독자의 몫이니 그리 읽히는 것 역시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서구 열강의 침략이 본격화 되던 시기. 제너럴 셔면 호가 출현하고,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가 잇달아 터지던 때. 격동의 시기에 운요호 사건과 그것으로부터 본격화되던 근대사 속의 일본. (임진왜란은 좀 밀어두더라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까지 개혁과 보수의 대립은 첨예했다.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내정을 간섭하던 일본의 이야기는 시험준비를 위해서라도 딸딸 외워야했다. 동학혁명이 일어나고 청에 원군을 요청하고, 텐진조약에 의해 일본의 출병도 이루어지고 조선에 대한 청의 지배를 약화할 목적으로 '조선은 자주국'이라 했던 자신들의 주장을 뒤엎고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과 급기야 나라의 국모까지 시해했던 그 시기. 청일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그로부터 50년간 크고 작은 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이야기. 일본 국내의 정세와 국민정서, 급변하는 주변국과 강대국의 입김에 살아남기 위한 그들만의 전략. 그 과정 속에서 자신들이 전쟁에 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그들의 판단은 어디로부터 기인하는 것인지를 낱낱히 읽어낼 수 있다. 무모하다고 여겨지는 부분까지..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로, 전쟁이라는 것은 몇장의 사진이나 피해자들의 증언, 각색된 영화나 논픽션 소설, 르포등으로 접하게 되다보니 전쟁은 파괴되고 죽어가고 사람들이 유린되는 장면들로 떠오르곤 했다. 전쟁은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님을 승전과 패전의 결과가 막연히 수탈과 복종의 관계설정만은 아님을 다시 확인한다. 한 나라의 체제를 바꾸는 일. 그것은 참으로 치명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우선적으로 이루어지는 불평등조약들.

일본 역시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이라는 것을 체결했었다.

이 조약은 '가나가와. 나가사키, 니가타, 효고의 개항' '통상의 자유' '개항장에 거류지를 설치해 일반 외국인을 거주하게 함' ' 일본에 쳬류하는 자국민에 대한 영사재판권(치외법권)',' 일본은 관세율을 정할 수 없음(관세자주권 박탈)'을 골자로 한다.

이런 내용의 조약을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와도 체결했다고 한다.

어딘가 낯익지 않은가?

1876년 강화도 조약과 닮았다. 너무나도 많이..

부산,원산, 인천 개항. 치외법권 인정, 조선 연안 측량, 일본화폐의 통용과 무관세 무역 인정..

 

분절되어 알고 있는 근현대사 속의 전쟁과 그 속의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를 생각하게 한다.

정치적 셈법이 작용하고, 참전과 반전의 입장 속에서 수없이 작용하는 이익 계산. 전쟁을 통해 자극되는 국민들의 정치력. 이것이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전쟁은 말 그대로 용광로처럼 뜨거운 격전의 시간임에 분명하다. 적국과의 전투 뿐 아니라 주변국과의 외교전, 국내의 민심과 보상에 대한 계획까지 동시에 촉발되는 것이다. 나라마다 자신들의 정체성과 자국의 이익을 챙기기위한 전략과 전술이 있겠지만 근현대사를 넘어오면서 일본이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전쟁'이었던 것이다.

책은 수많은 선택지 속에서 전쟁을 선택하고 그것을 이어올 수 밖에 없었던 일본의 민낯을 보여준다.

 

계속 반문하며 읽어야 했다. 다른 방법은? 그 사람은 왜? 어째서 이렇게까지?

 

전쟁은 답이 아니다. 어떤 경우라도. 답이 되어서도 안된다. 그것이 역사적으로 한 나라의 발전이거나 이익을 위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이미 벌어졌던 역사 속의 전쟁들은 그렇다 치고, 이후로 전쟁이 대안이 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 어떤 이유를 대더라도 .

 

일본의 전쟁으로 점철된 근현대사를 읽으며 생각이 많아졌다.

'그럼에도.' 라는 말이 쓰인 배경이 궁금했다. '그래서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로 자꾸 읽힌 탓이다. 아마 놓친부분이 있거나 오독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큰 맥락으로 전쟁을 정리해 낸, 그 속에 흐르던 전쟁의 본질을 감정적인 이해가 아닌 이성적인 이해가 가능했던 것은 큰 성과라 하겠다.

잘 모르는 일본 정치가들의 이름과 이야기는 낯설기도 하고 잘 읽히지도 않았지만 가까운 시간대로 넘어오며 낯익은 이름들이 등장하자 훨씬 수월했다.

 

일본과의 관계를 떠나서 '전쟁'이라는 것에 대한 생각이 깊어진다. 금방이라도 한반도에 전쟁이 터질것처럼, 혹은 전쟁을 해야만 할 것처럼 떠드는 사람들이 늘어난 요즘. 과연 그게 답인가? 묻고 싶어진다.

머리말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육군이든 해군이든 군이라는 조직은 국가의 안전보장을 최우선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소련이나 미국과 전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국민 생활 개선을 위한 개혁을 가장 먼저 포기합니다.>

국가의 안전 보장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군조직도 없고, 전쟁을 해야한다고 분위기를 조성해 국민들의 희생을 강요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자들을 위정자로 두었다면 이 얼마나 섬뜩한 일인가 생각하게 된다.

 

여러가지의 생각거리들을 적어두게 한 책이다. 또한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던 전쟁의 본질, 국민들이 배려되거나 계산되지 않는 전쟁이 현재도 가능하다는 생각, 하지만 전후의 이익협상은 불가능 할거라는 판단. 현재의 전쟁은 아타를 막론하고 공멸할 것이라는 생각이 짙어진다.

차분히 읽어볼만 한 책이다.

 

#서해문집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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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2-04 17: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본을 비판하려면 일본의 역사, 정치 제도를 공부해야 합니다. 공부를 안하면 일본이 왜 군국주의의 향수를 벗어나지 못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게 돼요.

나타샤 2018-02-04 17:35   좋아요 0 | URL
동의합니다. 책을 읽으며 동안 놓쳤던 부분을 되짚었습니다. ^^
 
회색 인간 김동식 소설집 1
김동식 지음 / 요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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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부쩍 화제가 되고 있는 김동식의 '회색인간'을 읽는다.문학을 제대로 배운 적도 없는 노동자 출신의 작가라고 찬사가 대단하다. 그러면 문학은 제대로 배운 비노동자의 손에서만 탄생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의도는 그렇지 않더라도 나는 홍보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작가의 상상력은 탁월했다. 최소한 이야기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이다. 끈기를 가지고 자꾸 써내려가다보면 정말 멋진 작품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도 생긴다. 오유게시판에 글을 썼었다고 했다. 회색인간을 읽고 나머지 두 권의 책을 사서 읽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람들도 많다. 그럴 수 있다. 책을 읽으며 세가지 정도의 생각을 했다.

노래를 잘 하는 맹인동생을 가진 사람이 있다. 사람들에게 노래를 들려주자 모두들 환호했다.목소리가 섬세한 동생의 노래는 눈을 감고 들어도 좋았다. 사람들은 맹인인데 노래를 잘한다고 했다. 동생은 매일 노래를 불렀고 연습을 했다. 사람들은 말했다. 맹인들은 안보이는 대신 노래를 잘 하는 재능같은게 생겼을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사람들은 질투하는건지도 모른다. 맹인치고는 잘한다고, 그걸 빼면 별거 없을 거라고..동생이 아무리 노래를 잘해도 말이다.

획기적인 상품을 들고 시장에 들어선 영세상인이 있다. 아직은 좀 덜 세련되었지만 그의 아이디어는 놀라웠다. 사람들이 환호했다. 대기업이 이 정보를 놓칠 리 없었다.비슷한 컨셉으로 시장에 들어섰다. 영세상인은 버티지 못했다. 결국 더 새롭고 더 나은 것을 내놓을 시간도 자본도 없는 그는 시장을 떠나야했다. 그의 것과 닮은 상품들이 사방에 널려있지만 처음 그것을 만들어낸 그는 거기 없다.

마지막은 그가 노동자이기에 가능했던 상상력은 무엇이었을까. 반드시 노동자이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상상. 그리고 이야기들..
그렇다면 '노동의 고독을 승화하며 써내려간..' 따위의 카피는 적절하지 않다.

노동자라는 것과 정식으로 배우지 않았다는 것을 앞세워서는 안된다. 김동식의 상상력과 이야기는 그의 것이다. 일상과 삶을 샅샅이 살피고 그 속에 묻힌 이야기를 찾아내는 그는 이야기꾼이다.
그를 수식하는 말들이 참 얄팍하고 불성실?)하다. 작가로서의 김동식을, 그의 독특한 상상력과 세계관을 이야기하는게 먼저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참가자의 사연을 늘어놓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실력이 출중한 사람조차 사연에 묻혀 폄훼되는 일도 비일비재했는데...

나머지 두 권은 언제 읽을지 기약이 없다.
지금의 이 소란이 좀 답답하다.
분명한건..김동식의 이야기는 흥미롭다는 것이다. 그는 천상 이야기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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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 삶창시선 50
이종형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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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돌에 새겨진 子.혹은 女

살아 있었다면
큰형님뻘이었을
큰누님뻘이었을
아무개의 子, 혹은 女라고만 새겨진 위패 앞에서

겨울바람에 떨어져 누운
동백의 흰 눈동자를 떠올렸습니다

뼈와 살이 채 자라기도 전에
죽음의 연유도 모른 채 스러져
까마귀 모른 제삿날에도
술 한 잔 받아보지 못하며
애써 잊혀진 목숨들

거친오름 그림자를 밀어낸 양지바른 터에
복수초 노란 빛깔보다 선연한
이름씨 하나씩 꼭꼭 심어주고 싶었습니다.

이 섬에 피는 꽃과 바람들
곶자왈 숨골로 스미는 비와 태풍들
저 이름의 아이들로 다시
태어나게 하고 싶었습니다.

-이종형 시집/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 중에서

--------------
4.3항쟁.
차마 전하지 못했던 입술들이 뽑혀나간 혀들이 바람 속에 싹을 티우고 잎을 맺고 꽃을 피워 시인의 눈에 담겼나보다. 뽀얀 표지를 갓난 아이의 볼인양 자꾸 쓰다듬게 된다.
이 시를 읽으며 나는 벌써 4년 전이라 말해야 하는 그 해 제주로 가던 아이들을 떠올렸다.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
'뼈와 살이 채 자라기도 전에/죽음의 연유도 모른 채' 떠난 아이들을 말이다.
그 해 4월 이었다.

기어이 쓰여진 시.
시어 하나하나가 핏덩이다.
제주 어디라도 발 딛는 곳마다 신음이 새어 나올것 같은데 그 땅에 기지를 짓고 그 땅을 재산 삼는 짓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저지르는 자들..
제주에 노란 유채가 피는 건 우연이 아닌듯 하다.
노랗게 자지러지는 비명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목숨들을 잊고 사는지..얼마나 피맺힌 역사에 기대어 사는지..오래 끊었던 술 한잔 마셔야겠다.
시집이 좋다..라고 차마 말하기 두렵다.
좋고 나쁨의 구분조차 불필요하다.

4.3항쟁에 뿌리를 둔 시집. 어떤 역사적 사건에 근간을 둔 시집들은 너무 무겁거나 비통하다. 비극적인 역사를 노래하자니 어쩔 수 없을테지만..시집은 한 개인의 역사와 비극의 역사를 교차하며 쓰였다. 어떻게 이 악몽을 거둘까. 피하는게 아니라 마주보며 함께갈까를 이야기한다.
1월도 다 지나고 허둥대다보면 곧 4월이겠지.

시집을 다시 차근차근 읽기로한다.
어떤 해석도 의미도 두지 않고 제주의 구멍난 바위 사이를 지나치는 바람소리를 듣듯 읽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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