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회 사무실에서 전화를 받았다. 딱 이 시간 쯤.

"Y(연대)에서 학우 하나가 직격탄을 맞았어. 의식이 없대. 다들 그리로 와. 봉쇄중이니까 알아서 들어와. 철야할꺼야."

 

이한열이었다.

박종철의 죽음이 도화선이 된 싸움의 불은 그렇게 폭발하게 되었다.

산을 넘고 기어기어 들어간 학교는 난리도 아니었고, 학교를 에워싼 경찰들이 더 많지 싶었다.

세브란스를 지켜야한다고 학우들은 조를 나눠 순찰을 돌았다.

빼앗길 수 없었다. 연대 도서관 복도에서 아무렇게나 누워 졸다 깨다를 반복하다 광주의 어느 하루를 꿈꾼것 같기도 했다.

경찰들이 세브란스를 침탈하려 한다는 말이 밤새 몇번인가 반복되었고 그때마다 눈물이 범벅이 된 채 그들 앞에 눕겠다고 뛰어나가곤 했다.

 

밤은 길었다. 점점 단단한 봉쇄가 이루어졌는데 점점 많은 학우들이 모였다. 우리는 '한열아 일어나'라고 외쳤고 '한열이를 살려내라'며 울었다.  이 가슴저미는 현장이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다. 먼지와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은 흡사 어느 섬나라 원주민의 문신처럼 얼굴에 가득했고 애통함과 간절함과 분노가 서로 앞에 서겠다고 내 속에서 싸웠다.

 

 

 

 

 

 

 

 

 

 

 

 

 

 

 

 

  6월 10일 뜨거운 싸움이 시작되었다. 세브란스를 지킬 학우들을 남기고 모두 거리로 나섰다.

  항쟁의 시작이었다.

  솔아 푸르른 솔아를 쓴 박영근의 글들이 전집으로 엮였다. 참 다행이다. 6월을 이야기할 때 나도 모르게 웅얼거리게 되는 노래다. 어쩐지 이한열을 부르게 되는 노래. 그랬다.

  그 해와 그 다음해, 유난히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분신을 했고, 투신을 했고, 진압 도중 죽고..그렇게 생때같은 목숨들이 거리를 들끓게 했다. 막연한 분노가 아니라, 어제까지 같이 구호를 외치던, 노래를 부르던 친구의 주검을 마주한다는 건 두려움이었다. 이 세상이 살아도 좋은 세상인가 묻게 되었고, 그렇지 않다는 대답이 돌아올것이 두려웠던거다.

 

  달이 바뀌고 시간이 지나도 모든 달력마다 비명이 넘쳐난다.

4월의 달력도, 5월의 달력도, 6월의 달력도...매번..

 

 

 

나는 가끔 아이들에게 아룬다티 로이의 우리가 모르는 인도를 이야기 해준다. 아이들은 "쌤, 좌파에요?"라고 묻는다.

"어째서?" 라고 되물으면,

"우리나라 자꾸 욕하잖아요. " 한다.

"아닌데? 이거 인도 이야기야" 라고 하면, 아이들은 일제히 외친다.

"와~ 대박, 소름, 우리나란줄..도플갱어각.." 등등..

 

  너무나 닮은 인도의 이야기.

 더 닮은 책이 보이기도 한다.

 

 

  이 책을 읽고나면 또 뭐가 보일까 싶다.

 

 

 

 

 

 

 

 

 

 

내년이면 30년. 변화의 격랑이 몰아친후 답보상태이거나 심지어 퇴행중인 나의 조국을 어찌해야할까.

사무실 책상 위에 놓인 전화기를 한동안 바라본다

 

따르릉 ..전화가 올 것 같아서..

Y대 학생이 쓰러졌대..

떨리는 목소리가 들릴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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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6-06-09 2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꼭 29년전 오늘 1987년 6월 10일
자신이 뭘 했는지
똑똑히 기억하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요?

저는 그날의 냄새와 소리를 기억해요
˝한열이를 살려내라˝

-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어야만 하는지..
- 낡은 타이거 운동화..

오늘 하루종일 머리속에 떠 다니는 생각.. 생각

나타샤 2016-06-09 23:32   좋아요 0 | URL
기억이 동력이 되길 바랄뿐입니다..생각이 많은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