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을 닫아도 햇빛이 가득하다

침묵만이 내 몸을 두르고 있다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눈꺼풀이 휘황한데


간판과 의자와

거닐고 또 앉은 사람들은 온통 주황빛이다

생경한 말들이 내 몸을 투과한다


긍지와 독설을 내뿜고

두려움으로 사람을 처형하는 동화의 광장


피의 압박 혹은 피의 이끌림

생체 시계는 조율 중인데


교수대에 걸려 부딪히는 시체들의 밤에도

소름을 경험하지 못하는 동화 속 주인공처럼

기어가는 새를 경멸할 줄 아는 자들

피를 물감으로 아는 자들, 그들에게 경의를


침묵하는 개를 지나

경계석을 넘는 새의 그림자


통과할 듯이

단번에 날아오다, 멈춘 황금빛

나를 한번 쭉 훑고는 판단을 끝낸다


슬픔이 집시처럼 춤을 추고

음표는 걷고 음표는 가지에서 흔들린다

거위들의 행진 같은 것


변박과 고저를 번갈아 가며

끝나지 않을 내전의 지대를 건넌다


홀로그램처럼 세계가 겹쳐지고

그림자와 사람이 서로를 통과해 가는 광장에는

시간이 길게 꼬리를 내리고

웅크린 채 엎드려 있다


피의 흔적은

어느 순간 떠올라 흘러다니는 게 아니겠습니까

안개와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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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에 있다는 피의 광장을 떠올린다. 스톡홀롬 대학살이 있었다는 그 곳. 영문 모름과 억울함이 4분쉼표처럼 혹은 온쉼표처럼 적혔을 붉은 악보를 떠올린다.

광장..대학마다 있었던, 혹은 아직도 있었을 민주광장. 왕궁이 있던 곳이면 있었던 왕궁광장..아, 지금은 여의도 광장이라 불리는 옛이름이 5.16광장이었던 곳..

광장에서 먹고 사는 사람들, 혹은 팔짱을 끼고 지나는 사람들, 또는 그곳에 모여 외쳐야 했을 사람들..광장은 그런 곳이리라. 지나가고 모여들고 환호하거나 비명으로 마감하는 공간. 광장으로 이어지는 골목들만이 발자욱 소리를 기억하고 내밀한 사연을 담았을게다. 그리고 오랜 시간을 함구한 채 광장으로 놓인 골목이라는 것에 자랑스러워하거나 수치스러워할게다. 실핏줄처럼 이어진 골목들에 둘러싸인 광장..광장의 보도블럭 밑에 켜켜이 쌓여진 피의 화석을 허리 굽혀 찾는 사람이 있을까.

그랬었구나..라는 밑도 끝도 없는 정보 수집으로 끝날지도 모를일이다.


교수대에 걸려 부딪히는 시체들의 밤에도

소름을 경험하지 못하는 동화 속 주인공처럼

기어가는 새를 경멸할 줄 아는 자들

피를 물감으로 아는 자들, 그들에게 경의를


최근 우리는 광장을 경험한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광화문 광장을..시청앞 광장을, 그리고 광주의 도청 앞 광장을..

모두가 떨쳐 일어서는 광장의 힘과 광장의 생태를 현실 속에서 체득하고 역사로 기록한다.

그런 광장을 겪었음에도 세상은 여전히 혼란스럽고 가혹하다. 아직도 광장에 수혈이 덜 된 탓일까?

피폐해진 사람들은 서로를 향해 독설을 하고 비난하고 조롱하며 그 행위의 정당성을 폭력적으로 확인한다.

비난은 혐오가 되었다. 혐오는 누군가를 이유없이 죽일 수 있는 동기가 되었다. 까닭도 모른 채 한 생명이 죽었고 이유는 간단했다.

여자에게 상처를 받아서..여자라서..

어떤 이들은 피의자가 정신질환을 겪고 있어서였다고 한다. 정신질환의 시작이 무엇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생래적인 질환이 아니었다면 무엇이 그를 그렇게까지 만들었을까..남성과 여성이라는 것이 전선을 만들고 마주서야 할 존재인것인가.

사람들의 추모가 이어졌고, 피해자를 다시 조롱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도대체 우리는 어떤 사람들인가를 되묻게 된다. 저들은 이라고 말하지 않겠다.


피의 광장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누군가 교수형을 당해도 '그랬대'라고 이야기할 만큼 건조하게..울며 추모하는 사람들을 조롱할 만큼 참혹하게..이어지고 있다.

강남역 출구 앞에 만들어진 추모의 광장은 드러난 광장이겠지만 수없이 많은 피의 광장들이 골목마다 도사리고 있다.

쫓겨나는 사람들의 눈물이 고인 광장. 땅 위에 광장을 허락받지 못해 높은 굴뚝으로 올라가 만든 하늘 위의 광장, 깨어나지 못한 사람에게 어서 일어나라 간절히 부르는 병원 앞 광장, 폭력과 조롱을 고스란히 받아낼 수 밖에 없는 여성의 광장,


결코 안녕인 세계..

많은 공간들이 들어차 있다. 그림처럼 고요하게 그려진 시 속에서 시의 혈관을 찾고 심장이 박동을 느끼는 것이 흥미롭다.

맥을 잘 짚는 용한 한의사에게 진맥을 받는다. 그는 심장이 안좋군요. 이렇게 치료를 해야겠어요. 조심하셔야 할것들이 있어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래도 아직 신장은 건강하군요. 이 아이를 살려봅시다. 이 놈이 힘차게 움직이면 다른 것들도 좋아지겠어요. 노력하셔야 할것들이 있어요..라고 말한다.

암담함에서 해볼만 한으로 바뀌는 상황. 의사의 마지막 인사 '안녕히 가세요'를 기껍게 들을 수 있다.

우리는 안녕하다고, 안녕해야한다고..결코 안녕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문득..

광장 모퉁이에 서서 인사하고 싶어진다. 우리는 안녕할겁니다. 광장을 벗어나지 않고 끊임없이 싸우며 저 붉은 도로가 물감이 아닌 피의 역사인걸 말하겠습니다.

조롱과 혐오가 아닌 분리와 적대가 아닌 '우리'가 될 때까지, '우리'가 아니라고 우기는 저 입들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안녕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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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5-20 16: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터넷 세계에도 피의 광장이 많아요. 같은 의견이 보이면 단합하다가, 의견이 다른 사람을 괴롭히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