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마야나 - 라마 왕자의 모험과 사랑 이야기 어린이와 고전 2
김남일 지음, 사히브딘.마노하르 그림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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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떤 인연.


실천문학사라는 출판주체가 있다. 굳이 출판사라고 지칭하고 싶지 않은 안타까움이 앞서서 이리 부르기로 한다. 1986년 황색예수전이라는 연작시집을 냈었다.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막혀있던 그 시절에 이렇게 뜨거운 시집을 구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 시기, 시에 취하지 않으면, 술에 취하지 않으면, 자신의 분노에 취하지 않으면 비겁한 욕망에 취하지 않으면 도저히 살아낼 수 없는 그런 시기였다고 기억한다. 누렇게 바래버린 황색예수전을 버리지도 주지도 못한 채 끌어안고 산 시간이 벌써 30년이다.

 

 


그 후 다양한 책들을 읽었고 좋구나~하는 책들 중 실천문학사의 것들이 제법 되었었다. 내게 나름 신뢰해도 좋을 출판사였던 곳이 지난 3월 내홍을 겪었다.

적자의 문제와 실천문학사 본질의 문제가 충돌한 것으로 보인다. 밖에서 얼핏 보는 것이 얼마나 오해와 편견을 끌어들이는 짓인지 잘 알기에 그저 "올바른" "실천 문학"이기를 바라며  응원이랄것도 없는 응원과 격려를 보탰다.


그 소용돌이 속에 있었던 김남일 선생의 라마야나. 그래서 더 반가웠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주저앉지는 않는구나.

더 이상 사람 같지도 않아서, 어쩜 악마일지도 모를 존재들과 버둥버둥 살아가려다 보니..어쩌면 우리 편이 되어줄 막강한 존재 하나쯤 떠올려 보게 되는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삽화가 너무 이쁜 책을 편다.



#2. 라마야나. 사람으로 태어난 비슈누


라마야나는 인도의 신화이자 대서사이다. 마하바라따와 함께..마하바라따를 오래 전 읽었었다. 인도의 신화에 딱히 관심이 있어서라기 보다, 일리아드 오딧세이, 길가메시, 바가바드 기타, 티벳 사자의 서..등을 읽어내릴 때였다. 뜬금없이 신화와 신비주의에 사로잡혀 있을 때..젊은 어느 시절엔 누구나 그럴거라고 우겨보자. 오쇼 라즈니쉬에 심취 한 적 있죠? 라고 ..

장중한 대 서사를 쉽지만 섬세하게 그려냈다.

일곱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서사지만 이 책에서는 일곱번째 장을 생략했다고 했다. 저자가 마지막에 써 놓은 '라마야나에 대하여'를 읽어보면 마지막 이야기를 알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일곱개를 다 본 셈이다.

머리가 열개인 악의 화신 라바나에게 잡혀가 버린 아름다운 아내 시타를 찾기 위한 라마왕자의 고군분투가 그려진 이야기다. 짐작하듯 너그럽고 세상 모든 것이 나서서 도와주는 이야기. 그리고 최후에 아내를 구하고 악을 벌하게 된다는 이야기.

이단순하게 누구라도 딱딱 짚어낼 이 이야기는 인도사람들이 -비단 인도 뿐 아니라 힌두교가 뿌리내린 모든 곳- 가장 좋아하는 신화라고 했다. 드라마로도 만들어지고, 뮤지컬,연극..등으로 만들어졌다고..시청률이 90%를 넘나들었다고 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가 어떻게 만들어지든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신기했다.

지역마다 조금씩 이야기의 틀이 바뀌기는 했다지만 ..그래도.

도대체 그 이유가 뭘까를 생각 해 본다. 악의 화신 라바나는 설산에서의 고행으로 신의 은총을 받게 된다. 신은 그에게 선물을 주기로 하고 라바나는 "신과 악마 누구와 싸워도 이길 수 있는 힘"을 요구했다. 신의 약속은 지켜져야만 했다.

그런 능력을 받은 라바나는 곧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만다. 하지만 신이든 악마든 그를 이길 수는 없었다. 그를 대적할 수 있는 것은 '인간'뿐이었다.


신이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는 건 기독교에서도 보여진다.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온 신의 아들. 모든 죄를 자신이 짊어지고 대신 죽는 사랑과 용서.

그런 이야기는 죄책감을 갖게 했다. 내 죄를 위해 대신 죽은 누군가라니..내가 어떻게 살든 이미 짓고 만 원죄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 그렇게 신 앞에 빚을 진 마음으로 고개를 숙이게 하는것은 불편했다. 감사하지 못하는 나는 나쁜 인간인지도 모른다.

라마는 악마를 제압하기 위해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온다. 나약한 인간이 아닌 신도 악마도 어쩌지 못하는 악의 화신을 제압하려고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포악한 것과 맞설 수 있는 가장 약한 존재. 여기에 그 매력이 있지 않을까?

반지의 제왕에서도 악의 화신 나즈굴을 제압했던 건 그 어떤 용사도 전사도 아닌 공주였지 않은가.

가장 인간다운 신, 어쩌면 인간의 삶에 복무하는 신의 모습이 거기 있었다. 모두가 서로를 위한 한 곁을 내어줄 준비를 하고 있는 삼라만상들, 모든 것이 신이고 모든 것이 의미가 있는 이야기는 손오공이 나오는 서유기와도 닮았다.


결국 시타를 되찾지만 라마는 시타에게 말한다.

"고생이 많았소. 우리가 이겼소. 당신 또한 자유로운 몸으로 해방되었소. 이제 당신은 갈 길을 가시오." (p138)

라고 한다.상심한 시타는 장작에 불을 붙이게 하고 망설임없이 불 속으로 뛰어든다. 그러나 불의 신은 시타를 구해내고 라마에게 되돌려 놓는다.

그제야 라마는 시타를 반긴다.


어떤 상황일까? 라마는 시타를 되찾기 위해 많은 희생을 치러야만 했다.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생명이 없었다. 다만, "크샤트리아로서 사랑에 눈이 멀어 수많은 생명쯤 아무것도 아닌 양 희생시켜 가며"(p142) 시타를 구했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또한 그렇게 하므로써 희생된 모든 생명에게 위로를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정치적이지 않은가? 대의를 위해 명분을 위해 사소한 것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천박한 정치가 아닌, 함께 하나의 목표를 향해 스스로 징검다리가 되어 눕는 자발적 희생과 강력한 지도력. 그것으로 획득되는 시타(평화, 혹은 빼앗겼던 것). 힘은 어디에서 나오며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대한 쉬운 해법같기도 하다. 물론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오류로 점철된 망한 정치를 다양하게 목격했던 우리들 아니겠는가.


결국 사람이어야 했다. 피조물이거나 지배받는 대상이 아닌 다르마의 중심을 관통하는 주체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3. 신화.


가끔 현실이 답답할 때 신화를 읽기도 한다. 흔하디 흔한 그리스 로마 신화로부터 북유럽신화, 아프리카 신화, 중동신화, 동아시아신화...

세련된 귀족풍의 신들도 있고, 무슨 신이 이래? 싶은 지극히 인간적인 신의 이야기도 있다. 우리도 단군신화로부터 수많은 전설들을 가지고 있다.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더는 버틸 힘이 없을 때, 그곳에 강력하게 나타나 줄 어떤 힘을 기대할 때 간절히 신화를 읽고 싶어진다.

한낱 미물인 곰의 소생이 된다고 해도, 흙수저도 아닌 동굴 속에서 맨 손으로 마늘을 까먹었을 짐승의 후예라 해도 상관없다.

피폐해진 가슴 한켠을 위로 받고 싶을 때, 덧없다고 미뤄두었던 희망을 다시 품어보고 싶을 때, 나는 신화를 읽는다.


어떤 역경이 있어도, 자신의 것을 (시타) 되찾아 올 라마 왕자와 권력의 유혹 앞에서도 다르마를 거스르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착한 사람(동생과 원숭이와 곰과 독수리와..)들이 순한 마음으로 나누는 이야기는 조금씩 다른 가사로 불리울지라도 결국 하나의 노래일 것이다.

사람의 노래.

신화는...사람의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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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맥(漂麥) 2016-04-22 0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연이겠지요. 저 낡은 <황색예수>를 5시간도 안되어 두번이나 대하다니... 괜히 오싹!!!

나타샤 2016-04-22 09:56   좋아요 0 | URL
신기하네요^^ 잘 보이지 않는 책인데..좋은 일이 있으시려나봐요..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