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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시장
김성중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2월
평점 :
1. 환상의 접경
어릴 때부터 나는 환상적인 이야기들, 즉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좋아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라는
의문과 그럴 수도 있지 않아? 라는 가능성의 접경에 놓이는 걸 좋아했다는 것이 더 올바른 말일것이다. 동화를 읽으며, 선과 악의 대결구도 -
착한 이는 늘 당하고 똑똑하고 야무진 악한의 멋진 묘수들이 전개되는 -는 늘 흥미로웠다. 어떻게 이런생각을 할까?라는 감탄을 품곤했다.
선한 공주가 이기는 것 따위는 재미가 없었다. 왕비가 쓰는 계책과 계략이 얼마나
흥미로운지..
초등학교 저학년때, 백설공주를 읽고 느낀점을 말해보라고 했다. "행복하게 오래오래 산 백설공주는
얼마나 지루했을까요?"라는 감상을 발표하고 반성문을 썼다.
조금 더 자라서 플랜더스의 개를 읽고 "네로가 더 고생하지 않아 다행이에요. 아로아는 참 무능한
친구예요. "라고 했다가 또 반성문을 썼다.
이런 나를 엄마는 걱정하기는 커녕 깔깔 웃으시며 '너 같은 애도 있어야지, 다 감동하면
재미없잖아?'라고 하셨다. 아마 엄마가 만들어 놓은 조금은 삐딱한 시선일지도 모를일이다.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의견과 문제제기..
그 때부터 나는 더욱 환상적인 이야기에 매료되었는지도 모를일이다.
꿈을 꾸듯, 현실적으로 증명 불가능하지만, 증명이 불가능한 것이지 존재가 불가능한 것은 아닌
이야기들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표제작 국경시장으로 시작하는 기묘한 이야기는
쿠문, 관념 잼, 에바와 아그네스, 동족, 필멸, 나무 힘줄 피아노, 한 방울의 죄, 이렇게 여덟개의 꿈으로 펼쳐지기
시작한다.
다양한 배경과 플롯으로 나오게 되는 꿈꾸는 소설들, 그 속에 "국경시장"은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
환상일 것을 이미 알고 읽기 시작하지만, 어느 순간 그 거리를 걷고 있는 '나'와 마주하게 된다.
마치 영화 '트론'처럼 '매트릭스'처럼..
현실이 아니야. 아니라고 장담할 수는 없어. 현실 가능할지도 몰라. 이런일이 없으란 법은 없지.
그래 그런 날이 올 수도 있어. 그렇다면 어떤 기억을 팔아야해? 어떤 기억을 팔 수 있어? 팔아도 좋을 기억이란게 있긴 있어?
끝없이 자신에게 묻고 대답을 하며 보름달이 뜬 시장통을 서성이게 된다.
달빛에 빛나는 비늘, 모든 것을 팔아치우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면 행복할 수 있을것 같지만, 그
두려움과 안타까움을 과연 감당할 수 있겠는가.
너무나 현실적이지 않아서 현실적이었던 접경.
하필이면 국경시장이었던 이유가 아마 여기 있지 않을까?
현실과 환상의 접점. 어느 쪽으로도 발을 내딛을 수 없으나 어느 쪽으로든 내딛어야 하는 그 접경에
놓인 사람들의 이야기인 까닭에 말이다.
#2. 그린 것인지, 적은
것인지...
비현실적인 이야기는 때때로 구체적이지 않은 경우들도 종종 있다. 작가의 의도일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안개 속에 있는 것 마냥 뿌옇게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
김성중의 글이 갖는 매력은 너무나도 구체적이라는 것이다. 모 유머사이트에 올라왔던 어떤 그림의
제목처럼 말이다.
"그림을 그리랬더니 사진을 찍었어"..
너무 구체적인 묘사는 때로 지루하다. 김성중의 힘은 바로 여기서 발휘된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적절한 묘사..독자가 궁금해할 만한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팽팽함.
딱 필요한 것들이 구체적으로 보여지며 나머지의 것들은 저절로 페이드 아웃되는 작법. 이런 작법이
있는지 사실 모르겠다.
모든 작품들을 보며 너무도 생생하게 보여지는 대상과 반대로 거기 있지만 그 존재를 감지하지 못하는
어떤 힘들의 작용을 느꼈다면 예민했던 걸까?
망원경을 통해 보듯, 내가 보아야 할것은 선명하게 보여지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있어도 느껴지지
않으나 없는 것은 아닌..그런 묘한 존재감들이 글 속에 가득하다.
얼핏 얼핏 들어 본 이름의 작가이지만, 그리 눈여겨 보지 않았던 작가이기도 하다.
리뷰를 적으면서도 김상중(연예인;;) 김성종(추리문학가)..자꾸만 오타를 남발해댄다.
허구라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소설이라는 매개를 통해 감동하고 공감하며 위로를 얻기도,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기도 한다.
그것이 진짜일리 없다고, 혹여 진짜라고 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고 그렇게 긍정적인 방점을
찍어놓는다.
책장을 덮는 순간 느껴지는 작가의 필력과 등장인물들의 숨고르기를 공유하며 "그래..그랬구나"라고
마무리를 짓기도 한다.
김성중의 글을 읽으며, 자꾸만 오싹했다. 이것이 허구이며 환상이란걸 알면서도 말이다. 진짜로
일어날 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도 아니라는 걸 알면서..
그런 생각을 갖을 수 있다는 자체가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런 생각을 한 번 쯤은 해
보았던 것에 대한 기시감이 불러온 두려움일지도 모른다.
내 생각을 들켜버린 것 같은..
허무맹랑할 수도 있는 이야기가 반짝이는 돌이 되어 만월 아래 빛난다.
# 3.
그래서
나는 오늘 그동안 미루었던 조립피규어를 한세트 사기로 했다.
피규어를 조립하고 색칠을 하며 꿈꾸었던 그 순간을 다시 느껴보고 싶어진 것이다.
이 행복한 시간을 사기 위한 비늘을 준비하자면..어디쯤의 기억을 파는게 좋을까? 잠시
고민해본다.
그리고..
이 책을 친한 이에게 권하고
싶은가?
내 대답은 "아니"다.
비밀은 서로가 타인이기에 나누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서로에게 타인이기 때문에 비밀을 나누는 것이 가능했다. p14)
이 국경시장의 지도를 공유하는 건..어쩌면
위험한 일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