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이름으로
이인휘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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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SNS 페이지를 넘기다 텀블벅 후원 게시물을 읽었다. 지난달에 농성 200일이 되었던 파인텍 노동자들의 고공농성에 마음으로 지지 응원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편지를 쓸 편지지와 몇가지의 리워드가 있었으나 꼼꼼히 리워드를 살피지는 않았다. 대신 사진으로 보도로 이어지는 그들의 눈물겨운 투쟁을 꼼꼼히 읽었다. 이미 여러경로를 통해 알고는 있지만 먹고사니즘에 치인, 과거의 열정만이 빛바랜 사진처럼 남은 사람에게 그들의 모습을 읽고 응원 연대하는 것은 저들과 나를 위해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더 놓을 것이 없지만 더 놓아서는 안되는 그 마지막의 외침이 거기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꾸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1990년쯤 현대중공업에선 골리앗 크레인에 올라갔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한진중공업싸움에서 85호 크레인. 그리고 그 후로도 이어진 수많은 고공농성들..최초의 고공투쟁이라 일컬어지는  강주룡의 투쟁. 무려 1930년대 평양고무공장 파업을 주도했던 그 이.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현실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건 절박해서다. 내가 여기 있다고, 우리가 여기 있다고 알리고 싶은거다.

아슬아슬한 곳, 비도 바람도 추위도 더위도 막을 수 없는 곳으로 올라가는 건, 목숨을 걸었다는 것이다. 가난하거나 부자이거나 공평하게 주어진 하나. 목숨. 그것을 걸고 싸운다는 것.

 

소설은 그렇게 시작된다. 고공투쟁을 하고 있는 젊은 청년. 청년의 어머니, 그리고 한때는 불꽃같은 싸움의 한가운데에 서 있던 그의 아버지..

 

2. 울산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의 투쟁의 역사이며 기록이다. 노조의 설립과 와해, 공권력과 지역 깡패들까지 끌어들인 폭력적 진압과 이간질. 생존을 담보로 한 위협과 피눈물을 흘리며 돌아설 수 밖에 없었던 회한이 있다.

절대 깨질 것 같지 않은 노동자들의 대오. 죽어도 배신하지 않을 것 같은 그들의 연대. 하지만 가진것 몸뚱이 밖에 없었던 사람들은 여지없이 깨지고 내동댕이쳐졌다. 그래도 다시. '살기' 위해서, 나와 내 가족과 나의 동지들이 살기 위해서 뭉치고 목숨을 건 사람들의 이야기. 결국 제 몸에 불을 놓아 피눈물로 심장에 새겨진 '양봉수 열사'의 이야기가 있다.

긴 이야기다. 긴 이야기지만 우리가 꼭 들어야 할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특정한 사람들의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느 노동조합에선 비정규직을 받지 않는다고 했고, 어느 노동조합의 파업엔 '귀족 노조' 주제에 뭐가 아쉬워 파업을 하느냐는 비아냥이 따라붙기도 했다.

노동운동에 희망이 있냐고도 했다. 이제 식상하다고도 했다. 맨날 같은 싸움을 습관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냐고도 했다. 폭력적인 싸움이 지겹다고도 했다.

희망이 없어서 싸우는거다. 이제 식상할만큼 누구나 알고 있는 노동자들의 권리는 아직도 보장되지 않는다. 회사의 이익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도 습관적으로 노동자들에겐 아무것도 돌아가지 않는다. 언론으로 구사대로 프락치로 다양하게 와해공작을 하는 회사의 자본과 인맥과 권력과의 유착 속에 두 주먹 두 다리 밖에 없는 사람들이 발버둥 치는 것이 폭력이라면 생계를 위협하는 자들을 살인자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뭔가 되묻고 싶어진다.

 

소설은 긴 고해성사처럼 읽힌다. 과오까지 뼈아프게 고백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은 있다고 이야기 한다.

노동자라는 귀한 이름이 오해되고 천시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

 

3. 리뷰를 적는 중에 속보를 읽는다.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가 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2009년 해고 이후 30번째 희생자라고..

생활고를 이기지 못했다고 한다.

노동자는 현장에 있어야 한다. 현장의 주인은 노동자여야 한다.

그곳에서 일하겠다고, 사람답게 일하겠다고, 정당하게 일하겠다는 요구가 무리한건가.

 

마지막 페이지까지 숨 죽이고 읽었다.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너의 이야기이거나 나의 이야기래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을, 너의 표정과 나의 표정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작품이라기보다 긴 보고서이자 고백이다.

아직도 끌어안아야 할 거리의 사람들, 현장에서 밀려난 사람들,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하고, 서로의 몸을 묶어 저항해야하고, 일상을 포기하고 거리로 나오는 사람들을 모르는 사람들이라 할 수 없다.

사회는 자본으로 버텨지는게 아니라 진심으로 자신의 현장에 뿌리 내린 노동자들의 땀과 눈물로 버텨지는거다.

공돌이 공순이라고 불리며 착취당하면서도  '산업역군'이라는 이름으로 버텼던 과거의 노동자들이 딛고 선 전태일의 이름.

울산 현대의 싸움 속에 놓아진 양봉수의 이름. 우리는 이 뜨거운 이름들을 징검돌처럼  딛고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부끄럽게도 말이다.

 

4. '노동자' 라는 이름은 어쩌면 아버지에서 아들로 대물림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종의 특성을 품은 DNA로 새겨지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책을 읽으며 잘 웃지도 잘 울지도 않는다. 무서운 꿈을 꾸면 '어, 꿈이잖아'라고 생각하며 피식 하듯이 '책이잖아 울긴' 하고 넘기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으며 몇번인가 훌쩍거렸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쳤던 사람이 있다.

초등학교때부터 노조를 배우고 대의원역할극을 하고 모의 노조를 만든다는 외국의 이야기가 있다.

노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어떻게 노조가 없을 수 있냐고 반문하는 타국의 지인도 있었다.

노동자들이 제대로 평가되지 않고 그들의 삶이 보장되지 않는 나라는 망국 (亡國)의 길로 접어든 것일지도 모른다.

경쟁력을 잃고 국내 경제도 피폐해진 국가. 그것을 다시 단단히 세울 힘은 어디서 오는가.

자본에게서? 권력에게서? 외국의 강대국에서?

나라를 바로 세우는 힘은, 건강한 척추 노동자에게서 나온다.

그러니 " 망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작은 국토 구석구석에서 외치는 함성들이여 단결하여 연대하라.

노동자의 이름으로!

 

5. 매우 두껍고 긴 소설이다.

눈알이 빡빡해지고 설풋 따갑기도 했지만 쉬이 놓아지지 않았다.

내 삶의 얼마만큼은 저들에게 빚지고 있다는 생각때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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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18-06-27 19: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하기에 빚진 마음이 늘 있네요. 꼭 읽어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