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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과 탄광
진 필립스 지음, 조혜연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한 작가가 글쓰기를 중단했다. 무심했던 스스로를 자책함과 동시에 후배 작가들이 좀더 나은 환경에서 작품활동을 하기를 바라면서. 망연자실했다. 고작 한 출판사의 횡포 때문에 좋은 작가를 잃게 되다니 믿을 수 없었다. 고작이라고 하기에는 그 이면에 겹겹이 싸여 있는 고루하지만 견고한 권력이 자리잡고 있음도 알고 있다. 모른 척하고 지내기엔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이 수면 위로 올라와버렸다. 마침 읽고 있던 소설 『우물과 탄광』에 이 사건이 자꾸만 겹쳐졌다. 한 가족의 일상에 파문을 던진 사건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은 흘러간다는 잔잔한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 같았던 『우물과 탄광』은 이때부터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읽혔다.
무어 가족의 둘째인 테스는 어느날 밤 가장 좋아하는 뒤테라스의 우물에 낯선 여자가 갓난아기를 던져넣는 장면을 목격한다. 이 사건은 평화로웠던 한 가족의 삶에 박힌 작은 가시처럼 시시때때로 가족을 괴롭히지만 일상은 평소처럼 유지된다. 아버지 앨버트는 열심히 탄광에서 일하고, 어머니 리타는 집안일을 빈틈없이 해낸다. 세 아이들도 각자의 위치에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불쑥불쑥 고개를 드는 '우물에 아기를 버린 여자'에 대한 호기심은 결국 버지와 테스를 범인에게로 이끌지만 결론은 그리 극적이지 않다.
자극적인 사건 때문에 이 소설을 미스터리로 기대한 사람들은 분명 실망하리라. 우물에 누가 왜 아기를 버렸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무어 씨네 다섯 가족의 인생이다. 우물 사건은 가족의 일상을 파괴하기는커녕 크게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 같다. 사건 직후 테스의 밤이 악몽으로 일그러지긴 했지만 어느덧 악몽은 사그라들고 사건은 일상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다섯 가족은 끊임없이 범인을 궁금해하지만 궁금증을 풀기 위해 자신을 내던지지는 않는다. 1930년대 탄광마을 카본힐에서 살아가는 백인 가족의 생활은 그렇게 여유롭지 않았다. 책을 읽던 나도 범인보다는 다섯 가족을 통해 그려지는 탄광 노동자들의 노동권 문제와 인종차별, 가난과 여성의 권리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이 생겼다.
드디어 1928년에 주정부에서 죄수노동력임대제도를 폐지했다.
(중략)
노예와 다름없이 부려지는 그 죄수들이 딱히 큰 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었다. 곡식 한 자루를 훔쳤거나 만취해 집에 가는 길에 조금 시끄럽게 군 정도였다. 고작 그런 이유로 지하에 끌려가 등에 채찍을 맞으며 일하게 된 것이다. 다른 백인 인부들의 처지도 다를 바 없었지만 적어도 채찍을 맞진 않았다. - 78~79쪽
나는 얼굴을 붉히지 않았다. 모두가 빤히 쳐다보는 진열품이 된 것 같아 기분이 나빴을 뿐이다. 남자아이들이나 어른들과 있을 때면 그들이 내 코앞에 자라도 들이대는 것 같아 너무 싫었다. 그렇게 측정당하는 일이 싫었다. - 95쪽
앨버트는 차별과 혐오를 싫어한다. 그에게 '선함이란 손으로 잡을 수 있을 만큼 아주 구체적인 것(159쪽)'이기 때문이다. 그는 백인이고 감독관이면서도 함께 일하는 흑인들을 혐오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가족들이 흑인을 함부로 대하는 것도 용서하지 않는다.
"사람을 혐오하는 말은 하는 게 아니야." 턱이 떨릴 정도로 거칠게 잭을 흔들며 아빠가 말했다. "하느님은 그런 말을 용서하지 않으실 거야." - 155쪽~156쪽
특히 그는 우물에 아기를 버린 여자에 대해서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는 흑인 노동자 조나와 교육도 많이 받고 부유하지만 사건에 대해 별다른 견해를 내놓지 못하는 처형 빌을 보면서 사람의 깊이란 피부색 같은 요소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굳어진다. 버지와 테스가 우물에 아기를 버린 범인으로 예상한 롤라는 가정폭력의 피해자였고, 커서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럼에도 롤라는 최선을 다해 열 명의 아이를 키우고 자존심을 지키며 살고 있다. 가난 때문에 아기를 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버지와 테스는 롤라를 만난 후 생각이 달라진다. 우물 사건은 이런 식으로 무어 가족이 편견을 깨고 새로운 생각에 눈을 뜨는 계기로써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인간이란 언제나 자신이 사는 세상 밖을 상상하는 데 한계를 보이기 마련이다. 조나를 저녁식사에 초대하려고 한 앨버트는 조나의 거절에 당황한다. 자신이 괜찮기 때문에 조나의 입장이 어떨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조나가 모두 같은 식탁에 앉아야 하는 저녁식사 대신 테라스에서 서서도 마실 수 있는 커피 한 잔이라는 타협안을 제시하고서야 둘 사이의 실랑이가 끝난다. 이 일로 앨버트는 언제나 선하고 공정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자신이 사실은 안전한 범위 안에서만 행동해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늘 실제로 상대방을 어떻게 대하는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흑인이든 백인이든 점박이든 누구에게나 공정하고 친절하려고 노력했다.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법이나 다른 규율에 대해선 신경쓰지 않았다. 법이나 규율은 울타리를 치고 선을 규정하는데, 왜 그런 선 긋기가 중요한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대부분의 경우에 그 선 안으로 떨어졌다. 결국 그 선 안에서 올바르게 행동하는 셈이었다. - 221쪽
그러면 앨버트의 행동은 아무 의미 없는 것일까? 조나를 깜둥이라며 멀리 하는 게 차라리 나았을까? 아니면 인종 차별을 타파하기 위해 사람을 모으고 깃발을 들고 목소리를 높여야 했던 것일까? 앨버트처럼 인종에 관계없이 그의 능력과 의견을 존중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도 세상을 바꾸는 데 분명 도움이 되지 않을까?
다시 처음에 한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형체가 없는 거대한 권력 아래에서 파생된 한 출판사의 갑질을 멈추기 위해 독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비슷한 사건들이 터질 때마다 무력감을 느낀다. 출판사는 뒤늦게 변화하겠다는 답변을 내놓았지만 정말 변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고, 아마 펜을 놓은 작가가 돌아오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권력의 벽을 부수기 위해서는 많은 투사가 필요하지만 투사가 되는 일은 어렵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시도들을 소용없다며 하지 않는 것은 더 바보 같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식사를 못 할 거면 커피 한 잔도 필요없다는 자세로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소소하지만 작은 움직임들도 모여서 큰 물결이 되고 용감한 투사들의 뒤에서 보호막이 되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일상을 지키면서도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을 포기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