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에 왜 왔니 5 - 완결
이윤희 지음 / 애니북스 / 201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최근 '연애의 방식'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페미니즘이 본격적으로 일상에 스며들면서 정형화된 사랑 표현법들이 일방적인 인내와 희생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로맨스를 주제로 한 창작물을 보는 것이 전보다 더 힘들어졌다. 그래서 처음 『우리집에 왜 왔니』를 추천받았을 때도 심드렁했다. 연애 만화는 예전부터도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 작품을 보면서 세상은 분명 변하고 있고, 창작물 속 연애의 모습도 진일보했음을 깨달았다.

아홉살 때 아버지를 따라 중국 항주에 한달간 머물게 된 재희는 그곳에서 호텔집 아들 버들이를 만난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즐거웠던 추억을 간직한 채 한국으로 돌아온 재희는 생존 최적형 어른으로 성장한다. 스물여덟살이 된 재희는 어느날 아버지로부터 버들이가 자신의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통보를 받는다. 재희는 지저분하고 촌스러운 버들이(연이)의 첫인상에 실망과 당황을 감추지 못하지만 결국 그를 집에 머물게 하고, 한국말을 잘 하지 못하는 연이와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재희는 매사 갈등을 빚는다.



'쟤랑 얘기하면 피곤해. 묘하게 대화의 초점도 어긋나는 느낌이고... 혹시 이런 게 문화 차이인 걸까.
...나쁜 의도가 있어서 저런 식으로 말하는 게 아닌 건 알지만 그래도 열받는 건 어쩔 수 없는 걸.' - 1권 149쪽
가진 거라곤 당당함 하나뿐인 여자가 다 가졌으나 사랑받은 경험이 없는 남자를 만나 연애하는 (주로 일본) 만화가 지겹도록 나오던 시절 로맨스 만화에 질렸다. 다행히도 우리나라 순정만화 작가들은 일찌감치 다양한 방식의 러브스토리를 시도했다. 『우리집에 왜 왔니』는  그 완성형에 가깝다. 21세기 한국의 현실을 주재료로 판타지를 적절하게 양념한 수작이다. 사사건건 성희롱과 빈정거림을 일삼는 백과장, 젊은 여자가 택시나 타고 출근한다고 핀잔하는 택시기사, 칭찬이라고 생각해서 초면에 '미인이다'라는 인사부터 던지는 경태 같은 사람을 우리는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여성혐오가 생활화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재희의 모습은 지금을 살아가는 젊은 여성의 모습이기도 하다. 특히 예쁜 외모 덕분에 편하게 살았을 거라는 오해를 받는 재희 같은 여성들의 고충이 연이의 말을 통해 잘 드러난다.

"경태의 말을 듣고 나니, 실제로 너는 겉모습이 무척 예쁘니까 오히려 사람들에게 칭찬이라는 이유로 쉽게 평가당하는 일이 많을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나는 겪어보지 못했고 생각해본 적 없는 부분이라..." - 2권 41쪽



『우리집에 왜 왔니』가 묘사하는 현실에서 직장생활이 빠질 수 없다. 상사의 부당한 업무지시와 성희롱, 집까지 일을 끌고 들어와야 하는 현실에 분개하면서도 참을 수밖에 없는 재희의 모습은 곧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미래가 없는 계약직 생활을 버티고 있는 은경도 마찬가지다. 유지원 과장은 유니콘 같은 존재지만 유사모처럼 마음 맞는 사람들 덕분에 힘든 시간을 견딘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매 장면마다 공감하며 봤다. 그에 반해 연이의 한국 생활은 너무 무난하게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연이가 단단한 멘탈로 평화로운 일상을 지탱하고 있었기에 재희는 그에게서 안식을 얻을 수 있었고, 재희가 아득바득 살아가면서도 요령있게 중심을 지키려고 노력했기에 연이가 좋은 쪽으로 변화할 수 있었다. 재희가 대표하는 현실과 연이가 대표하는 판타지가 적당하게 혼합되어 있는 것이 만화로서 『우리집에 왜 왔니』가 가진 미덕이다.  

로맨스 묘사는 백점 만점에 백점이다. 남자의 박력으로 포장되는 폭력, 끈기있는 구애로 포장되는 스토킹, 여성의 선택권을 차단하는 가스라이팅, 현실감 없는 삼각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재희가 민망할 정도로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하고 애정행위에 동의를 구하는 연이의 모습은 기습키스나 포옹, 공개고백보다 훨씬 마음을 설레게 한다. 이 지점에서 연이가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이라는 설정은 적절하다. 연이는 한국어가 서툰 만큼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제대로 전달했는지 항상 확인받고 설명한다. 재희는 조금씩 방향이 어긋나는 연이의 말에 짜증을 내면서도 그의 말을 바로잡아주고 이해하려 한다. 말이 잘 통하지 않아서 더 섬세하게 소통할 수 있는 아이러니. 돌려 말하고, 어림짐작하고, 알아주려니 기대하고, 그렇지 않아서 실망하기를 반복하는 연애가 과연 바람직한지 우리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나는 너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번처럼 네게 힘든 일이 생기면 또 이유를 묻고 싶어질 거야. 내 멋대로 네가 내게 의지해주고 마음을 나눠줬으면 하고 바라게 될 거야.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다시 너와 함께 지낼 수 있겠어?" - 4권 235~236쪽

'역시 나는 그앨 좋아하나봐. 좋아하니까... 그애가 귀여워 보이고 웃으면 설레고 찾아와주면 기쁘고 네 앞에서 자꾸 눈물이 나고 네가 나를... 특별하게 생각했으면 좋겠고... 그래. 집에 가면 말하자. 문을 열자마자 말하자. 나도 너를 좋아한다고.' - 5권 108~111쪽

연애가 주제지만 두 주인공이 각자 충실하게 자신의 삶을 구축하는 모습을 표현함으로써 역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애틋하고 소중한 존재인지 깊게 느끼게 한다. 재희의 친구 정인과 연이의 형 류준, 그밖의 조연들에게 확실한 캐릭터를 부여해 작품의 세계를 풍성하고 입체적으로 만들어 현실감을 높여주기도 한다. 『우리집에 왜 왔니』는 아주 오랜만에 만난, 몇번을 읽어도 새롭고 설레는 좋은 만화다. '오랫동안 행복하게'라는 말은 동화 속에나 나오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재희와 연이만큼은 정말 그렇게 살아갈 것 같다. 둘의 영원한 빌어본다. Happily ever af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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