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신학 입문
칼 바르트 지음, 신준호 옮김 / 복있는사람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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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개신교 신학 입문 -칼바르트 
개신교 신학 입문 거창한 칼바르트의 신학자 입문 강의를 추려놓은 책이다. 아무튼 이책은 경고의 메시지와 토닥임의 메시지가 혼재하고 있다. 처음에 이책에서 이야기 하는 가장 주된 내용은 계시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먼저 하는것 같았다. 그것이 칼바르트의 가장 큰 핵심이니까. 칼바르트는 말씀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말씀이란, 기독교 내부에서 주어진 말씀이라고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인데 그것이 우리의 신앙과 합일이 되어서 주어지는 말씀이라고 이야기 한다. 또 증인들에 대해서 이야기 하자면, 선지자, 사도로 대표되어지는 사람들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보존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수 시켜주신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한 공동체 얘기를 들자면 공동체는 우리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책들을 완성시키며 전승시키는데 가장 큰 일조를 하게 된 중요한 일을 한사람들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맨 마지막에 한 챕터 마지막에 나오는데 성령이다. 이 모든 말씀이 계시가 보존되어서 나오는데 가장 중요한것은 성령이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조명해 주시지 않으면 제대로 된 성경 해석과 전승이 되지 않았고 증인들도 말씀에 대해서 쓰지 못했다는 사실이 나오게 된다.

신학적실존에 대해서 논하자면 놀람은 가장 우리가 기적을 보면서 우리실존이 놀라는 상황에 처하면서 신학자들이 처하는 상황에 대해서 제시해주고 있다. 당황은 그 신학자들이 놀람을 당하는 상황에서 주어지는 일을 설명해 주다가 나오는게 당황이다. 당황을 함으로써 인해서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 대해서 강렬한 마주침에 직면하게 되는것을 설명하였다. 의무는 인간에게 주어지는 도덕적인 의무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태도, 등등에 대한 우리의 의무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고 있다. 여기서 맨마지막 챕터가 가장 중요하다고 했던가? 믿음에 대해서 설명을 하게 되는데 우리는 여기에서 믿음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믿음은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지만, 인간이 노력으로 얻어지는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계시의 설명이 도입되어 믿음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러나 믿음과 성령의 계시를 너무 집중한 나머지 인간이 할수 있는 노력에 대해서는 간과해버리는 경우가 부지기수인게 칼바르트의 맹점이라고 보여진다.

신학의 위기 에서는 고독이 나오는데, 고독은 인간이 신학자가 되면서 처하는 가장 근본적인 경우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있다. 신학자들은 대다수의 인기있는 직업과는 다르게 고독과 싸워야만 하는 직업임을 부인할수가 없다. 또한 의심에 대해서 나오는데, 의심은 우리 신학자들이 가져야 하는 가장 큰 페널티이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에 대해서 논하지만 인간인 신학자는 항상 의심을 해야 하며 하나님께 대적하는 행위를 해야 하는 숙명적인 상황에 처한 사람들인것이다. 시험에 대해서 논하자면, 시험은 인간이 가지는 많은 것들을 의심하면서 가지는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이 신학자들에게는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사실 나는 이 면에서 가장 힘들었다. 신학자가 되려 했던 나의 희망이 어쩌면 엄청나게 힘든일을 자초하는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희망을 제시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자는 희망을 제시하는 사람이다. 신학자들이 개신교신학을 함으로써 희망을 제시하는 일을 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의 희망이 되는 약간 몰트만의 사상이 섞인 이야기를 한다.

신학적 작업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기도에 대해서 설명해야 한다. 기도는 우리가 신학을 하면서도 꾸준히 이어나가야 하는 것이다. 기도가 병행되지 않는 신학은 허공을 맴도는 헛소리를 하는 것에 비유될수 있다. 연구를 하는 것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연구를 하면서 여러 제반의 신학에 대해서 철저한 연구를 통해 알아내야 하는 것들이 신학자들의 작업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책에서는 여러 신학들의 연구 방법에 대해서 써놓고 있다. 봉사는 우리가 이 일을 하고 신학자들의 일을 해나감에 있어서 봉사의 정신을 가지고 해야 하는 것이다. 봉사란,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자들이 가져야 하는 근본적인 정신이고 우리가 해야할 당위성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 사랑에 대해서 맨마지막에 설명을 하는데, 그럴듯 하다. 사랑은 우리 인간이 가져야 할 가장 근본적인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두가지 종류가 나오는데 에로스 아가페이다. 조건적이고 타자 중심적 사랑이 에로스이고 무조건적이고 타자중심지향이 아닌 사랑이 아가페이다. 우리는 신학을 하면서 에로스적인 것을 하려하지만, 아가페적인 신학을 하려고 애를 써야 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개신교신학입문을 요약했다. 비판하려고 하자면 너무나 신학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숙명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들에 대해서 비관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나라고 생각이 든다. 신학의 위기에서 너무 괴로웠다. 의심이라는 것을 숙명적으로 하는 것은 인간에게 기적과 지혜가 상반되게 존재 하지 않는 삶을 사는 숙명적인 인간의 허무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인간은 발버둥 치되 하나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채 침묵하며 아무런 응답이 없는 묵상만이 존재하는 비극적인 운명을 우리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하나님은 침묵으로 답하시고 아무런 말이 없다. 우리는 신학을 하며 허공에 메아리 치듯이 하나님을 외쳐대지만 아무런 하나님의 응답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큰 비극이다. 사실 이책에서 중심적으로 이야기 하려던 이야기는 우리가 계시 중심적인 사고를 가지면서 신학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게 주된 요지 였던 것 같다. 그러나 나도 한수환 교수님과 동감하는것은 너무나 계시 위주의 사고를 하다보면 우리는 신비주의에 빠지게 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칼바르트의 경고는 맞는 말이다. 우리가 신학을 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야지 인간이 주체가 되어 하나님을 대신하는 함정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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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수업 - 나를 넘어 나를 만나다
박찬국 지음 / 21세기북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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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수업

작가
박찬국
출판
21세기북스
발매
2014.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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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수업 니체입문서격인 책이다. 박찬국이 쓴 니체 입문서이다. 사실 디오니소스적 긍정 다음으로 이책을 읽어보는데 니체 사유를 잘 설명하고 아주 쉽게 설명한 책이라 재미 있었다. 그냥 1시간 30분만에 읽었다. 재미지다. 처음부터 이책은 초인에 대해서 설명하는 게 아니라, 고통을 긍정하는 근본적인 사상을 설명해주고 있다. 그야말로 거창한 영원회귀 사상이다. 니체가 하는 사유실험인데,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이 영원히 반복 된다고 한다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다음 생에도 반복된다고 한다면 어떻게 할것인가? 라는 질문에 우리는 당연히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우리의 삶을 아주 알차게 보내야 되겠다고 허무하게 아무런 일이 없게 보내어선 안된다고 이야기 해야 할것이다. 이 영원회귀의 영겁의 시간에 대답은 바로 긍정이다. 이 힘에로의 의지를 긍정하게 되는 삶을 살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우리의 힘에로의 의지 이고 이 힘에로의 의지의 충만은 바로 고통이나 여러 삶의 나쁜 요소들을 긍정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삶을 긍정하는 것이다. 또 다른 내용은 그리스도교적 이야기를 하면서 전개를 하는데 기독교의 예수의 얘기를 자주 한다. 예수님은 데카당하다고 이야기를 자주 하는데, 너무 순진무구하며 예수가 하려던 얘기는 현재 존재하는 삶을 긍정하며 행복하게 내세의 행복을 누리며 살려고 이야기 하려고 하는데, 바울이 화음을 들고 나와 천국과 지옥이라는 이분법으로 대중을 위한 플라톤을 들고 왔다고 이야기 한다. 절반은 거짓말이고 절반은 진실이다. 니체가 오해하는 면이 없지 않아 있는데, 바울은 그렇게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 뒀으면 좋겠다. 또 니체의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데, 예술에서 인간의 생이 드러나고 그 생이 긍정할수 있는 근원이라고 이야기 한다. 예술은 참으로 비극의 탄생에서 이야기 한것처럼 긍정하기 위해서 애를 쓴다고 이야기 하고 싶다. 니체는 삶을 통해서 자신이 어떻게 힘에로의 의지가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인지 증명하며 살았다고 이야기 하는것이 박찬국의 이야기이다. 과연 그런것인지나는 의문이 간다. 니체의 삶은 아시다시피, 고통의 연속이었다. 몸이 허약했고 자신이 생각했던 자신의 사상을 전파 하기 위해서 미치기까지 한 사람이다. 자신의 삶이 피폐해질때까지 자신의 고통에 대한 답은 예스이고 긍정이었다. 그 삶에 대한 긍정이 옳바르게 나와 자신의 삶에 전해지던 것이 바로 힘에로의 의지의 긍정이다. 근데 질문하고 싶은것이 그게 왜 힘에로의 의지의 긍정인지 모르겠다. 난 힘에로의 의지가 그게 아니라고 배웠는데, 힘에로의 의지는 여러사람과의 상호관계에서 나오는 알력관계에서 자신의 의지가 생기는 것이 아니었던가? 자신의 삶에서 자신만 고통스럽고 자기 자신만이 아픈데 이게 왜 자신의 삶에서 힘에로의 의지가 충만하고 고통을 긍정했다고 해서 자신의 삶이 좋아졌다는 것인가? 그게 의문이다. 


 아무튼 위 내용은 책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한 것이다. 그러나 비판해야 할것은 비판해야 되겠다.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부인하는 이야기를 하고 또한 그것이 플라톤의 이원론적인 이야기라고 이야기 하는것이 이 책의 핵심인데, 신학하는 입장으로서 그건 데카당이다. 또한 회개하고 자신의 삶을 긍정하지 않고 예수께로 돌아와 예수님께 자신의 삶을 바치는 것이 이것이 병든 생각이라고 이야기 하는 니체에게도 너도 데카당이다. 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인간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이야기 했다 싶이 죄를 지으면 자신의 생이 무너지는 존재인것이다. 생철학을 하는 놈이 그것도 모르고 죄를 짓는 거나 자신을 파괴하지 않고 악을 긍정하는 것이 뭔지 구분조차 못하고 바울을 까니 미친다고 생각이 든다. 악을 긍정하고 악에게 빠지는 것 그것이 바로 죄악을 짓는 바로 근원적인 데카당이다. 자신이 무력해지는 것을 데카당이라고 하는데, 바울이 이야기 하려고 했던것을 자신이 화음인양 받아들이는것이 문제인것이다. 니체는 그시대에 팽배해있던 자유주의 신학에 물들어 있었고, 또 헤겔의 신은 죽었다라는 말을 패러디 한사람에 불과했다. 니체는 자신이 악과 죄라는 인간의 근원적 실체에 잘 몰랐다. 그리고 인간이 금욕적으로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 기독교인이 그 불가능한 것을 자신이 억제하면서 참고 했다는 것이 참으로 웃긴 발상이다. 그것은 신의 능력으로 인간에게 주어지는 축복으로 가능한 이야기이다. 자신이 신의 윤리에 들어가서 살게 해주는 축복을 누리는 것은 바로 성령안에서의 예수그리스도의 축복인것이다. 이것은 인간성을 말살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요즘 개독 목사 양반들은 이걸모르고 타락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사탄에게 넘어간것이고, 예수안에서 사는 삶은 자신의 인간성을 말살시키는것이 아니라 재2의 새생명이 일어나는 새로운 탄생임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다. 그게 니체고 요즘 사람들인것이다. 그리고 니체에 대한 오해 한가지 니체는 무신론자 였던가? 아니다. 디오니소스라는 신과 다른신을 짬뽕시켜논 다신론자일뿐이다. 다른 신을 불러오는 일을 했지만 그것은 다시말해 악마를 불러오는일을 했고, 그또한 계시의 뜻안에서의 이성이 작동을 했던 것이다. 하나님 뜻 안에서 자신은 그저 꼭두각시처럼 그리스도교의 근원적 잘못을 비판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요즘 니체에 대해서 진짜 더럽게 찬양하면서 개거품을 늘어 뜨리는 종자들이 가끔가다 눈에 띄는데, 참으로 불쌍한 인생이다라고 이야기 하고 싶다. 진리가 없으면 그 진리가 없고 모든것이 진리인 그 삶에서 뭘 찾고 중심이 뭐가 있는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개념과 신념을 다 버리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남는 그 인생이 과연 진짜 생인가라고 물어보고 싶다. 그 인생에서 자신은 자신의 신념이 없다고 착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미 자신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나오는 니체 도덕을 설파하는 니체 도덕교사가 된것 그 이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신이 잘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니체는 자신의 철학마저 도덕화 된다는 것을 예측한 사람이다. 니체가 이야기 한 초인과 위버멘쉬는 자신의 철학마저도 절대시 하지 않고 파괴하는 사람이 바로 디오니소스적 긍정을 하는 바로 그 사람이 된것이다. 니체는 대단한 사람인가? 과연 그런가? 그의 인생을 통틀어서 힘에로의 의지라는 주저를 완성시키지 못함으로써 인해서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조금 발전시키고 마는 쇼펜하우어보다 못한 놈으로 그려진다. 쇼펜하우어는 전영역에 걸쳐 자신의 철학이 어떤지 이야기라도 하고 죽었지만, 니체는 자신의 철학이 이야기 하려고 하는 것을 억지 부리려다가 죽은 불쌍한 놈이다. 아무튼 재미있는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다. 나도 니힐리즘에 자주 빠지는데, 그때마다 긍정이라는 귀중한 사유를 나도 쓰기는 쓴다. 모든것의 정지를 꿈꿔온 나로서는 이런 긍정이 중요한 나의 삶의 토대임을 부인 할수가 없다. 


 나또한 이 니체 철학에 겔겔 대며 쓰러진 놈중에 한명이고 좋아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를 극복하지 않는다면 니체를 좋아하는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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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 그린비 인물시리즈 he-story 9
박찬국 지음 / 그린비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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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

작가
박찬국
출판
그린비
발매
2013.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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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를 설명하는 글을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 박찬국이 썻다. 하이데거는 아무래도 존재와 시간을 설명하지 않고 넘어가서는 안된다. 이 책은 존재와 시간을 이해하기에 가장 쉬운 방법인 예시를 사용해서 이해하게 만들었다. 사실 책에 있는 내용을 다 이해하려면 몇년의 시간을 지내야 하는데 그 시간을 워프 시키려면 이책을 읽으면 좋을것 같다. 박찬국이 쓴 가장 간단한 방법은 이반일리치의 죽음이라는 톨스토의의 죽음에 대한 역작으로 존재와 시간에 대해서 설명한다. 현존재라는 것이 사실, 이렇게 설명하면 끝이 난다. 가장 짧게 하면 이렇다. 염려라는 양태를 경험 하므로 인해서 자신의 섬뜩함이 드러나는 존재를 경험해나가는 상태에 거기에 존재하는 것이 바로 현존재이다. 이 현존재를 다르게 설명하면 죽음이라는 존재를 선취하려는 다른 사람의 죽음을 보고 경험하는자가 뒤에서 다른사람의 죽음을 먼저 경험 해서 섬뜩함에 도달하는 것이 바로 이 존재와 시간에서 설명하는 것이 끝이다. 이것을 이반일리치의 죽음에 빗대어서 설명하는 것이 로 이 박찬국이란 서울대 교수가 쓴것이다. 박찬국 교수의 책은 매우 이해하기 편하며 재미있는 글을 쓴다. 현존재는 아무래도 이런 양태이기도 하다. 우리가 언어를 배우면서 엄청난 시간을 들여서 하는데, 발전속도가 어느정도인지 모르다가 갑자기 존재의 문이 열리는 상황에 직면하는 것이다. 그것이 현존재를 경험하는 하나의 양태이다. 진리도 그렇다. 우리가 존재물음을 지속하고 있는 경우에 갑자기 진리가 열려 우리에게 다가 오는 것이다. 이것을 중세철학에서는 신이 그 존재의 문을 열어준다고 이야기 하는데, 나또한 그렇게 주장하려고 하는 중이다. 사실 모든 진리의 문은 신의 계시의 뜻안에서 움직인다라고 이야기 하려는 것이 나의 의도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처음에서 하이데거의 생애에 대해서 나오기 시작한다. 하이데거의 생애 화려하기 그지 없다. 이사람의 생애는 점점 대단해져가는 모습이 놀랍다. 그러다가 꼴아박은 사건이 하나가 있는데, 나치에 가담해서 나치당원이 되는 것이다. 그때 그 일만 하지 않았다면 하이데거는 참으로 옳바른 사람이 될수도 있었다. 그러나 참으로 아쉽게도 박찬국이라는 사람도 이 책에서 하이데거를 변론하기 시작하는데, 약간 꼴사나웠다. 자신이 전공하는 실존철학 대가를 그렇게 비판할수는 없는 것인가? 라는 질문이 생겼다. 나치라면 당연히 비판 받아야 하는 것이 당연한데, 박찬국이라는 사람은 자신이 전공했다는 이유만으로 옹호를 한다. 어떻게 옹호하냐면, 하이데거는 나치를 바꾸려고 들어간 하나의 어쩔수 없는 선택을 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그래봐야 나는 나치 당원이라고 여겨진다. 그래봐야 나치이고 나치일을 전면에 내거는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그것이 오명이든 뭐든 간에 말이다. 그래서 반성한다는 이유로 후기 철학을 이야기 하는데 존재와 무에 대해서 하다가 진리, 그리고 언어에 이르기까지 여러면에서 자신의 철학을 전개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의 철학은 아무래도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존재였음을 인정하는 것이었나, 혹은 자기가 헛소리처럼 어려운 이야기만 늘어 뜨리지 않았나라고 이야기 해야 하는가 라고 자문해야 하는가, 자신이 쓴 이 어렵고도 난해한것은 아무도 이해한사람이 없다고 자신이 이야기 하기에 이르렀다. 사실인듯 하기도 하면서 오만한 생각이기도 하다. 존재와 시간. 진짜 개어렵다. 토나온다. 그러나 연구하는 사람이 어느정도는 이해했다고 생각은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건 책이 아니라 그냥 쓰레기 헛소리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생애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난 진리얘기를 해보고 싶다. 서두에 이야기 했다 싶이 진리는 과연 인간 스스로가 얻어질수 있는 것인가라고 물어 보고 싶다. 과연 인간 스스로 회의하므로 인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진리에 다다를수 있는 것인가? 사실 그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 했던 사람은 하이데거가 아니라 솔로몬이라는 현자였다. 솔로몬은 인간이 하나님께 경외하므로 인해서 자신이 진리에 다다를수 있다고 했고, 그것은 진리의 문이 열리는 그 시점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경외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렇다면 인간의 기술로 발전된 법칙의 발전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그또한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하지는 않았지만, 인간의 이성이라는 틀 안에서 하나님이 계시의 뜻을 약간 흘려 보낸것을 인간이 쓴것에 불과한 인간의 이성의 발로라고 이야기 하고 싶다. 우리는 인간의 이성을 긍정하기도 부정하기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인간 이성을 부정하기 위해서 쓴글이 바로 하이데거의 글이다. 기술이라는 껍질로 인해서 존재라는 것이 망각이 되어서 자신의 유리한 면만 발전 시키는 것이 현대 문명이고 그렇다. 그러나 그 문명을 제대로 직시한 사람은 하이데거다. 그 문명 안에 사는 사람이기도 한 나치 당원인 사람도 하이데거이다. 진리는 그렇게 인간의 이성의 작동으로 그렇게 자유롭게 나오는것이 아니다. 진리가 오는 길은 바로 언어이고 언어라는 것도 다시 생각 해 보아야 하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이것은 하이데거가 말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럴까라고 이야기 해보고 싶다. 물론 당연히 언어라는것이 존재의 집이라고 이야기 해야 맞다. 그러나 나는 다르게 이야기 하고 싶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 아니라. 말씀이 이세상의 근원이라고 이야기 하고 싶다. 그리스도교적 근원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또한 거기에서 진리라는 것이 나오게 되는것이다. 이것을 둘러서 이야기 한것이 하이데거라고 여겨진다. 그러면서 후기 철학을 전개하는 것이 하이데거인데, 자신이 했던 망조 섞인 행동들을 반성하면서 나오게 된것이 이 철학이라고 생각 들어진다. 무에대한 사유를 했지만 그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신의 근본적인 것이 담겨 있는 것이 바로 시라는 상징 언어에서 비롯된다는 이야기를 한것이 바로 하이데거이다. 우리는 시가 흥왕했던 시기를 사랑해야 한다. 지금은 시라는 것이 죽은 시기이다. 시적 언어로 이야기 하는것의 함축성은 인간의 근원적인 삶을 농축할수 있는 언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삶을 긍정하기는 어렵지만, 이면에서는 긍정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삶을 존재에 의거한 삶을 살고 싶어 했고 그 존재라는 집에 거하는 철학을 이야기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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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25 07: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전한 기독교 (양장) 믿음의 글들 185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이종태 외 옮김 / 홍성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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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순전한 기독교 C.s루이스의 역작 나는 이책이 좀 과대평가 받아졌다고 느껴졌다. 그다지 큰 감동을 느낄수가 없었다. 단지 이책의 효용성은 변증서 그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변증서라기 보다는 받아들이기 매우 힘든 삼위 일체 부분도 나오기 때문에, 사실 변증가 입장에서는 참 어려울듯 싶다. 사실 삼위일체는 이해하려면 이해한다는게 거짓이겠지만, 성령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고 성경에 대한 이해가 많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책에서는 삼위일체를 소개한다. 성령의 의지를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마지막에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 설명이 없었으면 니체가 말한 도덕 교사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교도덕을 설명하려는 변증가의 입장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각설하고 순전한 기독교의 구성은 아주 재미 있게 되어 있다. 신존재 증명을 하려는듯한 모습을 보여주다가 그냥 내비치기만 하고 끝을 내버린다. 재미있는것이 사실 도덕론적 논증은 칸트가 했기 때문에 그 논증을 다시 반복하는 수준에서 끝이 난다. 그러나 아주 쉬운 이야기로 설명했기에 이 책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해 이책은 칸트의 얘기만 반복했다면 그것으로 그다지 의미가 없는 이야기 일수밖에 없다. 또 칸트빠 같은 느낌을 많이 받은 부분은 이 부분만이 아니다. 칸트가 이야기했던 도덕에 대해서 주구장창 이야기 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런 윤리는 단연 산상수훈에서 완성된 그리스도교도덕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그것에 대한 설명을 듣기 위해서 온것이 아니다. 단지 순전한 기독교 기독교의 모습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단상을 나누어 보려고 나왔다. 신학이라는 것이 도덕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 설명을 해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설파한 도덕에 대해서만 설파 한다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닌 윤리만 가득한 종교라는 껍데기가 씌어진것이다. 이런 얘기를 들을게 뻔하니, 마지막에 삼위일체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삼위일체에 대한 이야기에서 성령에 의지하여 성령이 이끄시는데로 사람이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이책은 그야말로 도덕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전개 해나가는 최악의 책이 되었을것이다. 순전한 기독교라기 보다는 순전한 도덕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 편할듯 싶다. 


순전한 기독교 많은 신학교 교수들이 읽어보라고 해서 읽었다. 매우 어렵다고 생각이 들어서 그냥 안읽고 있다가 읽어보았는데, 재미는 있었다. 아무튼 여러가지 비판할것들이 많이 떠오르는 것이 많기는 하지만, 이책을 읽으라고 이야기를 하는 교수들은 다들 어떤 생각으로 읽으라고 했는지가 매우 의심스러웠다. 우리의 사랑에 대한 담론들 믿음에 대한담론들 용서라는 담론들 그 모든것이 우리의 의지로 될수 없다는 것을 여기에서도 설명하지만, 이런 설명가지고는 부족하다. 그냥 우리는 그런 능력이 없는 전적 부패가 된 존재라는 인식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어쩌면 아무런 능력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힘주셔서 구분할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게다. 각설하고 이책을 추천한 교수들은 아무래도 기독교철학 변증학의 교수들이 이야기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깊이 들어가면 사실 기독교 교리에 대한 설명을 아주 유려하게 한 것 그이상은 아니다. 사실 깊이 들어가는 신학적 입장을 들여다 본다면 바울 신학이나 복음서 신학을 들어가는게 오히려 신학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더 유리하고 좋은 입장이다. 사실 이책에 대한 내용을 이미 알고 있는 신학생들 입장에서는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사실 말이 유려했을 뿐이지 알고 있던 내용들을 다시 기독교를 믿지 않던 사람들에게 설명해주는 책임에 틀림이 없다. 우리에 대한 변증적 요소가 가득한 책임은 분명하다 기독교 교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사람이거나, 기독교에 대해서 믿고 싶지만 잘 안되는 사람에게 추천해줄 책이지 이책은 신학을 전공한 사람이 많이 읽어야 할 책이 아니다. 신학을 전공해서 많은 분석을 하고 싶다면, cs루이스의 책보다는 다른 신학자들의 책을 읽어보고 비교분석 판단하는게 맞을 듯 싶다. 사실 이책도 신학과 교수가 추천해주긴 했지만, 변증가의 입장이라는것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책임을 부인 할수가 없다. 신학교 교수도 이책을 다 이해했을까 싶지만 그냥 난 별로였다. 끝부분에서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아주 잘 설명했던 것 이외에는 그다지 눈에 띄게 좋은면을 발견할수가 없었다. 내눈이 썩었을까? 그게 아니었음 좋겠지만, 아무튼 이책을 읽으라고 추천하고 싶은 사람들은 신학생도이나 교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 예수님 믿기 바로 이전에 학적인 지식이 많은 사람들, 무신론자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비추하고 싶은 사람들은 이미 바울 신학이나 조직신학의 맛을 본사람들은 비추하고 싶다. 물론 이책을 가지고 온누리 교회 담임목사도 많이 인용하면서 좋은 말을 해주긴 하지만, 그건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나도 어떤면에서는 극적인 것을 발견하지만, 성경이외의 것들을 그다지 추앙하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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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성령님
손기철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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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성령님 이책은 손기철 장로님의 책이다. 손기철장로님의 은사를 얻는 과정과 또한 자신의 사역에 대한 책이다. 손기철 장로님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아주 상세히 나와있다. 손기철 장로님은 학자다. 자신이 유학시절 스승에게 버려져 아주 피폐하게 생활했다는 것을 이야기 했다. 유학시절 교회에 나가서 자신이 하나님이 없다는것을 증명하겠다며 나간다음에 1년이라는 기간의 유예기간동안에 하나님께 사로잡혀서 살아가게 되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 무엇보다 자신의 내적 치유를 받아서 하나님께 자신이 쓰임 받는 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성령님께 은사를 어떻게 받는지에 대해서 방법론도 나온다. 이책을 읽고 방언을 받았다는 사람도 있다. 책에서 나오는 내용을 그대로 읽어가다보면 하나님이 이사람의 인생에 어떻게 역사하시는지에 대해서 볼수가 있다. 자신은 학적으로 많은 것을 할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창조과학회로 오고 하나님께서 세워 나가시는 게 어찌 보면 너무나도 아름답다. 이분께 나는 많은 은혜를 입고 있다. 이또한 다 하나님의 역사임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치유집회에 가서 많은 일을 겪는다. 하나님께서 나를 연단시키시고 성령 사역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신다. 앞으로 있을 사역과 신학은 성령중심의 사역과 신학이 전개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 모든 신학 중심에는 성령과 신학이 결합되어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 그러나 손기철 장로님은 신학을 전문적으로 배운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분이 학적인 지식이 부족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지적으로도 매우 훌륭하다. 그러나 그 사람이 기존의 질서 내에서 배우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일을 하는 평신도 사역자라는 것이다. 나도 아무래도 평신도 사역자가 될것이다. 또 평신도 사역자이면서 신학자가 되고 싶다. 이사람이 매우 본보기가 되어 나에게 감명을 깊게 한다. 단지 바라는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것을 가지고 타락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는 것이다. 버려지지 않았으면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버리지 않으실것이다.

 

 고맙습니다 성령님의 책은 성령에 대한 지식을 점진적으로 보여준다. 많은부분에서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까지 하시면서 연단하시나 하겠지만, 납득이 가지 않을정도로 훈련시키고 하나님의 사역자로 세워 나가신다. 그 중심에 손기철 장로님과 같은 분이 있다. 하나님께서 부러워 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냥 부럽다. 그의 학적인 인생의 성공이 부럽고 그의 하나님께 세워 나가시는 도중에 하나님의 역사가 너무 부럽다. 나는 아직 새끼 병아리와 같이 낮고 약하지만 하나님께 쓰임받는 이분의 역사와 일이 너무나도 귀중하고 나에게 본이 된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세워 나가시는데 많은 시험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지만 그것을 통과해나가며 하나님께서 전하실 말씀을 발전시켜나가신다. 우리는 아직도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한단계 한단계 발전시켜 나가신다.  그분의 성품과 모든것이 아주 축복된 삶을 누리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분의 사역이 하나님께서는 아주 귀중하게 사용하시는것을 보고 정말 감사하다. 더욱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께 충실하게 쓰여져 하나님의 사역을 잘 감당해 나갔으면 좋겠다. 이런 사역자들이 경계해야 할것이 자신이 하나님보다 높임을 받고 있으면 그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보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일에 익숙하지 않아서 자신이 받는 칭찬에 약할수가 있다. 나쁜 생각보다는 좋은 눈으로 바라 보아야 한다.

 

 또 이 책을 읽거나 손기철 장로님의 사역을 비판하거나 사단의 일이라고 치부하는 사람들에게 경고하고 싶다. 그것은 바로 성령모독죄이다. 씻을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님께서 하시는 사역을 방해하거나 훼방하는것은 성령훼방죄이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사역을 바알세불이라고 이야기 하는 사단의 종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씻지 못하는 죄를 지었다. 이것은 씻음 받을수 없는 죄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해주실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죄를 용서하는것은 성령님께서 해주신다. 그것을 방해하는것은 성령님께 용서 받을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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