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를 설명하는 글을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 박찬국이 썻다. 하이데거는 아무래도 존재와 시간을 설명하지 않고 넘어가서는 안된다. 이 책은 존재와 시간을 이해하기에 가장 쉬운 방법인 예시를 사용해서 이해하게 만들었다. 사실 책에 있는 내용을 다 이해하려면 몇년의 시간을 지내야 하는데 그 시간을 워프 시키려면 이책을 읽으면 좋을것 같다. 박찬국이 쓴 가장 간단한 방법은 이반일리치의 죽음이라는 톨스토의의 죽음에 대한 역작으로 존재와 시간에 대해서 설명한다. 현존재라는 것이 사실, 이렇게 설명하면 끝이 난다. 가장 짧게 하면 이렇다. 염려라는 양태를 경험 하므로 인해서 자신의 섬뜩함이 드러나는 존재를 경험해나가는 상태에 거기에 존재하는 것이 바로 현존재이다. 이 현존재를 다르게 설명하면 죽음이라는 존재를 선취하려는 다른 사람의 죽음을 보고 경험하는자가 뒤에서 다른사람의 죽음을 먼저 경험 해서 섬뜩함에 도달하는 것이 바로 이 존재와 시간에서 설명하는 것이 끝이다. 이것을 이반일리치의 죽음에 빗대어서 설명하는 것이 로 이 박찬국이란 서울대 교수가 쓴것이다. 박찬국 교수의 책은 매우 이해하기 편하며 재미있는 글을 쓴다. 현존재는 아무래도 이런 양태이기도 하다. 우리가 언어를 배우면서 엄청난 시간을 들여서 하는데, 발전속도가 어느정도인지 모르다가 갑자기 존재의 문이 열리는 상황에 직면하는 것이다. 그것이 현존재를 경험하는 하나의 양태이다. 진리도 그렇다. 우리가 존재물음을 지속하고 있는 경우에 갑자기 진리가 열려 우리에게 다가 오는 것이다. 이것을 중세철학에서는 신이 그 존재의 문을 열어준다고 이야기 하는데, 나또한 그렇게 주장하려고 하는 중이다. 사실 모든 진리의 문은 신의 계시의 뜻안에서 움직인다라고 이야기 하려는 것이 나의 의도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처음에서 하이데거의 생애에 대해서 나오기 시작한다. 하이데거의 생애 화려하기 그지 없다. 이사람의 생애는 점점 대단해져가는 모습이 놀랍다. 그러다가 꼴아박은 사건이 하나가 있는데, 나치에 가담해서 나치당원이 되는 것이다. 그때 그 일만 하지 않았다면 하이데거는 참으로 옳바른 사람이 될수도 있었다. 그러나 참으로 아쉽게도 박찬국이라는 사람도 이 책에서 하이데거를 변론하기 시작하는데, 약간 꼴사나웠다. 자신이 전공하는 실존철학 대가를 그렇게 비판할수는 없는 것인가? 라는 질문이 생겼다. 나치라면 당연히 비판 받아야 하는 것이 당연한데, 박찬국이라는 사람은 자신이 전공했다는 이유만으로 옹호를 한다. 어떻게 옹호하냐면, 하이데거는 나치를 바꾸려고 들어간 하나의 어쩔수 없는 선택을 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그래봐야 나는 나치 당원이라고 여겨진다. 그래봐야 나치이고 나치일을 전면에 내거는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그것이 오명이든 뭐든 간에 말이다. 그래서 반성한다는 이유로 후기 철학을 이야기 하는데 존재와 무에 대해서 하다가 진리, 그리고 언어에 이르기까지 여러면에서 자신의 철학을 전개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의 철학은 아무래도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존재였음을 인정하는 것이었나, 혹은 자기가 헛소리처럼 어려운 이야기만 늘어 뜨리지 않았나라고 이야기 해야 하는가 라고 자문해야 하는가, 자신이 쓴 이 어렵고도 난해한것은 아무도 이해한사람이 없다고 자신이 이야기 하기에 이르렀다. 사실인듯 하기도 하면서 오만한 생각이기도 하다. 존재와 시간. 진짜 개어렵다. 토나온다. 그러나 연구하는 사람이 어느정도는 이해했다고 생각은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건 책이 아니라 그냥 쓰레기 헛소리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생애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난 진리얘기를 해보고 싶다. 서두에 이야기 했다 싶이 진리는 과연 인간 스스로가 얻어질수 있는 것인가라고 물어 보고 싶다. 과연 인간 스스로 회의하므로 인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진리에 다다를수 있는 것인가? 사실 그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 했던 사람은 하이데거가 아니라 솔로몬이라는 현자였다. 솔로몬은 인간이 하나님께 경외하므로 인해서 자신이 진리에 다다를수 있다고 했고, 그것은 진리의 문이 열리는 그 시점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경외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렇다면 인간의 기술로 발전된 법칙의 발전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그또한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하지는 않았지만, 인간의 이성이라는 틀 안에서 하나님이 계시의 뜻을 약간 흘려 보낸것을 인간이 쓴것에 불과한 인간의 이성의 발로라고 이야기 하고 싶다. 우리는 인간의 이성을 긍정하기도 부정하기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인간 이성을 부정하기 위해서 쓴글이 바로 하이데거의 글이다. 기술이라는 껍질로 인해서 존재라는 것이 망각이 되어서 자신의 유리한 면만 발전 시키는 것이 현대 문명이고 그렇다. 그러나 그 문명을 제대로 직시한 사람은 하이데거다. 그 문명 안에 사는 사람이기도 한 나치 당원인 사람도 하이데거이다. 진리는 그렇게 인간의 이성의 작동으로 그렇게 자유롭게 나오는것이 아니다. 진리가 오는 길은 바로 언어이고 언어라는 것도 다시 생각 해 보아야 하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이것은 하이데거가 말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럴까라고 이야기 해보고 싶다. 물론 당연히 언어라는것이 존재의 집이라고 이야기 해야 맞다. 그러나 나는 다르게 이야기 하고 싶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 아니라. 말씀이 이세상의 근원이라고 이야기 하고 싶다. 그리스도교적 근원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또한 거기에서 진리라는 것이 나오게 되는것이다. 이것을 둘러서 이야기 한것이 하이데거라고 여겨진다. 그러면서 후기 철학을 전개하는 것이 하이데거인데, 자신이 했던 망조 섞인 행동들을 반성하면서 나오게 된것이 이 철학이라고 생각 들어진다. 무에대한 사유를 했지만 그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신의 근본적인 것이 담겨 있는 것이 바로 시라는 상징 언어에서 비롯된다는 이야기를 한것이 바로 하이데거이다. 우리는 시가 흥왕했던 시기를 사랑해야 한다. 지금은 시라는 것이 죽은 시기이다. 시적 언어로 이야기 하는것의 함축성은 인간의 근원적인 삶을 농축할수 있는 언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삶을 긍정하기는 어렵지만, 이면에서는 긍정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삶을 존재에 의거한 삶을 살고 싶어 했고 그 존재라는 집에 거하는 철학을 이야기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