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이성비판 - 개정2판 대우고전총서 5
임마누엘 칸트 지음, 백종현 옮김 / 아카넷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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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천이성비판은 인간이 가질수 있는 이성에 대해서 논하는 것이지만, 절대선 최고선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고 하는 것 같다. 최고선을 신의 공명정대함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실천이성비판에서 주된 골자는 자유와 신 영혼이다. 이 세가지 이야기를 하기이전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유에 대해서 희구를 하고 있다. 자유란 어떤 것인가? 라고 자유를 말하려고 하지만, 애매한 답밖에 내지 못한다. 자유를 이야기 하려는 주된 이야기는 자유가 있어야만 인간에게 주어진 윤리라는 잣대를 댈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윤리를 설명하다가 자유가 없으면 인간에게 윤리란 있는 것인가라고 자답하면서 논의를 시작한다. 그리고 쾌와 불쾌를 설명하면서 인간에게 주어진 윤리의 근원인 선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인간에게 쾌를 가져다 주면 선이라고 이야기하고 불쾌를 가져다 주면 악이라고 하는 그런 논의를 하는데, 이는 정확히는 그렇지는 않지만 선과 악은 그렇게 나눌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쾌와 불쾌를 설명하며 에피쿠로스 학파에 대한 연구를 한것을 알려준다. 선악이라는 근원적인 윤리의 모티프를 설명하기 위해서 에피쿠로스학파를 연구하게 된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지는 인간의 윤리를 실천 하기 위해서 행복을 생각한다면 에피쿠로스학파지만 이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 덕만을 이야기 한다면 스토아학파에 대해서 설명을 해야 한다. 스토아학파에서는 덕을 이야기 하며 인간의 실천에서 윤리를 이야기 한다. 인간의 실천이성을 생각하면 스토아학파의 덕을 생각하기쉽지만 칸트는 인간의 실천이성을 근원적인 쾌락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 참 독특했다. 순수 사변 이성과 순수 실천 이성과의 구분을 하면서 순수 사변 이성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이야기 한다. 순수 실천 이성은 인간에게 주어진 이성중에 실천과 관련된 이성이다. 다시 말해 실천하면 미덕인 것들에 대한 이성이 순수 실천이성이다. 이둘을 구별할 필요성은 방법론을 개진하기 위해서이다. 이 실천이성을 윤리에만 머무르지 않고 실천하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제시한 내용이 있는데 그것이 실천이성의 방법론에 대해서 나와있다. 그것들 중에 하나는 우리가 실천이성 즉 윤리적인 최고선을 실행한 사례를 배우게 한다는 것이다. 실천이성은 이렇게 행동될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이야기 하고 싶다. 실천이성이나 윤리적인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물론 이런 사례적인 것으로 선악에 대한 분별성을 키우는 것으로는 좋겠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런 존재가 아님을 이야기 하고 싶다. 신앞의 인간으로서 성령에 맡겨야만 진정한 선을 행할수 있다고 보는게 신학적 입장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선을 행할 능력을 상실했다고 표현한 바울의 논구를 보아야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게 될것이다. 순수 실천이성은 일반적으로 표현하기에 윤리라고 한다. 이를 실천하기 위한 방법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이를 위한 자유를 가지고 자유의지를 가진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칸트는 자유의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자유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만, 어떠한 결과가 없는 논의만 하게 되는데, 아포리즘의 영역에 들어서버리고 자신의 무지함을 드러내게 되었다. 자유의지라는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의지를 설명하는데, 그 의지는 쾌와 불쾌와 같이 인과론으로는 설명이 불가한 영역에 대해서 이야기 하게 되는 것이다. 선과 악 그리고 의지 그리고 자유의지 이 모든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원인과 결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이다. 결국은 인간의 우주론논증으로 설명이 돼지 않는 영역인 최고선에 대해서 설명을 하게 되는데, 이 모든 개념에 원인은 신이다라고 결정하게 되는데 이게 내가 읽은 실천이성비판의 이야기이다. 


 최고선에 대한 인간의 선에 대한 갈망은 선을 실천하게 하는 동인이 되기에 틀림 없다고 칸트는 이야기 하지만 인간이 선으로 보이는 것들이 과연 선인가라고 물어보고 싶다. 선악의 구분의 애매함, 의지의 애매함, 자유의지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하지만 아무런 논의가 되어있지 않음 신 존재 증명으로 끝을 매기게 되는 것이 이책이다. 물론 신존재 증명의 끝판왕이라고 보아도 아무런 지장이 없다. 이를 답할 인간은 없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한 신에게 인간에게 자유를 부여한 신에게 인간에게 선악을 준 신에게 어떠한 이야기도 할수 없을것이다. 그의 존재에 경탄하며 인간의 한계에 대해서 인식하는 방법 밖에 없다. 최고선을 알게 된다면 인간은 선을 실천할 능력이 있는가에 대해서 답해보자면 없다고 이야기 하고 싶다. 인간의 선이란 과연 무엇인가? 니체가 말한것처럼 인간의 선이란 도덕을 만들려고 하는 인간의 두려움에 기초한 법의 성립인가? 누군가를 죽이고 나서 죽이지 말라고 이야기 하는 정복자의 두려움에 떨린 것인가? 인간을 죽이지 말라고 하는 것이 선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누구나에게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죽이라고 이야기 한 신은 선하다고 이야기 할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정언명법에 위배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신이었다. 그럼 자기 아들을 죽이라고 이야기 한 신이 신존재 증명을 한 칸트에게 물어보고 싶다. 그가 과연 최고선인가라고 물어보고 싶다. 앞으로 있을 얘기는 신학도입장에서 이야기 하는 것이다. 선은 인간이 구분하거나 할수 있는 능력이 선험적으로 존재 한것이 아니라 절대선이자 최고선이 신의 이야기에 순종하는 것이 최고선이자 절대선이다. 이게 선이다. 그리고 자유는 인간이 얻거나 획득할수 있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는 곧 예수다. 요한복음 1장 17절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것이라. 요한복음 8장 32절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여기서 보듯이 진리는 예수이고 진리가 자유를 주게 되니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예수에게 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신학적 답이 없었기에 칸트가 실천이성과 윤리를 따져가면서 혼란스러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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