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인수업 - 나를 넘어 나를 만나다
박찬국 지음 / 21세기북스 / 201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초인수업

작가
박찬국
출판
21세기북스
발매
2014.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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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수업 니체입문서격인 책이다. 박찬국이 쓴 니체 입문서이다. 사실 디오니소스적 긍정 다음으로 이책을 읽어보는데 니체 사유를 잘 설명하고 아주 쉽게 설명한 책이라 재미 있었다. 그냥 1시간 30분만에 읽었다. 재미지다. 처음부터 이책은 초인에 대해서 설명하는 게 아니라, 고통을 긍정하는 근본적인 사상을 설명해주고 있다. 그야말로 거창한 영원회귀 사상이다. 니체가 하는 사유실험인데,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이 영원히 반복 된다고 한다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다음 생에도 반복된다고 한다면 어떻게 할것인가? 라는 질문에 우리는 당연히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우리의 삶을 아주 알차게 보내야 되겠다고 허무하게 아무런 일이 없게 보내어선 안된다고 이야기 해야 할것이다. 이 영원회귀의 영겁의 시간에 대답은 바로 긍정이다. 이 힘에로의 의지를 긍정하게 되는 삶을 살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우리의 힘에로의 의지 이고 이 힘에로의 의지의 충만은 바로 고통이나 여러 삶의 나쁜 요소들을 긍정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삶을 긍정하는 것이다. 또 다른 내용은 그리스도교적 이야기를 하면서 전개를 하는데 기독교의 예수의 얘기를 자주 한다. 예수님은 데카당하다고 이야기를 자주 하는데, 너무 순진무구하며 예수가 하려던 얘기는 현재 존재하는 삶을 긍정하며 행복하게 내세의 행복을 누리며 살려고 이야기 하려고 하는데, 바울이 화음을 들고 나와 천국과 지옥이라는 이분법으로 대중을 위한 플라톤을 들고 왔다고 이야기 한다. 절반은 거짓말이고 절반은 진실이다. 니체가 오해하는 면이 없지 않아 있는데, 바울은 그렇게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 뒀으면 좋겠다. 또 니체의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데, 예술에서 인간의 생이 드러나고 그 생이 긍정할수 있는 근원이라고 이야기 한다. 예술은 참으로 비극의 탄생에서 이야기 한것처럼 긍정하기 위해서 애를 쓴다고 이야기 하고 싶다. 니체는 삶을 통해서 자신이 어떻게 힘에로의 의지가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인지 증명하며 살았다고 이야기 하는것이 박찬국의 이야기이다. 과연 그런것인지나는 의문이 간다. 니체의 삶은 아시다시피, 고통의 연속이었다. 몸이 허약했고 자신이 생각했던 자신의 사상을 전파 하기 위해서 미치기까지 한 사람이다. 자신의 삶이 피폐해질때까지 자신의 고통에 대한 답은 예스이고 긍정이었다. 그 삶에 대한 긍정이 옳바르게 나와 자신의 삶에 전해지던 것이 바로 힘에로의 의지의 긍정이다. 근데 질문하고 싶은것이 그게 왜 힘에로의 의지의 긍정인지 모르겠다. 난 힘에로의 의지가 그게 아니라고 배웠는데, 힘에로의 의지는 여러사람과의 상호관계에서 나오는 알력관계에서 자신의 의지가 생기는 것이 아니었던가? 자신의 삶에서 자신만 고통스럽고 자기 자신만이 아픈데 이게 왜 자신의 삶에서 힘에로의 의지가 충만하고 고통을 긍정했다고 해서 자신의 삶이 좋아졌다는 것인가? 그게 의문이다. 


 아무튼 위 내용은 책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한 것이다. 그러나 비판해야 할것은 비판해야 되겠다.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부인하는 이야기를 하고 또한 그것이 플라톤의 이원론적인 이야기라고 이야기 하는것이 이 책의 핵심인데, 신학하는 입장으로서 그건 데카당이다. 또한 회개하고 자신의 삶을 긍정하지 않고 예수께로 돌아와 예수님께 자신의 삶을 바치는 것이 이것이 병든 생각이라고 이야기 하는 니체에게도 너도 데카당이다. 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인간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이야기 했다 싶이 죄를 지으면 자신의 생이 무너지는 존재인것이다. 생철학을 하는 놈이 그것도 모르고 죄를 짓는 거나 자신을 파괴하지 않고 악을 긍정하는 것이 뭔지 구분조차 못하고 바울을 까니 미친다고 생각이 든다. 악을 긍정하고 악에게 빠지는 것 그것이 바로 죄악을 짓는 바로 근원적인 데카당이다. 자신이 무력해지는 것을 데카당이라고 하는데, 바울이 이야기 하려고 했던것을 자신이 화음인양 받아들이는것이 문제인것이다. 니체는 그시대에 팽배해있던 자유주의 신학에 물들어 있었고, 또 헤겔의 신은 죽었다라는 말을 패러디 한사람에 불과했다. 니체는 자신이 악과 죄라는 인간의 근원적 실체에 잘 몰랐다. 그리고 인간이 금욕적으로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 기독교인이 그 불가능한 것을 자신이 억제하면서 참고 했다는 것이 참으로 웃긴 발상이다. 그것은 신의 능력으로 인간에게 주어지는 축복으로 가능한 이야기이다. 자신이 신의 윤리에 들어가서 살게 해주는 축복을 누리는 것은 바로 성령안에서의 예수그리스도의 축복인것이다. 이것은 인간성을 말살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요즘 개독 목사 양반들은 이걸모르고 타락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사탄에게 넘어간것이고, 예수안에서 사는 삶은 자신의 인간성을 말살시키는것이 아니라 재2의 새생명이 일어나는 새로운 탄생임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다. 그게 니체고 요즘 사람들인것이다. 그리고 니체에 대한 오해 한가지 니체는 무신론자 였던가? 아니다. 디오니소스라는 신과 다른신을 짬뽕시켜논 다신론자일뿐이다. 다른 신을 불러오는 일을 했지만 그것은 다시말해 악마를 불러오는일을 했고, 그또한 계시의 뜻안에서의 이성이 작동을 했던 것이다. 하나님 뜻 안에서 자신은 그저 꼭두각시처럼 그리스도교의 근원적 잘못을 비판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요즘 니체에 대해서 진짜 더럽게 찬양하면서 개거품을 늘어 뜨리는 종자들이 가끔가다 눈에 띄는데, 참으로 불쌍한 인생이다라고 이야기 하고 싶다. 진리가 없으면 그 진리가 없고 모든것이 진리인 그 삶에서 뭘 찾고 중심이 뭐가 있는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개념과 신념을 다 버리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남는 그 인생이 과연 진짜 생인가라고 물어보고 싶다. 그 인생에서 자신은 자신의 신념이 없다고 착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미 자신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나오는 니체 도덕을 설파하는 니체 도덕교사가 된것 그 이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신이 잘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니체는 자신의 철학마저 도덕화 된다는 것을 예측한 사람이다. 니체가 이야기 한 초인과 위버멘쉬는 자신의 철학마저도 절대시 하지 않고 파괴하는 사람이 바로 디오니소스적 긍정을 하는 바로 그 사람이 된것이다. 니체는 대단한 사람인가? 과연 그런가? 그의 인생을 통틀어서 힘에로의 의지라는 주저를 완성시키지 못함으로써 인해서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조금 발전시키고 마는 쇼펜하우어보다 못한 놈으로 그려진다. 쇼펜하우어는 전영역에 걸쳐 자신의 철학이 어떤지 이야기라도 하고 죽었지만, 니체는 자신의 철학이 이야기 하려고 하는 것을 억지 부리려다가 죽은 불쌍한 놈이다. 아무튼 재미있는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다. 나도 니힐리즘에 자주 빠지는데, 그때마다 긍정이라는 귀중한 사유를 나도 쓰기는 쓴다. 모든것의 정지를 꿈꿔온 나로서는 이런 긍정이 중요한 나의 삶의 토대임을 부인 할수가 없다. 


 나또한 이 니체 철학에 겔겔 대며 쓰러진 놈중에 한명이고 좋아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를 극복하지 않는다면 니체를 좋아하는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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