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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현대인이 가장 문명화된 첨단인류라고 믿어오지만

현대남성의 지.덕.체.에로가 조상들의 것만 못하다고 이야기 하는 도발적인책

저자는 호주의 고고학+고인류학자 (고고학과가 사학과와 함께 있거나 독립되어 존재하기도하는 국내와 달리 고고학이 인류학의 분과내지는- 학문적 Tool로 이용되는 영미권에서는 고고학과 인류학이 세트로 묶여다니는 일이 많다. 고인류학은 고고학을 통해서 발굴된 신석기 이전 인류의 화석정보를 토대로 생활상을 복원하거나 형질적 특성을 분석하는 고고학과 인류학의 융합적 분과- 로 인류학 불모지인 국내에선 매우 흥미로운 내용들을 전하고 있다.


제목이 다소 선정적인데 원제를 그대로 직역하자면 "남성인류학" 정도가 된다.


















일본은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면서 아시아에서 가장 서구와 가깝게 지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사회적 지표가 지극히 전근대적인 면모를 자랑하는 매우 특이한 국가다. 특히 여성권 측면이 우리 비슷한데 일부 지표는 OECD국가 가운데 최하위다. 이런 일본여성의 손으로 쓰여진 여성학적 보고서는 매우 뜻깊다.


















'3년전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 이라는 책으로 한국 서브컬쳐계에 큰 파장을 일으킨 아즈마히로키의 신작. 전작의 파급력을 생각해 봤을 때 이번 책도 일단 주목하고 시작할만한 가치가 있다.















읽어도 읽어도 어렵고 복잡한 마르크스와 자본론에 대한 가장 '힙' 하고도 경쾌한 주해가 아닐런지..















하우스푸어, 고용불안, 교육망국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이문제로부터 자유로운 사람 나와보라고해. 몇이나 되는지. 대한민국 인구 88%가 꼭 읽어보고 남의일이 아니구나하고 공감해봐야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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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 2012-05-06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이번에 파트장이 된 가연입니다. 얼마나 이렇게 댓글을 남기며 확인할 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ㅎㅎ 짧지만 강렬한 추천평, 잘 보았습니다. 확인했습니다.
 
링크 - 21세기를 지배하는 네트워크 과학
알버트 라즐로 바라바시 지음, 강병남 외 옮김 / 동아시아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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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나없이 옆사람과 재잘거리는 커피숍에 가만히 앉아 있다보면 본의 아니게 남의 대화를 듣게 되기도 합니다. 대략 이런식의 대화들 말입니다.

 

" 그러니까 그 XX타워 총설계하고 감독했던 사람이 우리 언니 친구 동생의 남편이었던거야"


예전 같았으면 '아 몹시 유명한 건축가와 가까운 사이구나, 놀라운데' 했겠지만 이 책 '링크'의 출간으로 상황은 크게 달라졌습니다. '언니네 친구 동생의 남편' 은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아님을 다들 알게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서너 단계가 건너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는 사이고 전 세계 60억 인구로 외연을 넓혀봐도 '평균 6사람만 건너면 60억인구는 모두 지인' 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널리 알린 책이 바로 AL바리바시 교수의  링크(Linked : The New Science of Networks) 입니다.


출간당시 혁명적으로 받아들여졌던 링크이론이 발표된지도 어느덧 10년이 넘었습니다. 당시에는 너무나도 놀라워 다들 반신반의 했지만 SNS와 네트워크가 일상사가 되어버린 오늘날엔 마치 '물과공기'처럼 의식하지도 못하고 링크이론 속에서 살아가는 중 입니다.


이게 지금 10억짜리 전화번호부다!


최근 흥행에 성공한 영화 '범죄와의 전쟁' 속의 한 장면 입니다. 경찰의 단속 강화로 불안해 하는 김판호(조진웅분)에게 최익현(최민식분)은 수첩을 하나 꺼내 보이며 호기롭게 소리칩니다. "이게 지금 10억짜리 전화번호부다!" 종친회, 동문회, 향우회 등으로 촘촘히 엮인 그물를 타고 연결된 사람들에게 돈을 뿌려 만든 연줄위를 줄타기하며 살아가는 최익현의 삶은 링크 이론을 가장 충실하게 구현하고 있는 셈 입니다.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 친구의 친구를 타고 슥슥 넘어가다보면 어느새 전혀 생각지도 못하는데 까지 전달되는 네트워크의 위력은 SNS속에서 더욱 확연히 확인됩니다. '일촌' 이라는 개념으로 한국 고유정서를 파고들어 우뚝 선 싸이월드는 이제 이촌, 삼촌, 사촌으로 관계맺기 방식을 확장시켜 놨습니다. 나의 일촌들이 알지만 나는 모르는 이촌, 나의 이촌들은 알지만 내가 모르는 삼촌... 이런식으로 관계를 확장시키면 대략 4촌 이내에서 가입자 천만이 넘는 포탈사이트 회원이 하나의 네트워크로 묶이게 됩니다. '6단계 안에 60억 인구의 대다수가 연결된다" 는 바리바시의 링크이론이 SNS에 적용되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페이스북, 트위터등의 SNS들이 '친구추천' 기능 또한 이런 방식을 적용하고 있고 그 활용도가 높습니다.


이런 네트워크의 마술을 가능한 이유는 일종의 인맥 허브(HUB : 결절지. 평균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을 알고 중개해 줄 수 있는 사람)역할을 하는 사람들의 존재 덕택입니다. 이러한 허브나 커넥터들을 통해 타인과 나 사이는 비약적으로 단축됩니다. 트위터의 경우가 대표적인 경운데 유명 아이돌, 작가, 정치인과 같이 많은 사람들과 '친구맺기' 를 하고 있는 트위터리안들을 중심으로 수많은 이용자들이 마치 감자뿌리처럼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허브들을 중심으로, 혹은 허브들의 중개로 비슷한 성향을 가진 블로그들끼리 어느샌가 클러스터(Cluster: 집적체) 를 형성하게 됩니다.

 

 

 

 


클러스터

 

자 그렇다면 클러스터들은 고립된 섬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는 걸 또 보여주는게 링크이론입니다. 클러스터 내에 커넥터라 할만한 대상이 있다면 전혀 상관 없어 보이는 집단들 사이에도 다리가 놓이게 됩니다. 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상의 사용자들은 각자 자기들의 성향에 따라 일종의 고립된 섬 처럼 보일 수 있지만 선거, 연예인 스캔들, 뉴스속보같은 사건이 터지면 리트윗, 스크랩, 리플을 따라 순식간에 전파되는 모습에서 우리는 이를 다시 한 번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바리바시 박사가 제안한 네트워크의 모식도

 


SNS는 커녕 인터넷이라는 말조차 생소했던 10여년 전에 출간된 책 링크의 내용이 오늘날 우리의 생활속에 착 맞아떨어지는 모습은 전율에 가까울 정도 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네트워크는 힘이 세다는 사실 입니다. 수십 수만, 수억 사이에 형성된 네트워크의 무시무시한 전달속도와 파급력은 물리적 거리를 뛰어 넘게 됩니다. 인터넷의 탄생부터 소련의 핵전쟁에 대비한 미 국방성의 연구에서 시작되었다는 역사가 네트워크의 괴력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중앙집중형이나 탈집중형의 "조직구도" 는 거점이나 수뇌부가 무너지는 순간 붕괴되고 맙니다. 여기에 반해 분산형을 갖춘 거미줄 구도의 네트웍의 생명력은 질기고 파급력은 어마어마한 것이지요.인터넷과 정보통신이라는 21세기의 총아들은 이 네트워크에 날개를 달아준 셈이 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뉴스가 랜선을 타고 RT되고 스크랩 되는 현실을 상기시켜 봅시다. 책 링크속의 이야기는 현재진행형이고 곧 우리가 사는 세상 이야기가 됩니다.

 

 

 

 


 

 네트워크이 세가지 형태 분산이 힘이 세다!

 

 

결과적으로 바리바시 박사는 아마 이런 말이 하고 싶었을 겁니다. 이제는 조직이 아닌 네트워크의 시대입니다. 수직적 구조가 지배하는 관료형 집단이나 기업의 문제점들이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습니다. 사회운동에 있어서도 'XX회 XX지부' 처럼 계단형 구조를 갖춘 조직들의 문제를 이미 여러 사람들이 숱하게 지적해 왔지요. 그 대안으로 제시된 '의로운 개인주의자들의 느슨한 연대' 가 바로 이 링크이론과 맥이 닿아 있습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누구의 명령도 따르지 않아도 네트워크로 연결된 개인들의 힘은 강합니다.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쉽게 뿌리 뽑을 수 없고 함부로 통제할 수 없는 네트워크의 역동성, 폐색된 조직이 갖추지 못한 최대의 강점 입니다.


지금은 바야흐로 조직이 아닌 네트워크의 시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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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동맹과 함께 살기 - 고종석 시평집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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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고종석의 시평집 "신성동맹과 함께살기"는 굉장히 슬픈 책이다. 참여정부 끝머리에 쓰여진 이야기지만 MB정부 마무리 즈음에 다시 읽어도 그렇다. 아니 그래서 슬픔은 더욱 커질 것이다. "불혹을 한참 넘긴 나이에 나는 무엇인가에 홀려있었다."로 시작되는 머릿말을 읽다가 나는 소리죽여 울었다. 고종석의 글을 읽어왔던 이들이라면 쉽게 알아차렸겠지만 그가 나이 40을 넘겨서 홀렸던 그것은, 좁게는 대통령 노무현이었고 크게는 그 주변에서 참여정부를 구성한 486중심의 민주화 운동 세력을 뜻한다. 16대 대선 전까지 [좋아하는 정치인은 노무현과 추미애]라는 자기소개를 책 날개마다 빠뜨리지 않았던 고종석이 이 문장을 게워내면서 달랬을 아픔을 나는 알 것 같다.

 

그 날이 기억난다. 노무현은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소용돌이를 뚫고 대통령 당선자가 됐다. 호남에서는 영남사람인 그에게 기적에 가까운 지지율로 응원을 보냈다. 민노당 지지자들은  훗날을 기약하며 자신들의 후보에게 보내려던 표를 잠시 양보했다. 재벌들에게서 사과박스로 떼어온 선거자금 대신 동전으로 가득찬 돼지저금통이 쌓여갔다. 그렇게 해방이 후 늘 밀리고 핍박받아왔던 '정치적 소수자' 들의 선택을 받은 그는 "민주주의의 적자이자 구시대의 고리를 끊어줄 희망의 증거"가 된 듯했다. 그래서 정말 그 때까지만 해도 많은 이들이 뭔가가 이루어진것 같은 환상속에서 황홀해했다.

 

그러나 노무현의 가장 큰 업적은 대통령이 된 것이라는 불길한 말이 점차 현실이 되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는 새시대의 맏형이 아닌 구시대의 막내와 같은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싸우던 아스팔트위의 변호사는 대통령이되자 공무원 노조 설립을 저지했다. 여전히 노동현장에선 크레인위에 올라가는 사람들이 나왔고 FTA와 이라크 파병이 척척 진행되고 있엇다. 훗날 삼성을 생각하다를 통해 밝혀진 참여정부와 삼성사이의 밀월관계가 시작된 것도 이즈음 이었다. 지지자들이 소망을 담아 마련해준 소중한 시간을 참여정부는 고종석이 '신성동맹'이라고 표현한 "자본을 매개로 한, 반동 정치세력과 반동 언론권력 사이의 강고한 동맹"의 눈에 들기위한 아양과 교태로 허비했다. "지역갈등과 계층간 불화 종식"이라는 미명아래 말이다. 그리고 남은건 여전히 그를 왕좌에 오른 무지렁이 정도로 얕잡아보는 신성동맹의 싸늘한 눈초리와 그에게서 실망을 넘어서 절망한 지지자들의 분노였다. 

 

노무현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면서 임기내내 "건강한 자유주의자"의 시각으로 노무현을 조목조목 비판해온 고종석의 올곧음이 돋보이는 책이다. 내가 변한것이 아니라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이 변한것이라는 말이 진실성을 담고 있을때는 바로 고종석의 입에서 나왔을때 정도이리라. 하지만 더욱 참담한 것은, 바로 그 뒤에 벌어진 일들이다.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는 굳이 이 자리를 빌려 설명하지 않아도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5년전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우리가 느꼈던 것은 허탈함과 실망 그리고 슬픔정도 였다. 지금은 다시 읽고 나면 어떤 기분이들까? 신성동맹은 여전히 강고하며 흔들리지 않고 점차 더 많은 사람들을 자기들 발 아래에 무릎꿇게하고 있다. 2012년 현재 신성동맹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은 결코 낯선 것이 아니다. 늘 우리 주변에 있어왔고 고종석 같은 이가 염려해왔던 일들이다. 시계가 점차 거꾸로 돌고 있다. 노무현 시대의 어둠을 기록한 책이 다시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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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현대문학 가가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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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근래 언론에 대서특필된 집단 따돌림 소식을 접하는 순간 히가시노 게이고(東野圭吾)의 “악의(惡意)”가 떠올랐습니다. 특히 ‘왕따는 당하는 쪽에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더라’ 는 말을 너무도 당연한 듯 입에 올리는 이들이 많아 그랬나 봅니다.


추리소설답게 ‘악의’ 역시 살인 사건으로 시작됩니다. 명망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 구니히코가 살해당합니다. 해외이민을 앞두고 한창 이삿짐을 정리하던 그는 자신의 서재에서 둔기에 맞고 교살당한 변사체로 발견됩니다. 살해당한 작가의 주변에서 소위 강력범죄의 3대동기라는 원한, 치정, 금전 문제의 기색은 보이지도 않습니다. 곤란해하는 경찰이 얼굴 모르는 제3자의 우발적 범행으로 규정할 찰나, 히가시노 게이고 세계의 셜록 홈즈, 가가형사가 등장합니다. 냉철하고 명민한 그는 등장과 동시에 최초의 목격자이며 구니히코의 친구였던 오사무를 집중적으로 물고 늘어집니다. 


마치 선물 포장지를 벗기듯 차례차례 오사무의 알리바이와 자기방어 논리를 무너뜨리는 가가형사. 급기야 100여 페이지도 지나지 않아 가가는 오사무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살해에 이용된 트릭까지 완벽하게 간파해 선언합니다. 독자들은 여전히 두툼하게 남겨진 페이지들을 보며 ‘어라, 뭔가 이상한데? 진범이 나중에 따로 밝혀지는 걸까나?’ 라고 의문을 가질 법 합니다만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구니히코 작가를 살해한 범인은 오사무가 맞고 가가형사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시작과 동시에 범인과 트릭이 모두 밝혀지는 추리소설이 대체 무슨 재미가 있겠냐는 반문이 이어지겠지요. 바로 이 때문에 히가시노 게이고의 악의가 다른 추리소설과 남다른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작가의 말마따나 악의는 애초에 ‘어떻게’ 죽였느냐가 아니라 ‘왜’ 죽였느냐를 밝히기 위해 쓰여진 소설 입니다. 범인이 누구였는지, 피해자를 어떤 방식으로 살해했는지 드러나는 순간 독자들은 더 큰 수수께끼인 ‘그렇다면 도대체 왜 죽였을까?’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범인인 오사무는 중학시절부터 피해자와 구니히코와 같은 반이었던 죽마고우였습니다. 고교진학 이후 연락이 끊겼지만 구니히코가 작가로 등단하며 오사무와 다시 연락이 닿아 재회하게 되었습니다. 교직과 아마추어 작가 생활을 병행하던 오사무는 이미 상업적으로 대성한 구니히코의 도움으로 등단해 전업작가 생활을 시작합니다. 그 뒤로 자주 내왕하며 친밀하게 지냈던 두 사람. 겉보기엔 구니히코에게서 음으로 양으로 도움을 받아온 오사무가 살의를 품을 만한 이유가 전혀 없어 보이기 때문에 살해 동기를 밝히기는 살해 방식을 밝히는 것보다 더한 난제가 됩니다. 갑갑한 독자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극중의 탐정 가가형사는 사실상 수사의 2라운드에 착수하고 속속들이 새로운 사실을 밝혀 나가는데 바로 이 과정이 밀실트릭이나 얼음송곳과는 다른 차원의 놀라움을 선사해 주는 것입니다. 구니히코가 오사무의 작품을 가로챘다는 혐의에서부터 오사무가 구니히코의 전처와 내연관계였다는 것까지 서로 물고물리는 악연을 이어왔던 두 사람. 가가형사의 뒤를 따라 이 두 사람의 과거를 파내려 가다보면 마침내 수 십 년 전인 중학시절에 까지 닿게 됩니다. 그제서야 우리는 전모를 드러내는 거대한 악의 앞에 몸서리치겠지요. 이것이야 말로 히가시노 게이고가 준비한 진정한 반전이 되겠습니다.


트릭과 범인의 정체가 너무나 빤해 악의는 얼핏 시시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초반부는 마치 차 포 떼고 시작하는 장기처럼 느껴질 가능성도 큽니다. 마지막까지 독자들을 쥐락펴락 하며 범인의 뒷모습만 비춰주는 전형적인 서스펜스 문법에 길들여진 독자분들에겐 자칫 허무하게 느껴질 수 있는 생소한 기법의 추리소설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어떻게’ 가 아닌 ‘왜’를 묻고 있기 때문에 악의는 단순한 장르문학 그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흔히들 장르문학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간 때우기에 좋은 유희거리 정도로 취급하거나 오락성이 목적이지 교훈이나 감동은 애초에 염두에 두지 않고 읽는다는 자칭 매니아들 또한 있습니다. 이런 부정적인 선입견들을 종식시켜줄 만한 힘이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악의는 작가의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드러낸 소설입니다. 그렇기에 ‘범인은 왜 그랬을까?’ 에 대한 답을 낼 수 있었던 겁니다. 이 답을 알게 된다면 시중에 넘쳐나는 속칭 ‘반전소설’ 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전율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인간이란 그렇게 아름답지도, 논리적이지도 않고 도덕적인 존재는 더더욱 결코 아니라는 진실을 감당할 준비가 된 분들이라면 지금 당장 악의를 읽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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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데 - 고양이 추리소설
아키프 피린치 지음, 이지영 옮김 / 해문출판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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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 문학 사상 가장 작고 섹시한 탐정의 탄생





추리문학 사상 가장 섹시한 탐정을 꼽으라면 과연 누구일까? 대부분 코난 도일, 모리스 르블랑, 애거사 크리스티가 창조한 3대 탐정 가운데서 답을 찾으려 들 것이다. 그러나 하나하나 살펴보면 영 마뜩찮다. 먼저 홈즈. 골방에 틀어박혀 밤새 화학실험에 몰두하는 오타쿠. 평생 연애한 번 못 해볼 관상이다. 라이벌 뤼팽은 어떤가? 홈즈에게 부족한 그 무언가는 있지만 그게 또 넘쳐서 문제다. 덧붙여 매번 ‘그녀’를 갈아치우는 바람기까지 감안하면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 그렇다면 미스 마플? 연령 제한을 가지고 꼬장꼬장하게 구는 대기업 공채는 아니지만 섹시함을 말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는 연식이시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이 3대 명탐정들은 물론이고 추리문학계 속 그 어떤 탐정도 갖추지 못한 매력을 갖춘 이가 있다. 잘빠진데다 유연하기까지 한 허리, 주먹만 한 얼굴에 정반대로 크고 선명한 눈망울, 그 속엔 눈자위를 꽉 채울 정도로 새까만 눈동자. 이 모든 걸 가진 탐정이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하지만 사실이다. 펠리데(Felidae)의 주인공이자 사상 초유의 고양이 탐정 프란시스는 이 모든 걸 갖추고 있다.


펠리데(Felidae)는 고양이과를 부르는 라틴어 학명이자 이 소설을 관통하는 핵심어다. 사건을 추적하는 주인공뿐만 아니라 피살자, 정보 제공자, 조력자, 범인까지 모두 고양이다. 당연히 범행동기 또한 고양이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주인을 따라 이사 온 집고양이 프란시스는 이사와 동시에 새 집 마당에서 의문의 변사체(물론 고양이의 변사체다)를 발견한다.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이는 이 연쇄 살묘(!)사건은 하루가 멀게 느껴질 정도로 이어지고 범인의 실체를 쫓는 프란시스는 점차 거대한 소용돌이 한 가운데로 빠져들어 간다. 이처럼 고양이에 의한, 고양이를 위한, 고양이의 추리 소설답게 펠리데는 기존의 동일 장르문학과는 전혀 다른 면모들을 보여 준다.




독일내 선풍적인 인기에 힘입어 펠리대는 일찌감치 애니메이션화 되었다



시작과 동시에 프란시스는 냄새 맡고 네 발로 달려 범인을 쫓는다. 기존의 탐정들에게서 볼 수 없던 감각적인 면모다. 프란시스가 수집한 정보를 모으고 추론하는 과정에서 두드러지는 면모 역시 남다르다. 주로 꿈을 통해 일종의 계시처럼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고양이를 키워본 이들이라면 절로 고개를 주억거릴 만한 대목이다. 고양이는 육감이라는 말로 밖에 달리 표현되기 어려울 정도로 눈치가 빠른 생물이다. 고양이를 키워 본 애묘인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리라.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어조와 억양의 변화만 가지고도 귀신같이 주인의 기분을 알아차리고 처신하는 존재들이다. 반대로 고양이를 키운 적 없는 이들이라면 잘 몰랐겠지만 고양이를 비롯한 동물들도 꿈을 꾼다. 잠꼬대를 하면서 먹이를 먹는 시늉을 하거나 허공에 대고 발길질을 하는 고양이들이 방송에 출연한 사례를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꿈꾸며 육감적인 수사를 하는 네발달린 탐정. 지금까지 다양한 시도와 실험이 이루어져 왔던 추리소설계에도 이만큼 대담하고 전복적인 시도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펠리데는 추리소설 애호가들보다 애묘인들에게 더욱 반가운 소설일지도 모른다. 유달리 고양이에 대한 편견이 만연한 국내 정서에 비춰보면 그렇다. 스스로가 상당한 고양이 애호가라는 저자 아키프 프린지는 고양이의 행태와 습성을 적극 반영해 사실적인 묘사로 고양이 탐정의 매력을 십분 발휘해 놓았다. 냄새를 단순히 맡는 것을 넘어 맛보는 것에 가깝게 느끼는 민감함, 육식 동물다운 기민함, 명석한 두뇌를 가진 생물이 바로 고양이들이다. 작중에 묘사된 프란시스의 ‘육감수사’ 는 고양이의 이러한 특성을 적극 반영하고 있다. 걔 중에서도 압권은 속칭 ‘고양이 집회’를 작가의 방식대로 해석한 것으로 보이는 ‘성자 클라우단두스교(敎)의 집회’다.


고양이들은 천성적으로 무리생활을 하지 않는 영역동물이다. 각자의 영역이 확고해 이를 침범하면 서로 싸우기 마련이다. 힘에 따른 우열관계는 있지만 늑대나 개처럼 무리를 이끄는 지도자의 존재하는 경우는 없다. 그러나 종종 야생화된 이른바 길고양이들이 건물옥상이나 골목 등지에 무리지어 우는 모습이 관찰되는데 사람들은 이를 두고 ‘고양이 집회’라 부르는 것이다. 물론 정확한 이유는 동물행동 학자들조차 모른다. 소설보다 이 리뷰를 먼저 읽을 이들을 위해 소상히 밝히기는 어렵지만 이 고양이 집회는 작가의 상상력이 덧붙어 사건의 열쇠로 작중에 등장한다. 역시 고양이에 대한 작가의 면밀한 관찰과 이해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초속5cm의 감독으로 유명한 신카이마코토의 단편 고양이집회【猫の集會】



이런 연유로 이 소설을 가장 권해주고 싶은 이들은 고양이에 대해 편견을 가져왔던 이들이다. 애드거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 이래로 불길함의 대명사였던 고양이가 추리사상 가장 독특한 탐정으로 다가오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소설 펠리데는 절묘한 트릭과 치밀한 두뇌 싸움과는 거리가 조금 있다. 자칫 장르문학 본연의 임무에 소홀했다는 비판을 받기 쉬운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추리사상 다시없을 작고 섹시한 탐정을 만나볼 경험은 흔치 않은 기회다. 추리 매니아를 자부하는 이들에겐 일독을 권하며 우리집 고양이가 키보드 위를 지나며 남긴 메시지를 전한다.


‘23@#$%56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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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3-12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너무 깔끔하고 멋진 리뷰어요.
이런 리뷰를 이제서야 보다니... 참으로 안타깝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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