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현대문학 가가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근래 언론에 대서특필된 집단 따돌림 소식을 접하는 순간 히가시노 게이고(東野圭吾)의 “악의(惡意)”가 떠올랐습니다. 특히 ‘왕따는 당하는 쪽에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더라’ 는 말을 너무도 당연한 듯 입에 올리는 이들이 많아 그랬나 봅니다.


추리소설답게 ‘악의’ 역시 살인 사건으로 시작됩니다. 명망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 구니히코가 살해당합니다. 해외이민을 앞두고 한창 이삿짐을 정리하던 그는 자신의 서재에서 둔기에 맞고 교살당한 변사체로 발견됩니다. 살해당한 작가의 주변에서 소위 강력범죄의 3대동기라는 원한, 치정, 금전 문제의 기색은 보이지도 않습니다. 곤란해하는 경찰이 얼굴 모르는 제3자의 우발적 범행으로 규정할 찰나, 히가시노 게이고 세계의 셜록 홈즈, 가가형사가 등장합니다. 냉철하고 명민한 그는 등장과 동시에 최초의 목격자이며 구니히코의 친구였던 오사무를 집중적으로 물고 늘어집니다. 


마치 선물 포장지를 벗기듯 차례차례 오사무의 알리바이와 자기방어 논리를 무너뜨리는 가가형사. 급기야 100여 페이지도 지나지 않아 가가는 오사무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살해에 이용된 트릭까지 완벽하게 간파해 선언합니다. 독자들은 여전히 두툼하게 남겨진 페이지들을 보며 ‘어라, 뭔가 이상한데? 진범이 나중에 따로 밝혀지는 걸까나?’ 라고 의문을 가질 법 합니다만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구니히코 작가를 살해한 범인은 오사무가 맞고 가가형사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시작과 동시에 범인과 트릭이 모두 밝혀지는 추리소설이 대체 무슨 재미가 있겠냐는 반문이 이어지겠지요. 바로 이 때문에 히가시노 게이고의 악의가 다른 추리소설과 남다른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작가의 말마따나 악의는 애초에 ‘어떻게’ 죽였느냐가 아니라 ‘왜’ 죽였느냐를 밝히기 위해 쓰여진 소설 입니다. 범인이 누구였는지, 피해자를 어떤 방식으로 살해했는지 드러나는 순간 독자들은 더 큰 수수께끼인 ‘그렇다면 도대체 왜 죽였을까?’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범인인 오사무는 중학시절부터 피해자와 구니히코와 같은 반이었던 죽마고우였습니다. 고교진학 이후 연락이 끊겼지만 구니히코가 작가로 등단하며 오사무와 다시 연락이 닿아 재회하게 되었습니다. 교직과 아마추어 작가 생활을 병행하던 오사무는 이미 상업적으로 대성한 구니히코의 도움으로 등단해 전업작가 생활을 시작합니다. 그 뒤로 자주 내왕하며 친밀하게 지냈던 두 사람. 겉보기엔 구니히코에게서 음으로 양으로 도움을 받아온 오사무가 살의를 품을 만한 이유가 전혀 없어 보이기 때문에 살해 동기를 밝히기는 살해 방식을 밝히는 것보다 더한 난제가 됩니다. 갑갑한 독자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극중의 탐정 가가형사는 사실상 수사의 2라운드에 착수하고 속속들이 새로운 사실을 밝혀 나가는데 바로 이 과정이 밀실트릭이나 얼음송곳과는 다른 차원의 놀라움을 선사해 주는 것입니다. 구니히코가 오사무의 작품을 가로챘다는 혐의에서부터 오사무가 구니히코의 전처와 내연관계였다는 것까지 서로 물고물리는 악연을 이어왔던 두 사람. 가가형사의 뒤를 따라 이 두 사람의 과거를 파내려 가다보면 마침내 수 십 년 전인 중학시절에 까지 닿게 됩니다. 그제서야 우리는 전모를 드러내는 거대한 악의 앞에 몸서리치겠지요. 이것이야 말로 히가시노 게이고가 준비한 진정한 반전이 되겠습니다.


트릭과 범인의 정체가 너무나 빤해 악의는 얼핏 시시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초반부는 마치 차 포 떼고 시작하는 장기처럼 느껴질 가능성도 큽니다. 마지막까지 독자들을 쥐락펴락 하며 범인의 뒷모습만 비춰주는 전형적인 서스펜스 문법에 길들여진 독자분들에겐 자칫 허무하게 느껴질 수 있는 생소한 기법의 추리소설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어떻게’ 가 아닌 ‘왜’를 묻고 있기 때문에 악의는 단순한 장르문학 그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흔히들 장르문학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간 때우기에 좋은 유희거리 정도로 취급하거나 오락성이 목적이지 교훈이나 감동은 애초에 염두에 두지 않고 읽는다는 자칭 매니아들 또한 있습니다. 이런 부정적인 선입견들을 종식시켜줄 만한 힘이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악의는 작가의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드러낸 소설입니다. 그렇기에 ‘범인은 왜 그랬을까?’ 에 대한 답을 낼 수 있었던 겁니다. 이 답을 알게 된다면 시중에 넘쳐나는 속칭 ‘반전소설’ 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전율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인간이란 그렇게 아름답지도, 논리적이지도 않고 도덕적인 존재는 더더욱 결코 아니라는 진실을 감당할 준비가 된 분들이라면 지금 당장 악의를 읽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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