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리데 - 고양이 추리소설
아키프 피린치 지음, 이지영 옮김 / 해문출판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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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 문학 사상 가장 작고 섹시한 탐정의 탄생





추리문학 사상 가장 섹시한 탐정을 꼽으라면 과연 누구일까? 대부분 코난 도일, 모리스 르블랑, 애거사 크리스티가 창조한 3대 탐정 가운데서 답을 찾으려 들 것이다. 그러나 하나하나 살펴보면 영 마뜩찮다. 먼저 홈즈. 골방에 틀어박혀 밤새 화학실험에 몰두하는 오타쿠. 평생 연애한 번 못 해볼 관상이다. 라이벌 뤼팽은 어떤가? 홈즈에게 부족한 그 무언가는 있지만 그게 또 넘쳐서 문제다. 덧붙여 매번 ‘그녀’를 갈아치우는 바람기까지 감안하면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 그렇다면 미스 마플? 연령 제한을 가지고 꼬장꼬장하게 구는 대기업 공채는 아니지만 섹시함을 말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는 연식이시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이 3대 명탐정들은 물론이고 추리문학계 속 그 어떤 탐정도 갖추지 못한 매력을 갖춘 이가 있다. 잘빠진데다 유연하기까지 한 허리, 주먹만 한 얼굴에 정반대로 크고 선명한 눈망울, 그 속엔 눈자위를 꽉 채울 정도로 새까만 눈동자. 이 모든 걸 가진 탐정이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하지만 사실이다. 펠리데(Felidae)의 주인공이자 사상 초유의 고양이 탐정 프란시스는 이 모든 걸 갖추고 있다.


펠리데(Felidae)는 고양이과를 부르는 라틴어 학명이자 이 소설을 관통하는 핵심어다. 사건을 추적하는 주인공뿐만 아니라 피살자, 정보 제공자, 조력자, 범인까지 모두 고양이다. 당연히 범행동기 또한 고양이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주인을 따라 이사 온 집고양이 프란시스는 이사와 동시에 새 집 마당에서 의문의 변사체(물론 고양이의 변사체다)를 발견한다.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이는 이 연쇄 살묘(!)사건은 하루가 멀게 느껴질 정도로 이어지고 범인의 실체를 쫓는 프란시스는 점차 거대한 소용돌이 한 가운데로 빠져들어 간다. 이처럼 고양이에 의한, 고양이를 위한, 고양이의 추리 소설답게 펠리데는 기존의 동일 장르문학과는 전혀 다른 면모들을 보여 준다.




독일내 선풍적인 인기에 힘입어 펠리대는 일찌감치 애니메이션화 되었다



시작과 동시에 프란시스는 냄새 맡고 네 발로 달려 범인을 쫓는다. 기존의 탐정들에게서 볼 수 없던 감각적인 면모다. 프란시스가 수집한 정보를 모으고 추론하는 과정에서 두드러지는 면모 역시 남다르다. 주로 꿈을 통해 일종의 계시처럼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고양이를 키워본 이들이라면 절로 고개를 주억거릴 만한 대목이다. 고양이는 육감이라는 말로 밖에 달리 표현되기 어려울 정도로 눈치가 빠른 생물이다. 고양이를 키워 본 애묘인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리라.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어조와 억양의 변화만 가지고도 귀신같이 주인의 기분을 알아차리고 처신하는 존재들이다. 반대로 고양이를 키운 적 없는 이들이라면 잘 몰랐겠지만 고양이를 비롯한 동물들도 꿈을 꾼다. 잠꼬대를 하면서 먹이를 먹는 시늉을 하거나 허공에 대고 발길질을 하는 고양이들이 방송에 출연한 사례를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꿈꾸며 육감적인 수사를 하는 네발달린 탐정. 지금까지 다양한 시도와 실험이 이루어져 왔던 추리소설계에도 이만큼 대담하고 전복적인 시도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펠리데는 추리소설 애호가들보다 애묘인들에게 더욱 반가운 소설일지도 모른다. 유달리 고양이에 대한 편견이 만연한 국내 정서에 비춰보면 그렇다. 스스로가 상당한 고양이 애호가라는 저자 아키프 프린지는 고양이의 행태와 습성을 적극 반영해 사실적인 묘사로 고양이 탐정의 매력을 십분 발휘해 놓았다. 냄새를 단순히 맡는 것을 넘어 맛보는 것에 가깝게 느끼는 민감함, 육식 동물다운 기민함, 명석한 두뇌를 가진 생물이 바로 고양이들이다. 작중에 묘사된 프란시스의 ‘육감수사’ 는 고양이의 이러한 특성을 적극 반영하고 있다. 걔 중에서도 압권은 속칭 ‘고양이 집회’를 작가의 방식대로 해석한 것으로 보이는 ‘성자 클라우단두스교(敎)의 집회’다.


고양이들은 천성적으로 무리생활을 하지 않는 영역동물이다. 각자의 영역이 확고해 이를 침범하면 서로 싸우기 마련이다. 힘에 따른 우열관계는 있지만 늑대나 개처럼 무리를 이끄는 지도자의 존재하는 경우는 없다. 그러나 종종 야생화된 이른바 길고양이들이 건물옥상이나 골목 등지에 무리지어 우는 모습이 관찰되는데 사람들은 이를 두고 ‘고양이 집회’라 부르는 것이다. 물론 정확한 이유는 동물행동 학자들조차 모른다. 소설보다 이 리뷰를 먼저 읽을 이들을 위해 소상히 밝히기는 어렵지만 이 고양이 집회는 작가의 상상력이 덧붙어 사건의 열쇠로 작중에 등장한다. 역시 고양이에 대한 작가의 면밀한 관찰과 이해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초속5cm의 감독으로 유명한 신카이마코토의 단편 고양이집회【猫の集會】



이런 연유로 이 소설을 가장 권해주고 싶은 이들은 고양이에 대해 편견을 가져왔던 이들이다. 애드거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 이래로 불길함의 대명사였던 고양이가 추리사상 가장 독특한 탐정으로 다가오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소설 펠리데는 절묘한 트릭과 치밀한 두뇌 싸움과는 거리가 조금 있다. 자칫 장르문학 본연의 임무에 소홀했다는 비판을 받기 쉬운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추리사상 다시없을 작고 섹시한 탐정을 만나볼 경험은 흔치 않은 기회다. 추리 매니아를 자부하는 이들에겐 일독을 권하며 우리집 고양이가 키보드 위를 지나며 남긴 메시지를 전한다.


‘23@#$%56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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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3-12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너무 깔끔하고 멋진 리뷰어요.
이런 리뷰를 이제서야 보다니... 참으로 안타깝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