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놀기 - 나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
강미영 지음, 천혜정 사진 / 비아북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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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놀기]




자기 실종의 시대라고 한다.

너도 나도 자기를 찾기 위해 애쓰고 있다.

나도 그 틈에 끼어 나를 찾아보려고 발버둥 친다.



나를 찾으려면 내 인상착의를 알아야 하는데,

무엇을 두고 나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잃어버렸다는 것은 갖고 있던 것을 찾을 수 없는 상태인데,

내가 원래 있긴 있었던 것일까?



나를 정확하게 목격한 사람은 누구일까? (p111)



사람들이 자신을 찾는 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을 찾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혼자 있을 때 자신을 찾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란 것은 늘 언제나 ‘혼자’인 것이 아닐까?



나는 혼자 놀기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혼자 카페에 가고, 혼자 도서관에 가고, 혼자 영화를 보고, 혼자 미술관에 가고, 혼자 거리를 걷고, 혼자 여행을 떠난다.

나에게 ‘혼자 놀기’는 특별함이 아닌, 그저 일상이다.

내가 ‘혼자’ 노는 이유는, ‘귀찮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신경 쓰고, 이야기를 해야 하고, 같이 다녀야 하는 것들이, 함께 ‘선택’해야 하는 것들이.



나는 발길 가는 곳에 가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있고 싶은 곳에서, 있고 싶은 만큼 있는, ‘혼자’인 시간이 편하다.

하지만 그 시간들은 외롭고 고독한 시간들이다.



다시 말하면, 나는 ‘외롭고 고독’ 하지만, 그 ‘고즈넉한’ 시간을 즐기는 것이다.

귓가에 들리는 음악소리와, 느린 걸음과 자욱한 커피향을. 소음 없이 무수한 타인을 바라보는 시간을.

나는 오로지 혼자이고, 나라는 세상 밖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나’는 세상 밖의 사람들을 완전한 타인의 시선으로 보고 있다.

그 속에서 오로지 ‘나’라는 세상의 ‘나’를 만난다. 그게 내가 혼자 노는 방법이다.



책은 혼자이지만, 혼자이지 않은 시간을 가졌다.



60억의 혼자 놀기는, 혼자이지만, 함께 놀기 위한 게임이다.

소중한 나를 찾음으로 함께여도 행복하기 위한 놀이이다.



다시 말해, 책의 혼자 놀기는, 나를 찾고, 나를 사랑하고, 나를 가꾸는 방법이다.



사람들은 나를 사랑하고, 나를 다독이지 않으면, 점차 시들해 지고, 결국에는 공중에 흩어진 것처럼, 희미해지고 만다.

내가 소중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스스로를 소중히 생각해야 한다.

태어나고 살고 죽는, 단순한 일생이, 한 개인에게 전부라는 것을, 우리는 '내가 나'이면서도 너무 가볍게 생각해 버린다.

이건 이러해서, 저건 저러해서, 돌아서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시간을 흘려보내고 만다.

다른 사람은, 저 사람은, 누구는, 주위를 둘러보며, 우리는 무수한 핑계를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오로지 혼자 있는 시간 속에서 또 어떤 핑계를 만들 수 있을 까?

모든 결과의 원인은 자신이다. 핑계는 오로지 ‘자신’밖에 없다.



‘혼자 잘 노는’ 사람은,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 내가 즐길 수 있는 것, 그리고 나를 반성하고, 나를 다독일 줄 아는 사람이다.



혼자이기를 꿈꾸지만, 늘 같은 크기로 사람을 그리워했다. p150



사람들은 사람들 사이에서만 살 수 있다. 사람을 사람이라 부르는 이유도 역시 거기에 있을 것이다.

아무리 ‘혼자 놀기’를 즐기는 사람일 지라도, ‘혼자’서만 논다면, 그는 자신을 소중히 여기기는커녕, 자신을 놓아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좀 더 위축되고, 좀 더 작아질 수밖에.

늘 같은 크기만큼으로 사람을 그리워 할 줄 알기 때문에, 자신만의 시간을 더 소중히 여길 수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책은 ‘혼자 놀기’를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을 이야기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자신을 찾지 못한 채, 무의미한 관계만을 반복하는 이들에게, ‘진정한 소통’을 이야기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자신과 진정한 소통’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 내가 하고 싶은 일, 죽음을 직면했을 때, 가장 먼저 할 것.



자신과 직면했을 때, 내가 외면하고, 포기하고, 뒤로 미뤄둔 것들에 대한 진실을 깨달을 수 있다.

사실은, 자신의 게으름이, 나태함이, 용기 없음이, 지레짐작이, 그 모든 것들로부터 자신을 멀게 했음을.



다른 사람이 아닌, 내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조금이라도 빠르게 가기 위해 두 손에 꼭 붙들고 있던 것들이 놓아진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신을 견뎌낼 수 있는 능력, 아주 빠르고 바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자기 안정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p197



자신을 위해 투자한 몇 분의 ‘혼자 놀기’가 ‘나를 나로’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이제 ‘혼자’를 두려워하지 말자, 우리는 늘 ‘혼자’이지만, 꼭 ‘혼자’인 것만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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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를 주시는 삼신할머니 까마득한 이야기 1
편해문 글, 노은정 그림 / 소나무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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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를 주시는 삼신할머니]



우리 조카가 태어 난 지 벌써 한 달하고 십삼일이 지났다. 어찌나 곱고 귀한지, 그 사랑에 몸살이 일 지경이다.

우리 가족들은 아기 사랑에 모두 팔불출이 되었다.

어디서 이 귀한 것이 왔을 까, 어디서 이 어여쁜 것이 나왔을 까.

하늘 길 타고 왔나, 별빛 받아 왔나.

꼬물거리는 손, 오물거리는 입, 어디 하나 곱지 않은 곳이 없다.



그 귀한 아기씨가 우리 집에 내려온 날, 그것이 바로 축복이고 기적이다.



그 전까지 아이라 해도 그다지 감명이 없었다. 내 일이 아니었으니.

아 신기하구나, 귀엽구나, 그런 흔한 감상정도였다.

하지만 우리 집에 내려온 아기씨는 귀하디 귀한 세상의 하나밖에 없는 기적이다.



그 아기씨의 삶에 귀함과 희망과 영광이 깃들기를 바라는 마음은 이젠 너무나 당연해 말로도 나오지 않는 일이다.



한 가족에 아이는 그만큼 소중한 존재이다.

가족들은 집에 오기가 무섭게 아이를 찾고, 아이 얼굴을 보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아가’하고 행복을 만끽한다.



이 귀한 아기씨가 어디 있다 이제사 왔을까?



아기는 삼신할미가 점지해 준다고 한다. 우리 옛 이야기 속에 너무나 많이 등장하는 ‘삼신 할미’.

너무 흔하기 때문에, 깊이 알지 못하는 이야기.

서천 너른 벌판에, 곱고 예쁜 꽃씨 심어, 정성으로 기른 꽃에, 축복과 기원을 모두 담아, 열들 열흘을 곱게 기워, 세상에 내보내는 존재.

아이들의 신이자, 산모의 신이다.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삼신할미는 축복의 신이다.



한 가족의 가장 큰 기쁨을 주는 신.



삼신할머니가 어떻게 생겼으며, 어떤 일을 하며, 어떻게 아이를 점지해 주는지, 제주도 삼신 이야기를 바탕으로 꾸며진 책을 읽으며 나는 잠시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 아이가 그렇게 태어났다는 생각만 해도 기쁨으로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우리 아이가 서천 너른 꽃밭 중 가장 예쁜 꽃이라고 의심도 들지 않았다.



마치 판소리의 한 가락처럼, 할머니가 머리통을 어루만지며 풀어내는 애정 어린 소리처럼, 멀고 아름다운 동화 나라의 기적을 책 속에 뿌려 놓은 듯 했다.



생명의 기원을 담은 신화 중에, 이만큼 어여쁘고, 귀한 이야기가 또 있을까.



우리 나라 사람들이 아이를 얼만큼 귀히 여겼는지, 이 이야기에 모두 담겨 있는 듯했다.



아이를 낳은 우리 언니에게 나는 이 책을 선물할 것이다.

나중에 우리 아이가 커서, ‘이모, 나 어디서 왔어?’라고 묻는 다면,

서천 너른 벌판에서 삼신 할미가 정성들여 키운 귀하디 귀한 꽃 중에, 가장 어여쁜 꽃, 열달 열흘 엄마 사랑 듬뿍 담아 왔지. 라고 웃으며 대답해 줘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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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동물원 1 - 불사조교파
조대연 지음 / 녹색문고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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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동물원]

 

인간은 동물인가? 그렇다면 참으로 복잡하면서도 단순한 동물이다.

인간이 동물인가? 그렇다면 인간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인가, 무리 안에 있는 것인가.

 

이 책. 마치 롤러코스트를 타는 듯했다.

이 책. 마치 꽉 막힌 도로 위의 줄지어 늘어선 차들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인간은 상상하는 동물이기에, 그들이 만들어 낸 상상 속에 갇혀있다.

 

책을 읽으면서, 이걸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계속 생각했다.

야유를 퍼부어야 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구경’을 해야 하는지.

인간이 갇혀 있는 동물원을 구경하는 기분이란, 저것은 껍데기만 인간이야, 라는 부정.

그리고 거북한 속이 뒤집어 지는 야유.

 

인간은 살아가면서 평균치의 룰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것들은 어느새 속설이란 이름으로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그런데 그것을 평균치라고 부를 만한 근거는 어디에서 나왔을까?

그것은 다수의 수긍 때문이었다.

그런데 다수의 수긍이라 부를 만한 근거는 또 어디에서 나왔을까?

 

“쉽게 비슷비슷 해 지는 거다. 한 사람 속은 귀신도 모른다. 하지만 열 명, 백 명으로 모인 속은 알 수 있다. ……” p10-11

 

저자는 용감했다. 거짓 없이 꾸며진 책. 혹은 거짓처럼 꾸며진 책. 나는 이 책을 이렇게 평가해 봤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너무 비슷하지만, 또 너무 다른 세상.

 

말 속에 글이 있고, 글 속에 말이 있다. 소설은 허구이다. 하지만 진실이다. 진실이되 현실은 아니다. 책은 현실이되 허구였다.

 

그는 진실의 반대말이 비밀이라고 주장하곤 엉뚱하게도 거짓의 반대말도 비밀이라고 주장했다. p266

 

“뭘 믿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누가 믿느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믿느냐, 하는 겁니다. 다수의 믿음은 옮은 겁니다. 그래야 세상은 평온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비밀이 있는 한, 진실은 없어요. 옮고 그름이 있을 뿐이지요.” p246

 

비밀의 반대말은 비밀이다. 누구도 그 비밀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누구도 그것이 비밀인지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다수는 어느새 파워이고 권력이 되었다.

다수의 힘에 의해 돌아가는 세상. 하지만 다수가 비밀의 베일을 들추지 못하는 세상.

 

불사조교파는 비밀의 베일이다. 그들이 옳다 그르다는 중요치 않다. 그들이 껴안고 있는 비밀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도 밝혀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늘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정해진 일을 하죠. 노동자도 공무원도 학생도 주부도 다 그리하지요. 자기 자리를 떠난 사람은 곧 잊혀요. 누군가 그 자리를 대신 채우겠죠.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습니까?” p253

 

일상은 반복된다. 반복되는 일상을 살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 나와 네가 복제되어 우리가 되고, 무리가 되고, 세상이 되고 사회가 된다. 태초의 ‘나’는 비밀을 알고 있었다. 내가 너가 되고 우리가 되는 사이에 나의 ‘비밀’은 태초의 부끄러움으로 은폐되었다. 아니, 일상 속에 묻어 버렸다. 아무도 그것이 일상과 다름을 눈치 첼 수 없게.

그래서 반복도 비밀처럼, 일상이 일상인 것처럼 숨겨져 왔다.

인간은 일상이란 우리 안에 무리 지어 살고 있는 것이다.

 

불사조교파가 그러 했듯이, 우리는, 비밀은 모른 채, 다수의 외침에 그저 끌려 다니고 있는 지도 모른다. 네가 너가 그들이 옳다고 했으니, 옳다고 믿고 따르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것이 누군가 꾸며낸 거짓 선동인 줄도 모르고, 진실의 은폐를 위해 모여진 하나의 점인 줄도 모르고.

조금만 주위를 돌아보면 일상처럼 그 곳에 은폐된 진실이 숨겨져 있는 지도 모르고.

 

“……어쩌면 가면은 이미 우리 본성이 된 건지도 모르겠네.” p62

 

인간의 본성 위에는 가면이 있다. 옳다 그르다의 가치관이 아닌, 부끄럽다,의 의식 속에 숨겨진 가면이. 부끄러움을 감추려 옷을 입듯이 당연히 감춰지는 부끄러운 진실들이 세상을 이루는 비밀의 근원일 지도 모른다.

 

영원이다 우주도, 그 심원의 진실은 사실, 태양이 지구를 돌 듯, 우주의 태동이 사실은 먼지일 뿐이라는, 누군가에게 끌려 다닐 뿐, 반복되는 일상 속에 있다는 듯, 나의 근원이 사실은 그렇게 하찮게 여기는 무엇이었다는, 끄집어내고 싶지 않은 부끄러움 위에 세워진 사소함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모든 근원은 사실, 상상에 의해 건축된 ‘상상 동물원’일 뿐일지도 모른다. 상상하는 인간들이 우글우글 모여 사는.

 

[상상 동물원] 제 1권 불사조교파,의 내용이 비밀이었다면, 이제 그 비밀의 베일을 들춰낼 모험이 시작되어져야 할 것인가. 세상의 모든 비밀이 그렇듯, 책장을 들춰야 할까, 말까, 책장을 쥔 손의 작은 경련을 느끼며, 2권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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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 Free 러브 앤 프리 (New York Edition) - 개정판
다카하시 아유무 지음, 양윤옥 옮김 / 에이지21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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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Love & Free]




길 위에 한 사람이 서있다.

길이 물었다. 어디를 가는 거지?

길가의 들풀이 물었다. 왜 가는 거지?

길바닥의 흙모래를 흔들며 바람이 물었다. 어떻게 갈 거지?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길 위에 있어야만 어디를 가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가방을 매고 기차를 타고 낯선 곳으로 발길을 굴려야만 여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우리는 미래란 낯선 곳을 찾아 오늘을 걷는 여행자인 것을.




나는 바람을 좋아한다. 언제부턴지는 모르겠지만, 내게서 바람 냄새가 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그래서 바람 냄새를 찾아 떠돌았을지 모른다.

나는 바다를 좋아한다. 마음에 바다 수위를 맞춰 주지 않으면, 바싹 말라 쩍쩍 갈라져 버린다. 그래서 바다를 찾아 그렇게 떠다녔다. 




실로 말하자면 흔히들 말하는 방랑벽이나 역마살 같은 것은 내게 없는 것 같다.

아무리 길을 떠나도 그 끝에는 그저 길이 있었다. 그래서 돌아오면 습관처럼 지치고 피로한 마음을 이불 속에 감출 뿐이었다.

여행을 좋아하지만, 동반자로 사랑할 수 없는 무엇?




나는 분명 길 위에 열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 왔다. 여행자의 수기를 읽으면, 모두들 큰  마음과 넓은 이해를 품고 사는 것 같았다. 때때로 나는 꿈을 꾼다. 여행가가 되서 세계를 돌아다니는 나를. 그리고 언젠가 ‘심봤다’라고 외치며 ‘열쇠’를 찾는 꿈을.




책에 쓰여 진 글귀를 한자 한자 읽으며, 나는 세삼 여행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봤다.

어떤 이는 이 책을 읽으며 길을 떠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삶이란 여행을 생각했다. 누구나 각자에게 ‘여행’이란 의미가 다를 수도 있구나.




길 위를 여행하는 사람도 있고, 하늘 위를 여행하는 사람도 있고, 숫자 속에서, 가상현실 속에서, 혹은 책 안에서 여행하는 사람도 있구나.




작가에게는 분명 바람 냄새가 날 것 같았다. 넓은 마음은 이미 눈이 세계를 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곳이 분명 작가가 찾고 있는 열쇠이자 인생이자 그만의 길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멋지고, 부럽고, 다른 사람의 길을 이끌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길을 걷고 있는 작가의 여행록에서 나는 나의 길을 살짝 훔쳐보았다. 단순한 여행록이 아니라, 어쩐지 작가의 인생 조각을 보고 있는 듯 했다.

어디에 갔는데, 어떻게 좋았고, 어떤 게 있었고, 그런 것이 아니라, 길 위에 인생에 대해 별 같은 바람 같은 언어로 수를 놓았다.




사랑, 사람, 행복, 소중함.




거창하지 않다. 과장되어 있지도 않다.

작고 소중한 것들이 오로라처럼, 책 속에 펼쳐져 있었다.




‘목표를 향해 가는 게 아니라 즐긴다.’

‘가지려 하는 게 아니라 늘 사랑한다.’

하와이에서는 그런 삶이 나를 유혹한다.




Try it, and you'll see.

해보면, 알아.




책을 보며 정말 재미있었던 것은 책에 페이지 표시가 없다는 것이었다.

하긴 인생에 페이지 따위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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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의 섬 - 1921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아나톨 프랑스 지음, 김우영 옮김 / 다른우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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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의 섬]




뒤뚱거리며 걷는 펭귄의 짧은 다리보다도, 얕은 진실을 가진 인간의 역사.

과연 우리가 알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이 진실일까?

나는 진실을 믿지 않는다.

프랑스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뮈세는 ‘이 세상에서 나에게 남은 유일한 진실은, 내가 가끔 울었다는 것뿐이다’라고 말했다.

나의 삶에서 진실은 무엇일까? 개인의 역사에도 진실은 그 희소성의 유별(有別)을 따로 말할 것이 없다.




요즘 뉴스를 보면 근, 현대사 교과서 문제로 떠들썩하다. 어느 것이 진실한 역사인지, 갑론을박, 아니, 그 이전에 정권에 따라 문제시 되는 역사의 가변성.




역사는 후대 사람들의 의해 평가받지만, 현시점의 승리자에 의해 기록된다.




모든 민족의 역사는 범죄와 가난 그리고 광기의 연속이다. (p13)




얼마 전부터 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조금씩 다시 읽고 있다. 대충 읽는 것이 아니라, 꼼꼼하게 살펴가며 읽고 있는 중이다. ‘광기의 역사’를 보며 느꼈던 것은, 사람들은 진실을 감추기 위해,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진실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한 사람들에 의해, 전쟁이 벌어지고, 피와 뼈의 살육이 가행되며, 그 모든 것을 광기 속에 몰아넣고, 마녀재판을 통해, 승리자의 거짓을 유지시켜 나간다.




당신은 역사를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믿는다고도, 믿지 않는다고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역사는 그런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탄생에 대해, 그 누구도 증명할 수 없는, 창조설과 진화설이 대립 속에 균형을 이뤄 가는 것과 같이.




대립, 그렇다, 진실과 거짓, 승리자와 패배자, 대립 속에 역사는 피와 뼈의 산을 쌓았고, 그 위에 문명이란 화려한 포장지를 씌워놓은 것.




<펭귄의 섬>을 읽으며, ‘와! 이 작가는 정말 인간에 대해 부정적이구나.’라고 중얼거렸다.  진실을 볼 수 없는 신의 대행자, 그의 실수로 인해 생겨난 펭귀니. 그들은 처음부터 진실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태어나지 못했다.

신의 지팡이는 탁상공론에 불과했고, 악마의 숨결은 날숨보다 빠르게 흡수되었다.




일단 옷을 걸치면 도덕에 얽매이게 되고, 결국 거만하고 위선적이며 잔인한 습성을 키우게 될 텐데요. (p71)




도덕은 더 이상 진실을 유지시켜 주지 못한다. 아니, 그것은 오히려 악덕을 감싸주는 질 좋은 의복이 된다. 책에서 말한 ‘옷’은 마치 ‘선악과’와 같았다. 선악과를 입에 문 펭귀니는 원죄의 피도 없이 빠르게 타락할 뿐이다.




책은, 그리고, 그저 타락과 자연에서 멀어지는 펭귀니를 관조할 뿐이었다. 자연 속에서 평화롭고 욕심 없이 살던 펭귄의 모습은 더 이상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다.

욕망과 욕심과 이윤, 권력, 실리주의에 편승한 펭귀니 역사의 돛은 거센 북풍을 타고 북극의 얼음 깊은 곳에 진실을 묻어 버린다.




그가 범인이기 때문에 유죄 판결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해도 유죄 판결을 받았으니 범인인 것이지요. (p274)




펭귀니는 악마의 숨결 없이도, 거침없이 흘러간다. 더 이상 구원의 희망이 잔존하지 않은, 폭파된 도시 속으로.




1921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펭귄의 섬’. ‘낙원’이란 의미로 더 많이 쓰여 지는 ‘섬’. 하지만 ‘펭귄의 섬’에서 우리는 이미 끝을 그어놓고 달려갈 뿐이었다. ‘거짓의 낙원’




1921년이면 중국과 소련이 공산화되고, 사회주의가 그 위력을 펼치며, 한창 ‘유토피아’를 외치던 시절. 모두가 ‘유토피아’를 찾고 있을 때, 작가는 ‘반유토피아’를 통해, ‘인간의 섬’에 갇힌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려함이 아니었을까? 폭력으로 세워진 ‘섬’은 다시 그 폭력으로 가라앉을 수밖에 없다.




온 세계가 전쟁의 화마 속에 시달리고, 끝날 것 같지 않던 시간 속에서, 작가는 인간의 본성을 부정하고 만다. 작가의 눈에 인간이란 (인간의 눈에) 뒤뚱거리며 우스꽝스럽게 걷고 있는 펭귄보다 아둔하고 미개한 존재로 보였을 것이다. 때문에 잘 살고 있는 펭귄의 평화를 눈먼 진실로 파괴하고 마는.




그렇다면 ‘전쟁’의 불꽃을 더 이상 정의의 수단으로 인정하지 않는, 현대에는 어떨까? 화포의 위력보다 몇 배는 더 큰, Money의 역사함 앞에, 저항도 없이 스러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끝도 없이 이어지는 대립, 그 끝은, 책에서처럼 자멸뿐일지도 모른다. ‘펭귄의 섬’은 침몰했다. 그렇다면 ‘인간의 섬’에 남은 진실은 무엇인가? 그저 가끔 눈물 흘리며 관망할 뿐?




‘펭귄의 섬’을 손에 들고 단숨에 읽어 버렸다. 머리 속에 떠도는 많은 말들, 많은 생각들. 그리고 마지막 물음. 결국 인간은 자멸하고 말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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