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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찌들이 떴다!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30
양호문 지음 / 비룡소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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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언니가 책 표지를 보고는 한 마디 납겼다.
"저거 무한도전이냐?"
나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아닌데."
"왜 저거 딱 무한도전이잖아. 저건 유재석이고 저건 노홍철 아냐?"
나는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는 표정으로 "아니거든" 힘주어 말하고 다시 책 읽기로 돌아왔다.
책은 순식간에 끝을 보여줬다. 읽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듯 한데, 벌써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있었다.
청소년들을 위한 책이라고 생각하니, 고개가 끄덕여 졌다.
책을 다 읽고 책 표지를 가만히 보았다. 그랬더니, 어이없다고 흘려보냈던 언니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자세히 보니, 정말 '무한도전'의 주인공들처럼 보였다.
'무한도전'이라. 조금은 부족한 사람들의 무모한 도전, 이었지 아마.
그리고 꼴찌들의 반란이라. 재미있는 조합이라는 생각에 피식웃음이 났다.
작가는 고등학생 아들을 위해서 이 글을 썼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아들이 꼭 알았으면 했을 역사적, 사회적 사건과 그것을 어떻게 풀어냈으면 좋겠는 방향도 기술해 놓았다.
어떻게 보면, 조금은 가볍게 모든 문제를 다루고 있었고, 깊이와 무게를 따진다면, 복잡하지도, 사건의 무게를 깊이 있게 다루지도 않았다.
아이들의 치기와 풋사랑과 어른에대한 동경과 두려움 등을, 첫 실습이자 첫 사회생활이라는, 하지만 그것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어쩌면 어른들의 얄팍한 상술의 한 가운데에 놓여, 아이라는 이름으로 구속하고 통제하려 들고, 어른이라는 이름으로 책임지우려는,
사회의 이중성에 가벼운 욕지껄이를 흘리며 서술해 낸다.
여기서 잠깐, 우리는 왜 무한도전에 열광했을까?
조금씩 모자른 그들의 '무모한', 한편으로는 우습기까지한 도전을 보면서,
우리 보다 못난 사람을 보며 자기 위안을 했을까?
아니면, 그들의 우스꽝스러운 도전, 전혀 현실성없는 그들의 도전을 보면서,
우리의 그늘에 빛이 남을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꼈을까?
쥐구명에도 볕들날이 있다. 나는 무한도전을 보면 자꾸만 저 속담이 떠올랐다.
우리는 모두 일등만을 원한다. 일등이 아니면 우리는 패배자가 된다.
승자 아니면 패자. 흑과 백. 빛과 그림자.
엄친아,라는 우스게 소리를 우리는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다.
'엄마친구아들' 일명 뭐하나 부족할 것이 없는 완벽한 족속들.
우리는 '잘난 것'들을 조롱하며, '못난 것'들에서 편안함을 찾고 있는 것만 같다.
어쩌면 날이 선 세상에서 인간미를 찾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상위 1%의 잘난 것들에 대한 하위 99%의 못난 것들의 반란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
사회의 편입되어야 꼴찌라도 될 수 있다는 말.
우리는 사실 모두 조금씩 모자르고 부족한 사람들이 아닐까?
그 부족함을 그 모자름을 어떻게 메우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사회 실습이라고 왔지만, 기계과인 그들이 하는 일은, 실상 막노동이였다.
온 몸이 안 아픈 곳이 없다.
대 탈출을 기도했던 그들이지만, 그 안에서 풋사랑과 치기 어리지만 시위와, 그리고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어도 정의를 느끼게 된다.
아니, 무엇보다도 할 수 있다는 마음을 배운다.
막연한 두렵음. 이렇게 사느니 죽는게 낫다고 말하던 아이들.
무한도전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부족한 무리들의 현실성 없는 도전이, 혹은 절대 이루어 질 것 같지 않은 도전이.
그들이 최선을 다해, 실패하더라도 끝까지 해보는 그들의 도전이.
부족한 우리 꼴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일등이 아니면 꼴찌인 사회. 나는 어디서도 꼴찌가 될 수 있다.
꼴찌이기 때문에, 나는 무엇도 두려울 것이 없다.
비록 꼴찌라는 이유로 믿음도 신뢰도 얻을 수 없지만, 멸시와 비난을 받지만,
한 걸음의 용기와 할 수있다는 땀방울이 있다면, 무엇도 두려울 것이 없는 꼴찌들인 것이다.
꼴찌다. 하지만 커다란 가능성을 품고 있는 꼴찌들이다.
'무한도전'을 '성취'할 수 있는 꼴찌들이다.
99%의 꼴찌들에게. 반란은 시작되었다. 이제 뛰어 오르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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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은이 2009-01-13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 책 저도 그저께 읽었어요. 그런데 저는 아주 재미있게 감명 깊게 읽었어요. 소소한 여느 청소년 소설들보다 깊이도 있고 무게도 있고. 스케일 면에서도 모 신문 문학전문기자의 말처럼 학교와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 참신하고 독특해서 근래 보기 드문 소설이었어요.
 
1학년 1반 34번 - 종잡을 수 없는 사춘기 아이들의 마음을 잡아주는 이야기
언줘 지음, 김하나 옮김 / 명진출판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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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 다닐 때의 일이다. 아마도 유치원 재롱잔치 비슷한 행사를 얼마 앞두고 였을 것이다.
나는 집에 와서 무작정 엄마에게 유치원에 다니지 않겠다고 떼를 썼었다.
엄마는 유치원에 전화를 했고, 유치원 커튼을 뜯어 낸 사고를 친 것을 알아냈다.
나는 어린 시절 기억을 잘 하지 못한다.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가 보다.
사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도 없었던 듯 하다. 
나는 어렸을 때, 지금의 나를 보고는 상상도 못할 만큼 내성적인 아이였다.
지금도 낯가림이 심한 편이지만(별로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지만.) 그 당시에는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한다는 것이 참 어려웠다. 말수도 없었고, 늘 혼자 생각하고 혼자 놀기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어쩌면, 워낙에 대가족의 일원이다 보니, 특별히 눈을 끌지 않는 나는, 집 안에서도 있는 듯 없는 듯 한 아이였고,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인간관계라는 것은 내게 마치 절대로 풀 수 없는 루빅큐브(나는 아직도 이건 절대 못하겠다.)와 같은 것이었다.
집에서는 혼자 노는 날 뭐라 할 사람이 없었다. 아니, 귀찮게 하지 않는 나는 얌전하고 착한 아이였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치원에 입학하고 부터는 조금 달랐다.
모두 끼리끼리 친구를 만들고 노는 일이 내겐 멀고도 힘든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특별히 유치원에 가는 일이 싫었던 것은 아니였다. 어차피 집에서 혼자 노나, 유치원에서 혼자 노나 마찮가지였으니까.
문제는 내가 혼자 노는 방식이 커튼에 매달려 있는 형식이란 것이다.
그리고 끝내 사고를 치고 만 것이다.
그 후의 일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떻게든 수습이 되었을 테고, 커튼이 아닌 또 다른 혼자 노는 공간을 찾았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혼자 노는 걸 좋아하는 성격은 국민학교에 입학하고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혼자 노는 걸 좋아하고, 조용한 아이라고 해서, 어른들 말씀을 잘 듣는 다는 착각은 하지 않는게 좋다.
생각이 많고, 눈에 들어오는 아이가 아니였던 만큼, 나는 어른들의 눈을 피해, 내 멋대로 놀러 다니고는 했고,
그렇게 놀고도 혼나지 않을 만큼 영악한 아이였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라든지, 규범이라든지, 도덕이라 든지, 그런게 특별히 내게 어렵거나, 이해되지 않거나, 불편하거나, 답답한 적은 없었다.
아니 답답할 이유가 없었다. 시키니까 하기는 하지만 하기 싫다면 충분히 안하고도 남았고, 시키는 일을 하면서도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은 꼭 다 하고야 마는 아이였으니까.
어쩌면 문제는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부터 였는 지도 모른다. 겨우 그때서야 나는 내 안의 틀 밖으로 조금씩 고개를 내밀고 있었던 것이다.
어른, 기대, 규정지어진 틀. 벌거벗은 우리의 몸에 옷이 입혀진 순간부터.
말을 배우며, 말 속에 숨겨진 법칙을 내뱉는 순간부터.
우리는 타인이라는, 사회라는 틀 안에 갇히게 된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타인 속에 살기 위해,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그리고 그 순간부터 우리는 자유를 갈망하게 되는 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책의 34번과는 다르게, 전혀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다.
아이로 있을 수 있다면, 영원히 라도 아이로 있고 싶었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틀을 의심하고, 내 안의 틀에 방황하기 보다는, 그 틀이란 것 조차 인식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그 틀이 인식되는 순간부터, 나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게 내 경우에는 고등학교 진학을 하고 부터였고, 34번의 경우에는 학교를 입학한 그 시점에서 부터 였다.
벗어나고 싶고, 도망가고 싶고, 틀어진 틀의 이음새를 맞추기 보다, 틀어진 틀을 부셔버리고 싶었던 때.
고백하자면 나는 그때 학교를 그만두고 싶었고, 학교 창문으로 뛰어내리고 싶었다.
조금 더 용기가 있었다면 나는 34번 처럼, 창을 깨고 숲으로 뛰쳐 나갔을 것이다.
지금, 나는 그 시절 내가 생각할 만큼의 어른이 되었다.
하지만 정말로 어른이 된 것일까?
나의 신조가 하나 있다. "내가 못 하는 일은 남에게도 강요하지 말자."
내가 아이들을 가르칠 때 하는 말이 있다.(잠시, 때때로, 사교육에 몸 담을 때가 있다.)
나는 절대로 내가 하지 못했던 일을 너희들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하지 못했다고, 너희 역시 하지 못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이해자를 바라지도, 훈계하는 사람을 바라지도, 교훈을 주는 사람을 바라지도 않는다.
내가 아이였을 때 그랬던 것처럼, 내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을 원할 뿐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 가슴으로 마음으로 듣지 않는다. 그 위에는 이미, 편견과 경험이란 어른의 탈이 존재한다.
훈계해야 한다, 바른길로 인도해야 한다,는 생각.
아이들은 자연 속에서도 자란다. 나도 그렇게 자라고 싶었다.
어린 시절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곳은 내가 '바람의 언덕' '노을의 언덕'이라고 불렀던 곳이였다.
답답한 틀에서 벗어나 가슴이 트일 수 있는 곳. 내 한숨까지도 바람결에 흘릴 수 있는 곳.
아이는 언젠가는 어른이 된다.
어른은 언젠가는 아이였다.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그 뿌리의 힘으로 나무가 된다.
나무는 뿌리가 없으면 살 수 없는데, 보이지 않는 다고 뿌리를 잊어서는 안된다.
뿌리는 보이지 않을 뿐, 언제나 그 자리에서 우리를 지탱해 주고 영양을 공급해 주고 있다.
우리는 뿌리를 잊어서는 안된다. 뿌리를 뽑아 서도 안된다. 그리고 기억해야 한다.
뿌리의 기억을. 또 다른 뿌리가 커다란 나무로 성장할 수 있도록.
책은 내게 추억 여행이란 아련한 기억을 선물 해 주었다. 짧은 글과 은은한 색의 그림들이,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만나게 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다시 그때를 돌아보며 지금의 나를 생각한다.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면

그 시절 천진했던 꿈을 기억할 수 있을까

그 순간을 기억할 수 있을까

자신이......

얼마나 자유롭게 날아다녔는지.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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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스타샤
조지수 지음 / 베아르피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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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거림, 열정, 충족, 안타까움, 위안, 공감, 이해, 존경, 동정, 이러한 것들이 사랑을 통해 나스타샤가 내게 가르쳐준 것이었다. p421 


사실을 고백하자면, 책의 앞부분을 읽으며 나는 내 자신이 조금 불편해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책을 읽는 속도가 느려지고, 자꾸만 책을 내려 놓게 됐다.
책이 펼쳐놓은 철학적, 종교적 사유가 나의 독서력을 감소 시켰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내 독서력을 방해했다고 보기에는, 나는 내가 절대 이해 못할 만큼 어려운 책을 읽고 뇌를 혹사시키는 일에 즐거움을 찾는 기질이 있었다. 
내가 책을 불편하게 느꼈던 것은, 주인공 조지가 느낀 공허와 부정적 사고와 허무였다.
앎은 때로 우리를 불편한 진실과 조우하게 한다. 그렇게 조우하게 된 진실은 우리를 패배하게 하고, 미래를 희망하지 않게 한다.
또한 주위의 모든 것을 '이해'하게 하지만, 그것은 '이해'가 아닌, 일종의 '무관심'이다.
'희망'하지 않는 것은 '욕심'내지 않는 것이다. 그것으로도 우리는 사심없이 주위를 '관조'할 수 있는 것이다. 
희망없는 갈증과 허무한 사고는 불편하다.
그것은 그것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조금은 극단적일 지라도, 정체된 그 공기에서 빠져나오고 싶다는, 하지만 그럴 용기없음의 자기 위안이다. 
 

나의 인생은 실패였고 계속해서 실패해가고 있다. 행복할 줄 모르고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바로 나였다. 살기보다는 관찰하려 했고, 느끼기보다는 느낌을 이해하려 했을 뿐이다. 사람들에게 진실과 겸허와 소박함을 촉구했지만 먼저 나 자신에게 그것을 촉구했어야 했다. 어디에서부터 문제가 생겼을까? 왜 나는 이런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말았을까? 그러고 보면 나에게는 진심으로 행복했던 순간이 없었다. 행복과 기쁨조차도 두려워했다. p219
 

나는 꼭 그런 사람을 알고 있었고, 그 사실이 내겐 불편했던 것이리라.
 

나는 절망하는 나 자신과 관련하여 외로웠고, 삶과 세계가 주는 혼돈을 견딜 수 없어 했다. 삶은 무의미였다. 누군가가 좀 더 일찍 삶이란 본래 그런 것이라고 말해주었어야 했다. 나는 얼마나 많이 나의 과거의 교수들을 원망했는지 모른다. 왜 그들은 내게 한마디도 해주지 않았는가. 내가 얼마나 절박하게 구하고 있었는가. 그들은 그들 세계 속에서 어떻게 그렇게 기만적 만족을 누렸는가. 나는 구원의 호소 없이 살아왔고 위안과 공감 없이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 나스타샤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있고 모든 것을 의탁하고 있다. 내가 나스타샤를 보살피고 있다고 해도 나는 그녀 덕분에 살고 있었다. 그녀의 깊고 다정스러운 눈빛과 이해와 미소가 오히려 나를 보살피고 있었다. p265
 

내가 책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책의 중반이 다다를 무렵이었다.
정확하게는 나스타샤가 등장하고 부터일 것이다.
장대한 대자연의 서정이 녹아 있는 캐나다의 풍경과 그 풍경 안에서 또 다른 자연이 되었을 조지와 그렉.
그들이 낚시한 것은 단순한 물고기가 아닌, 자유과 자연과 삶의 미학이 었을 것이다.
제 2의 고향이 되었을, 안정과 인간애를 느끼게 해준, 웰드릭.
그 안에서의 고독은 자연을 구속하고 문명을 만들어 낸, 인간의 죄값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끼리끼리 등을 붙이고 있어야, 온기를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
조지의 외등은 그의 안에서 더욱 외로운 고랑을 만들고 있었을 것이라고.
조지는 자연과 닮은 여자와 사랑을 했다.
그것은 문명이 만들어낸 조지 내부의 허무에 자연의 거대한 풍경이 채워지는 것과 같았다.
자연의 절경 앞에 눈과 귀와 피부가 온몸으로 열광하는 것과 같이, 필연이었고, 저항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자연을 알고 자연 속에서 살게 된 인간은 문명 속에서 뿌리 내릴 수 없다. 뿌리 없는 삶일 뿐이다.
그 속에서 물과 햇빛과 공기를 얻을 수 없다. 끝내 그렉이 베시를 떠나고 자연 속으로 떠나 버린 것과 같이, 그것이 운명이다.
그리고 조지의 자연이었던 나스타샤와의 사랑은 운명이었다.
운명은 장엄하다. 그것을 느낀 사람은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살(煞)'이다. 벗어나서나려 하면 나를 찌를 '살기'로 돌아오는.
조지는 운명과 만났다. 
나스타샤. 
나는 감히 '사랑의 전설'이란 말을 한다. '사랑의 서사시'라는 말을 한다. 
 

그런데 당신을 만나고 나서 내 두려움의 근거를 알았고 그것을 이겨낼 수 있게 되었어. 내 두려움의 근거는 삶에 대한 거짓 환상이야. 이 삶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다는 내 환상이 두려움의 근거였어. 그것을 망칠까 봐 두려워했던 거지. p426-427 


조지의 개인 서사는 나스타샤란 운명으로 완성되었다. 나스타샤를 만나고 순환하기 시작한 조지 안의 공기는 나스타샤로 정화되었다.
나스타샤가 없는 조지는 '살(煞)'을 잃는 운명이다. 그것은 죽음일 뿐이다. 
어쩌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과 운명과 자연에 대해 노래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 모든 것이 '사랑'이라고. '사랑'으로 살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그리고 하나하나 '사랑'으로 살고 있는 이야기가, 다시 또 자연으로 돌아가 '전설'이 되는 것이라고.
우리가 아무리 무언가를 만들고, 규정하고, 생각하고, 안다고 해도, 그 모든 것에 감정이 없다면 빈껍데기 일 뿐이라고.
그 감정이란 것은 우리 주변에 들풀처럼 혹은 거대한 산맥처럼 놓은 '사랑'이란 것이라고.
책을 덮고 조금은 미소지었고, 조금은 쓸쓸 했지만, 나의 가슴에도 조지가 품었을 대자연의 숨이 느껴지는 듯 했다. 
나는 책을 서정으로 자연을 노래했고, 사랑을 서사시로 읊었다 기억할 것이다. 그 이름은 '나스타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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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비안 낫싱, 검은 반역자 1 - 천연두파티
M. T. 앤더슨 지음, 이한중 옮김 / 양철북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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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아주 오래 전에 봤던 영화여서, 제목도 기억나지 않지만,
흑인 노예를 나무틀에 매달고, 채찍으로 내려치는 장면이 떠올랐다.
제목도 내용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 장면만은 선연하게 남아있다.
이 리뷰를 쓰기 위해 인터넷을 뒤져보니, 아마도 '파워 오브 원'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리고 얼마전 알게된 빌리 홀리데이의 'strange fruit' 노래가 떠올라 소름이 끼쳤다.

"싸울 수도, 피할 수도 없어. 야만인이라는 딱지를 달지 않고는." 그러면서 그는 도전적이 아니라 자조적인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난 아무도 아니야. 난 사람이 아니야. 난 아무것도 아니야." p257

나는 자꾸 인간에 대한 회의가 든다.
인간이 맹신한 '이성'이란 것들이 자행한 수없는 살육의 역사.
어쩌면 인간은 한 방향. 자신이 옳다 믿는 한 방향 밖에 볼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믿음이란 것들이 두렵기까지 하다.
인간이 선하다는 믿음도, 인간이 악하다는 믿음도, 신 앞에 평등하다는 믿음도, 내 민족이 가장 우수하다는 믿음도, 나는 인간이지만 너는 인간이 아니라는 믿음도.

사실, 나는 차별이란 것에 특별한 반응을 하지 않는다. 살아오면서 차별이란 것을 특별히 받았다고 생각되는 일이 없었다.
누군가 나를 '차별'했다고 해도, 나는 늘 그 사람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것은 어쩌면 나에대한 확고한 믿음 덕분이었을 수도 있고, 원래 타인에 무관심 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역시, 내가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는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 차별이란 것을 멀리 '인종'까지 가지 않아도, 주변에서 수없이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벌, 재산, 집안, 직업... 그 차별이란 것이 단순히 '우월의식'에, '선민의식'에 기반한 것일까?
 
피부색, 인종, 조국, 부모,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들. 처음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것들.

옥타비안은 백인에 의해 키워진 흑인 아이이다.
철저히 실험체로 쓰여진, 하나의 소유 재산이었던.
옥타비안에게 최고의 옷과 집과 교육을 시켰던 것. 옥타비안의 어머니를 '공주'라고 불렀던 것.
그 기만의 뜰에서, 우스꽝스러운 연극 무대에서. 언젠가 쓸모없어지면 버려질 인형의 집에서.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달에 식민지를 건설하는 때가 오더라도 변치 않을 것 하나는 이런 모임일 게다. 그때에도 특권 때문에 장님이 된 젊은이들은 웃고 떠들고 춤추며 한심한 소리를 하고 있겠지." p228-229

인간은 정말 처음부터 하나의 방향성만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닐까?
그래서 끝없이 그 길로만 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 길이 잘못된 것이라고, 다른 길로 가야 하는 것이라고 하면,
방향을 바꾸라고 앞을 막고 있는 것들을 짓밟고라도, 계속 앞으로만 가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인간성이라는 것 자체에 회의가 드는 지금, 어쩌면 그들이 믿는 모든 것이 다 옳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흰 것만이 사람이라고 믿는 그들도, 모두가 똑같이 사람이라고 믿는 그들도.

옥타비안은 똑똑한 아이였다.
그렇기때문에 자신을 조명할 줄 알았고, 회의할 줄 알았다. 

"우린 다른 동물들의 살을 먹고 있어요. 우린 그들의 살로 우리를 채우고 있어요. 우린 그들의 묘지예요." p288

살육이라는 것이 어쩌면 인간의 본성 중 가장 강력한 것일지도.
이만큼 피에 미치는 존재가 또 있을까?
자기 영역을 표시하기 위해, 그 위에 있는 타종족을 몰살하는 동물이 세상에 또 있을까?

인간이 주장하는 '이성'이란 '형이상학적' 사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동물은 모두 서열을 가진다. 자기 영역을 철저히 지키려 한다. 난폭한 동물일 수록, 그 성향은 더 심해진다.
윗 서열의 동물은, 아래 서열의 동물들이 자신의 자리를 탐하지 않게 철저히 짓밟아버린다.
인간이 동물과 틀릴 것이 뭐 있을까?

색깔이 무엇으로 구성되었느냐고 묻자, 그는 색깔-갈색, 검은색, 흰색-은 보는 이의 눈에 있는 것이지 대상 자체의 고유한 것이 아니며, 그것은 고통이 바늘 자체에 있지 않고 바늘에 찔리는 사람이 느끼는 것과 같다고 설명했다. p83

인간은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것으로 섣부른 판단을 하고 만다. 그리고 피의 강을 만들고야, 건너서는 안될 것이라 돌아선다.
그리고 어느 순간 보면 똑같은 과오를 또다시 만들고야 만다.

우리는 이제 인종차별이라든지, 인종청소라든지, 인간을 인간취급하지 않는 모든 일들에 분노한다.
그것이 분노할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그들의 묘지'를 밟고 서야 배웠다.
하지만 역시, 우리는 바로 나에게도 존재하는 분명한 '차별'들을 알고 있다. 

옥타비안은 '자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한번도 가져보지 못했기에.
'자유'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자유롭고 싶다'는 '본능'으로 그 집에서 도망쳤다.

 
책을 읽으며 이성이 우리를 피흘리게 했다면, 본능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절대적이라 믿고 있는 것들이, 사실 다른 누군가를 피흘리게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으로, 책은 슬프고도 아름다웠다.

 
우리 자신의 땅에서, 우리 자신의 가게에서, 우리 자신의 부두에서 일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이 아량과 공명정대함을, 이성과 미덕을 함양하기 위해 사랑으로 빚어진 존재라는 증거를 마침내 찾을 수 있음을, 또 정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인간의 완벽성을 함께 추구할 수 있다는 사실도 이해했다. p87

 STRANGE FRUIT
(이상한 열매) 


Southern trees bear strange fruit,
남쪽지방에 있는 나무들은 이상한 열매를 맺지요.
Blood on the leaves and blood at the root,
나뭇맆에도 피가 있고 뿌리쪽에도 피가맺히지요.
Black bodies swinging in the southern breeze,
남부의 산들바람을 맞으며 검은 몸들이 한들거리지요.
Strange fruit hanging from the poplar trees.
포플라가로수에 이상한 열매가 매달려있죠.

Pastoral scene of the gallant south,
장대한 남부의 목가적인 정경에 어울리지 않게시리.
The bulging eyes and the twisted mouth,
튀어나온 눈에 혀가 비틀린 열매가 말이죠.
Scent of magnolias, sweet and fresh,
산뜻하고 달콤한 목련향기가 불어온 다음에는
Then the sudden smell of burning flesh.
살이 타는 냄새가 진동합니다.
Here is fruit for the crows to pluck,
제거해야 할 흑인들을 위한 열매입니다.
For the rain to gather, for the wind to suck,
모으려면 비가, 마시려면 바람이 필요한 열매이지요.
For the sun to rot, for the trees to drop,
썩게하려면 태양이, 떨구려면 나무가 필요한 열매이죠.
Here is a strange and bitter crop.
여기 이자리에 이상한 그런데 맛이 쓴 열매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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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꽃 이야기 꽃 1
박용성 지음 / 살림터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등이 굽은 노인이 길가에 서서 지나는 행인에게 꽃을 한송이 씩 나눠 줍니다.

노인의 옷은 낡아 소매끝이 해지고, 여기저기 기워져 있습니다.

꽃을 나눠주며 고개를 숙이는 노인의 굽은 등은 더욱 굽어 보였습니다.

쭈글쭈글한 노인의 손에 의해 노란색의 이름모를 꽃들이 행인들의 손에 들렸습니다.

어떤 행인은 노인의 손을 피해 제 갈길로 달아나 버렸습니다.

어떤 행인은 무심히 꽃을 받고 주머니에 꾹 쑤셔넣어 버렸습니다.

어떤 행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꽃을 받고는 저 만치 걸어가, 모른 척 꽃을 바닥에 버렸습니다.

어떤 행인은 꽃을 받아 향기를 맡으며 미소지었습니다.

어떤 행인은 꽃을 조심히 들고 연인에게 달려갔습니다.

어떤 행인은 꽃을 소중히 집까지 들고가 꽃병에 꽃아 두었습니다.

어떤 행인은 꽃을 나눠주는 노인의 옆에 서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가끔 나를 위한 꽃을 사고는 합니다.

비싸고 좋은 꽃일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향기가 있고, 내가 미소지을 수 있고, 그것으로 행복할 수 있으면 됩니다.

나는 뜬금없이 친구들에게 꽃을 선물하고는 합니다.

그 꽃으로 친구가 웃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내 앞에 한 송이 이름모를 꽃이 피어있습니다.

그 꽃을 보고 느끼는 감정은 모두 다를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주관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송이 꽃을 두고, 사람들이 취하는 행동은 모두 다릅니다.

한 송이 꽃을 두고, 한 사람이 취하는 행동도 때와 장소에 따라 다릅니다.

 

오늘 당신이 받은 꽃의 이름은 '이야기 꽃'입니다.

당신은 살아오면서 무수히 많은 '이야기 꽃'을 선물 받았습니다.

그 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행동을 취하냐는 당신의 몫입니다.

 

여기 놓인 '이야기 꽃'을 손에 들고, 나는 '느끼고 생각하는 법'을 읽어 냈습니다.

 

어떠한 사물도 정해진 이치는 없습니다. 단지 더 잘 느끼고 더 많이 생각하는 것만이 좀 더 옳고 바른 길로 향할 수 있을 뿐입니다.

너에게 바른 길이 꼭 나에게 바른 길이란 법도 없습니다.

 

히틀러는 자신의 삶이 옳고 바른 길이었다고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우리 나라를 침략하고 수탈한 일제는 그들이 정의롭다고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이 사람을 천재로 만듭니까?"

"알아보는 능력."

"무엇을 알아본다는 말씀입니까?"

"애벌레 안에서 나비를, 알 안에서 독수리를, 이기적인 인간 안에서 성인을."p23

 

우리는 더 바른 삶을 살기 위해 생각하고, 느끼고, 깨달음을 찾습니다.

 

그 길 위에는 무수히 많은 꽃들이 피어있습니다.

때로는 누군가 와서 내게 꽃을 건내 줄 지도 모릅니다.

그 꽃에 가시가 가득할 수도 있습니다. 그 꽃에 독이 가득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꽃들 가운데 가장 그윽한 향기와 가장 아름다운 빛을 찾아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감옥과 수도원의 차이란 사람들이 불평하느냐 아니면 감사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랍니다. p241

 

아름다움을 어떻게 아름답다 볼 수 있고, 그것이 어떻게 진정한 아름다움이라 알 수 있을까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이미 내 안에 있는 아름다움이 '나의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이제 그것을 받아 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당신 주위에 무수히 피어 있는 꽃들을 둘러 보기만 하면 됩니다.

 

시중에는 많은 지침서들이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그 지침서들보다 더 많은 이야기들을 들으며 자라왔습니다.

 

여기 당신에게 꽃을 건내는 노인이 있습니다. 그 꽃의 이름은 '이야기 꽃'입니다. 

그 꽃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도, 감동하게 만드는 것도, 더 많은 꽃들로 피어나게 하는 것도 당신의 몫입니다. 

 

당신의 길에 피어있는 무수히 많은 꽃.

자! 당신의 꽃은 어떤 것입니까?

 

"성장은 점차로 이루어지지만 깨달음은 순간적인 것"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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