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의 섬 - 1921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아나톨 프랑스 지음, 김우영 옮김 / 다른우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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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의 섬]




뒤뚱거리며 걷는 펭귄의 짧은 다리보다도, 얕은 진실을 가진 인간의 역사.

과연 우리가 알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이 진실일까?

나는 진실을 믿지 않는다.

프랑스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뮈세는 ‘이 세상에서 나에게 남은 유일한 진실은, 내가 가끔 울었다는 것뿐이다’라고 말했다.

나의 삶에서 진실은 무엇일까? 개인의 역사에도 진실은 그 희소성의 유별(有別)을 따로 말할 것이 없다.




요즘 뉴스를 보면 근, 현대사 교과서 문제로 떠들썩하다. 어느 것이 진실한 역사인지, 갑론을박, 아니, 그 이전에 정권에 따라 문제시 되는 역사의 가변성.




역사는 후대 사람들의 의해 평가받지만, 현시점의 승리자에 의해 기록된다.




모든 민족의 역사는 범죄와 가난 그리고 광기의 연속이다. (p13)




얼마 전부터 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조금씩 다시 읽고 있다. 대충 읽는 것이 아니라, 꼼꼼하게 살펴가며 읽고 있는 중이다. ‘광기의 역사’를 보며 느꼈던 것은, 사람들은 진실을 감추기 위해,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진실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한 사람들에 의해, 전쟁이 벌어지고, 피와 뼈의 살육이 가행되며, 그 모든 것을 광기 속에 몰아넣고, 마녀재판을 통해, 승리자의 거짓을 유지시켜 나간다.




당신은 역사를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믿는다고도, 믿지 않는다고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역사는 그런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탄생에 대해, 그 누구도 증명할 수 없는, 창조설과 진화설이 대립 속에 균형을 이뤄 가는 것과 같이.




대립, 그렇다, 진실과 거짓, 승리자와 패배자, 대립 속에 역사는 피와 뼈의 산을 쌓았고, 그 위에 문명이란 화려한 포장지를 씌워놓은 것.




<펭귄의 섬>을 읽으며, ‘와! 이 작가는 정말 인간에 대해 부정적이구나.’라고 중얼거렸다.  진실을 볼 수 없는 신의 대행자, 그의 실수로 인해 생겨난 펭귀니. 그들은 처음부터 진실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태어나지 못했다.

신의 지팡이는 탁상공론에 불과했고, 악마의 숨결은 날숨보다 빠르게 흡수되었다.




일단 옷을 걸치면 도덕에 얽매이게 되고, 결국 거만하고 위선적이며 잔인한 습성을 키우게 될 텐데요. (p71)




도덕은 더 이상 진실을 유지시켜 주지 못한다. 아니, 그것은 오히려 악덕을 감싸주는 질 좋은 의복이 된다. 책에서 말한 ‘옷’은 마치 ‘선악과’와 같았다. 선악과를 입에 문 펭귀니는 원죄의 피도 없이 빠르게 타락할 뿐이다.




책은, 그리고, 그저 타락과 자연에서 멀어지는 펭귀니를 관조할 뿐이었다. 자연 속에서 평화롭고 욕심 없이 살던 펭귄의 모습은 더 이상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다.

욕망과 욕심과 이윤, 권력, 실리주의에 편승한 펭귀니 역사의 돛은 거센 북풍을 타고 북극의 얼음 깊은 곳에 진실을 묻어 버린다.




그가 범인이기 때문에 유죄 판결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해도 유죄 판결을 받았으니 범인인 것이지요. (p274)




펭귀니는 악마의 숨결 없이도, 거침없이 흘러간다. 더 이상 구원의 희망이 잔존하지 않은, 폭파된 도시 속으로.




1921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펭귄의 섬’. ‘낙원’이란 의미로 더 많이 쓰여 지는 ‘섬’. 하지만 ‘펭귄의 섬’에서 우리는 이미 끝을 그어놓고 달려갈 뿐이었다. ‘거짓의 낙원’




1921년이면 중국과 소련이 공산화되고, 사회주의가 그 위력을 펼치며, 한창 ‘유토피아’를 외치던 시절. 모두가 ‘유토피아’를 찾고 있을 때, 작가는 ‘반유토피아’를 통해, ‘인간의 섬’에 갇힌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려함이 아니었을까? 폭력으로 세워진 ‘섬’은 다시 그 폭력으로 가라앉을 수밖에 없다.




온 세계가 전쟁의 화마 속에 시달리고, 끝날 것 같지 않던 시간 속에서, 작가는 인간의 본성을 부정하고 만다. 작가의 눈에 인간이란 (인간의 눈에) 뒤뚱거리며 우스꽝스럽게 걷고 있는 펭귄보다 아둔하고 미개한 존재로 보였을 것이다. 때문에 잘 살고 있는 펭귄의 평화를 눈먼 진실로 파괴하고 마는.




그렇다면 ‘전쟁’의 불꽃을 더 이상 정의의 수단으로 인정하지 않는, 현대에는 어떨까? 화포의 위력보다 몇 배는 더 큰, Money의 역사함 앞에, 저항도 없이 스러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끝도 없이 이어지는 대립, 그 끝은, 책에서처럼 자멸뿐일지도 모른다. ‘펭귄의 섬’은 침몰했다. 그렇다면 ‘인간의 섬’에 남은 진실은 무엇인가? 그저 가끔 눈물 흘리며 관망할 뿐?




‘펭귄의 섬’을 손에 들고 단숨에 읽어 버렸다. 머리 속에 떠도는 많은 말들, 많은 생각들. 그리고 마지막 물음. 결국 인간은 자멸하고 말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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