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라니의 바이올린
허닝 지음, 김은신 옮김 / 자유로운상상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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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이었던가. 전쟁의 참사가 그대로 남은 골목에서 피아노를 치는 한 남자를 만났다. 유대인이란 이름 아래 고통 받아야 했던 한 인간의 고뇌를 잘 드러낸 영화 <피아니스트>를 통해서였다. 그리고 몇 년 후, 똑같이 유대인이란 이름 아래 고통 받아야 하는 바이올리니스트를 만났다. 나치를 피해 독일에서 중국 상하이로 먼 걸음을 한 리랜드 비센돌프다.
 

작가의 이력이 독특하다. 저자인 허닝은 본래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다. 그런 그가 우연한 기회에 관심을 두게 된 상하이 유대인들. 그 작은 관심에서 이 책은 탄생했다. 모두가 나라의 문을 걸어 잠그고 유대인을 내친 시기에 그들을 받아들인 중국인들. 일본에게 갖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꿋꿋이 살아나간 중국인과 유대인들의 용감한 이야기가 <멜라니의 바이올린>에 잘 녹아있다.
 

나치에 의해 딸을 잃은 비센돌프는 딸 멜라니가 자신의 생일 때 만들어준, 세상에 하나 뿐인 '멜라니의 바이올린'을 들고 중국 땅에 들어선다. 유명 바이올리니스트의 자존심을 버리고 적당히 일본인과 타협해 살아갈 수도 있던 그. 그러나 선택은 달랐다. 그는 시종일관 자신의 줏대를 지키며 유대인의 자긍심을 지켜나간다. 
 

이야기는 그가 중국인 자매 루샤오넨, 루양 남매를 만나고 또 다른 바이올리니스트 정치인인 일본인 야스히로를 만나며 급류를 탄다. 반일인물로 찍혀 죽음 당한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두 남매와 친일인물이 되기를 스스로 포기하는 비센돌프는 서로를 가족과 같이 생각하며 힘든 시간을 이겨낸다. 한편 비센돌프의 바이올린을 노리며 어떻게든 그를 이기고자 하는 야스히로. 그러나 바이올리니스트로서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자긍심, 가치에서도 그는 비센돌프를 이기지 못한다.
 

저자는 비센돌프와 야스히로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표현한다. 유대인에 대한 생각, 강압적이고 제멋대로인 일본인에 대한 비판들을. 권력을 가진 강자 앞에서 한 없이 약자일 수 밖에 없는 비센돌프지만, 어느 대화에서도 자신의 뜻을 낮추지 않는 그의 모습은 용감하다. 때론 무모해 보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의지를 믿고 몸소 표현할 수 있는 그의 모습에 진정한 용기란 이런 것이란 생각이 든다. 


강자에 대한 약자의 소신 있는 용기는 비센돌프 뿐 아니라 루샤오넨, 루양 남매를 비롯한 다른 인물들을 통해서도 가감 없이 보여진다. 자신의 믿음을 위해 어떤 어려운 상황도 이겨내는 용기, 믿음이 있기에 당당할 수 있는 자세. 그런 그들의 용기가 다른 유대인과 중국인에게도 전해진 걸까. 처음엔 나약한 그들이지만 점차 대응할 용기를 얻는다. 결국 얻어낸 자유. 물론 전쟁의 종식은 그들의 힘이 아니었지만 힘든 시간을 이겨낸 그들의 의지와 용기가 있었기에 다시 웃는 모습으로 만날 수 있었으리라.


주제도 소재도 이야기를 풀어내는 능력도 괜찮은 소설이었다. 그러나 어딘가 2% 부족하단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오래 들여다봤지만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곧바로 전해지지 않는 막연한 느낌. 감동은 있지만 절절하게 가슴까지 파고들지 못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기억하리라, 암울한 시간을 이겨낸 그들의 용기를. 머리 속 어딘가에서 루양과 비센돌프가 함께 켜는 '그날'의 변주곡이 들리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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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미터만 더 뛰어봐! - 한 달 벌어 한 달 먹고사는 당신을 위한 인생의 반전
김영식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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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 심장이 뛰는 책? 흥! 소리가 먼저 나왔다. 자기 계발서가 판을 치는 시대 또 하나의 계발서가 추가되었나 보다 싶었다. 그래도 제목은 좀 신선하네, 라며 집어 든 책은 그러나 정말 심장이 뛰는 책이었다. 과거가 얼마나 힘들었건 지금 성공한 그의 모습을 보며 뻔한 소리나 하겠거니 싶었는데 있는 건 있는 대로 다 내보이며 솔직하게 풀어내는 이야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뛰게 하는데 충분해 보인다.
 

천호식품의 오너인 김영식 회장의 이야기다. 한 때 부산에서 돈 많기로 100위 안에 들었던 그가 쫄딱 망하고 오뚝이 근성으로 다시 살아나 지금의 그가 되기까지의 절절한 삶의 이야기들이 궁상맞지 않게 쓰여있다. 아니, 궁상맞은 부분까지 솔직하게 고백되어있다. 정말 찢어지게 힘들었던 시간도 그대로 담겨있다. 그러나 그 시절을 이야기하는 그의 어투는 담담하다. 지금의 성공을 이야기하는 어투 또한 담담하다. 괜한 겸손함이라도 표현했으면 얼씨구, 놀구있네 라는 소리가 나왔을지 모르지만. 김영식이란 사람, 참 괜찮은 사람이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난 이런 류의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미 성공한 사람 입에서는 무슨 소린들 틀린 소리가 나오겠냐는 심히 삐딱하게 배배 꼬인 심사 때문에. 그렇기에 이 책 또한 처음에는 찔끔 읽다 덮어두고 다시 찔끔 보고를 반복했다. 그런데 1/3쯤 지났을까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빨라지더니 휙휙 넘어가기 시작한다. 정말 지금의 자신을 위해 발로 뛰고 끊임없이 생각하고 실천하고 있는 모습이 글을 통해서 지면을 넘어 전해진다. 
 

인상적이었던 말을 적으려 보니 너무 많아 요약하기조차 쉽지 않다. 그만큼 성공한 사람 이야기라면 질색하는 나에게 한 마디 한 마디가 절절히 와 닿았다. 아, 이렇게 해봐야지. 저렇게 하면 성공하는 사람의 모습이 되겠구나. 난 이런 점이 부족했구나. 속으로 끊임없이 피드백이 오간다. 단순히 지식을 머리에 집어넣는 게 아니라 정말 김영식 회장이 내 앞에 앉아 이래 저래 이야기해주는 기분이다. 그렇게 때론 혼나는 기분으로 나 자신의 약점 목록을 하나하나 머리에 집어넣는다.
 

아마 점점 편해지는 세상에 그저 적당히 편히 살다 가면 되지,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비단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적당주의가 팽배한 사회에 사실 이렇게 열정적이고 옹고집인 김영식 회장이 이.상.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이상한 것이라면 백 번이라도 닮고 싶은 욕심이다. 책의 서두에서 그도 말한다. 성공하고 싶다면 성공한 사람을 벤처마킹 하라고. 그래서 나는 따라 하련다. 그가 알려준 비법들을. 
 

그 중에서도 알짜배기 포인트들을 콕콕 집어 나 혼자만 날름 먹으려다 슬쩍 공유해 볼까 한다. 하나, 약속 시간 15분전 나는 어디 있는가? 당신의 대답은 무엇인가. 내 경우 대부분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다. 시간에 맞을까를 고민하며 지하철에 있던가, 약속장소로 열심히 걸어가고 있는 그런 시간들. 성공하기 전에도 성공한 후에도 변함없이 15분 전엔 약속 장소에서 매무새를 가다듬는다는 그의 말에 고개를 팍 숙이도록 부끄러웠다. 사실 10분만 일찍 나가면 되는데 왜 그게 그리 어려운 건지. 결국 사람이란 습관이란 말이 맞는가 보다. 책에 책갈피를 끼워두고 핸드폰을 꺼낸다. 바탕화면 글귀에 적는다. '약속시간 15분전 나는 약속장소에 있는다.'라고.
 

둘, 문자를 써라. 난 귀차니즘의 여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온몸에 귀차니즘을 덕지덕지 붙이고 다닌다. 귀찮아서 이 것도 안하고, 귀찮아서 저 것도 안 한다. 그러다 보니 해야 할 것, 하고 싶은 것들을 미루는 게 쌓여서 1년치다. 개중에는 온 문자를 대충 보고 있다 써야지 라며 답변을 미루는 습관도 있다. 그러나 결국 인생사 의사소통이 길인 것을. 나는 스스로 귀찮음에 빠져 내 주위의 사람을 멀리멀리 떨어뜨리고 있었다. 사소한 문자 하나로 이어지는 정. 비록 몇 자 텍스트에 지나지 않지만 그 작은 행동 하나가 인간관계의 폭과 질을 넓히는 큰 한 발짝임을 새삼 느꼈다. 
 

그 밖에도 너무 많은 알짜배기 정보들이 있다. 아마 말미에서 그가 밝혔듯 이 작은 책 하나에 다 담지 못한 정보들은 그의 뚝심카페에도 소복이 쌓여있겠지. 지금 이 순간 가볼까 하다 나중에 가보지 하며 다시 미루는 내 모습이 보인다. 생각 후 행동하라? 아니다. 물론 무대뽀 행동만이 전부라는 건 아니다. 그러나 생각만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다. 김영식 회장을 지금의 자리까지 끌어올린 건 그의 생각이 아닌 그의 발이었다. 그의 입이었고, 그의 손이었다. 참 부지런한 사람, 참 곧은 사람, 배울 게 많은 사람. 그가 바로 천호식품의 오너 김영식이다. 


지금이 힘들어 주저앉는 그대와 나, 그저 적당히 살면 되지 라며 주저앉는 그대와 나에게 진정 필요한 책이다. 10미터 더 뛰기가 힘들면 1미터라도 뛰어보자. 작심삼일도 좋다. 삼 일이라도 해라. 그 삼 일이 모이고, 1미터가 모여 100일, 1000일이 되고, 42.195km의 마라톤 코스가 된다. 그저 그런 줄 알고 만나지도 않을 법 했던 이 책이 나에게 새로운 멘토가 되어주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아마 당신에게도 그러리라. 내가 얻은 그 아하! 를 부디 당신도 심장으로 느껴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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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책들의 도서관
알렉산더 페히만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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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평균 70살을 산다고 가정하고 하루에 한 권씩 책을 읽는다고 계산해도 평생 읽을 수 있는 책의 수는 채 3만권이 되지 않는다. 물론 이 세상에는 그 보다 많은 책을 읽는 사람들도 있다. 훑어보기든 줄거리 읽기든 약식으로 읽는 것을 포함하면 더 많은 책을 읽는 사람도 있을 지 모른다. 혹자는 몇만 권이 뉘 집 개 이름이냐며 노려볼지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책이란 말 그대로 셀 수 없이 많았으며, 기술이 발달하고 지식인이 늘어난 지금은 하루에도 수백 권의 신작이 쏟아져 나온다.
 

그 많은 책들 중 불과 50년이 지난 후 계속 읽히고 있는 책은 얼마나 될까. 결국 사람의 손을 통해 나온 대부분 책들은 잊혀진 책들의 도서관에 들어간다. 잊혀진 책들의 도서관? 지금부터 말하려는 사라진 책들의 도서관의 한 분관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만들어낸 수없이 많은 책보다 더 많은 양의 기록과 사상과 인물을 담고 있는 특.별.한 도서관이다.
 

사라진 책들의 도서관이 어디에 있는지는 잘 모른다. 다만 책 겉장을 넘기자마자 누군가 우리를 맞이한다. 아하, 이 도서관이 말단 사서다. 우리를 위해 특별히 안내인으로서 도서관의 곳곳을 관람시켜주신단다. 아직도 도통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분들을 위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말이 여기 있다. "실날같은 존재의 개연성만 있어도 그 책은 얼마든지 실재한다고 볼 수 있다." 자, 이제 도서관 말단 사서를 따라 실날 같은 개연성을 타고 사라진 책들의 도서관에 안착한 이야기들을 들어볼까.

 
아, 이미 이 도서관을 한 바퀴 돌아본 사람으로서 충고 한 마디를 하자면, 이 곳에 소개되는 저자들과 책들은 일반인들이 아는 사람이나 들어봄 직한 이야기도 있지만 대부분은 ?(물음표)를 달고 다니는 내용들이다. 사람이란 아무래도 익숙한 것들에 환호하는 법. 그렇다고 졸지는 말 것. 그러면 그 안에 들어있는 정말 보석 같은 이야기를 놓칠 수 있으니.

 
이야기가 시작된다. 유명한 작가의 뒷이야기가 넘칠 듯 흘러나온다. 자신의 글에 만족하지 못하고, 부끄럽다고 생각해 스스로 불태우는 작가, 원하는 작품이지만 불의의 사고로 잃어버린 작품들, 그저 이리저리 떠돌다 어디론가 실종되어버린 작품, 이야기가 생각난 순간 준비되지 못한 도구들 때문에 잊혀져 간 이야기, 죽음과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머리에 넣어둔 채 떠나간 글들. 그렇게 많은 이야기들이 우리의 곁으로 채 오기도 전 사라진 책들의 도서관 곳곳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무엇보다 매력적인 건 <피할 수 없는 운명, 지하 서고> 이야기였다. 도서관의 가장 큰 서고 중 한 자리를 차지한 이 곳에는 남몰래 이야기를 쓴 사람들의 집필 혹은 집필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는 곳이다. 아니, 서고라기 보단 한 번 내려가기조차 무시무시한 어두컴컴한 지하실. 어쩌면 우리가 때때로 자신만만하게 쓰고 그러나 소심하게 꾸깃거려 쓰레기통으로 내던지는 종이 쪼가리의 글들도 하나하나 모여 이 곳에 소복소복이 쌓여있을지 모를 일이다. 


이제 이 도서관에 대해 슬슬 감이 오는가. 사실 도서관을 막 한 바퀴 돌아본 지금의 상태는 몽롱하다는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겠다. 마치 상상의 꿈 속을 걸어온 것 같지만 분명 현실에 발 붙였던 이야기들. 이 도서관을 찾아가 보고 싶다는 괜한 욕심이 든다. 카프카의 따뜻한 이야기, 바이런의 별 것 아닐 회고록, 모래 속으로 사라진 카셈 이스마일의 도서관을. 오늘 밤 꿈에 도서관 말단 사서가 나를 맞이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괜한 상상을 하며 바통을 당신에게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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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슬럼버 - 영화 <골든슬럼버> 원작 소설 Isaka Kotaro Collection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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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at's 감시사회.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 조지 오웰은 <1984>를 통해 개인이 파멸되는 국가체계의 위험성을 고발했다. 정말 그런 시대가 올까 싶었던 과거가 지나고 소설 속 세계는 현실로 다가왔다. 좀 더 자유롭고 인간적으로 포장되었지만. 국가라는 권력으로, 국민의 안전이란 명목 아래 자행되는 감시 체계들과 그 권력 유지를 위한 한 사람 희생시키기는 여전하다.

 
조지 오웰 후 60여 년, 여기 국가에 의해 범인으로 만들어진 쫓기는 자가 있다. 비틀즈의 골든슬럼버를 흥얼거리며 스타일 좀 구겨도 일단 도망가고 보는 이 남자 아오야기 마사하루. 이사카 코타로는 또 한번의 거대한 희생자를 만들어냈다.
 

어느 날 센다이 시내에서 퍼레이드 중이던 총리가 폭탄에 의해 죽는다. 그리고 이유 없이 쫓기는 아오야기 마사하루. 생각해보니 지난 과거 그에게는 이상한 일들이 '좀' 있었다. 온 도시가 자신을 노리며 좁혀오는 사이, 그는 어떻게 무사히 이 난관을 헤쳐나갈 것인가. 그의 현재와 과거, 그를 돕는 사람들의 시선이 실타래처럼 엉킨 가운데 서서히 그 베일이 벗겨진다.
 

소설의 구성이 다소 남다르다. 사건의 시작, 사건의 시청자, 사건 20년 뒤, 사건, 사건 석 달 뒤로 나누어진 매뉴얼은 같은 사건을 바라보는 몇 가지 관점을 소개해준다. 범인으로 몰린 자를 아는 사람의 눈, 완벽한 제 3자의 눈, 과거의 사건을 보는 눈, 그리고 쫓기는 자의 눈. 같은 사건을 바라보는 데 어쩜 이렇게 다른 양상이 나타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다 문득 자신을 바라본다. 아, 사소한 일일지라도 나의 관점과 3자로서의 관점은 얼마나 다르던가. 하물며 사회적 이슈가 된 일이야 두 말 하면 잔소리다.
 

사건의 중심에 '내'가 있는 것과, 사건의 밖에서 바라보는 '3자'가 되는 것은 분명 다른 일이다. 얄궂게 내 편이 되어 주지않는 사람들을 비판하지만 또한 안다. 같은 상황 반대편에 있다면 '나' 또한 지금의 그들과 같으리란 것을. 그렇기에 사건 속 쫓기는 자인 아오야기의 생각은 곧바르다. 무조건 세상을 미워할 법도 한데, 그저 굳은 의지로 도망다닌다. 조금의 도움에 감사하고, 조금의 배신에 아, 괜찮죠 라고 말한다. 뭐, 그런 천성이 결국에는 그를 삶으로 인도한 것이겠지만.

 
이 책은 상당히 직설적으로 현대 사회의 문제를 고발한다. 국가 권력이 어디까지 개인의 자유와 사생활을 침범할 수 있는가에 대한 윤리문제, 더 이상 진실이 아닌 이야깃거리를 파는 방송사, 국가적 음모론을 위한 개인의 희생. 분명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이루어지면 안 되는 일들이지만 천연덕스럽게 상황은 모든 것을 합리화시킨다. "상황이 이러니까." 한 마디면 모든 것이 ok이다. 길거리에서 총을 난사하는 것도, 민간인을 패는 것도. 국가란 이미 국민을 위함이 아닌 권력 지향점의 정점일 뿐이다.

 
그러나 그런 무시무시한 국가에도 여전히 정을 느끼고, 사람을 생각하는 국민이 있다. 다행히도 이야기는 피범벅으로 끝나지 않고, 책을 읽는 독자들 또한 공포에 전율하지 않고 역시 사람이 이기는구나, 라며 담백하게 책을 덮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해서 다행이다, 를 되뇌며 덮어버리면 조금 곤란하다. 어쨌든 이사카 코타로는 우리에게 이거 좀 문제 있죠, 라며 대놓고 알려준 셈이니까. 그러니 책을 책장에 돌려놓기 전에 한 번 가만히 쳐다보자. 아마 피해자일 듯한 표지 속 그의 얼굴을. 지금 편안히 앉아 컴퓨터를 만지작거리는 당신이 다음 피해자가 될 지 모르는 일이다. 표지 속 남자의 눈물, 잊고 싶겠지만 현대를 사는 우리를 위한 또 하나의 경고이자, 자화상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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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소금사막에 비가 내리면 - 테오에세이
테오 글.사진 / 삼성출판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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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어느 곳에는 소금으로만 이루어진 사막이 있대요. 끝없이 하얀 소금만이 펼쳐진. 봐도 봐도, 눈 씻고 다시 봐도 하얀 소금뿐이 안 보이는 그런 사막이 있대요. 그 곳에 비가 내리면, 호수가 된대요. 그리고 하늘 위로 우리는 지나갈 수 있대요. 어때요, 멋지지 않아요? 테오의 조근조근한 말에 이끌려 여행한 볼리비아. 그리고 소금사막. 당신도 가보고 싶지 않나요?
 

여행 사진 에세이집이다. 여기까지 설명한다면 그간의 다른 책들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외국 여행을 다녀와서, 사진 좀 찍고, 글 좀 쓰는 사람이 전해주는 여행 이야기. 조금은 시샘 어린 대리 만족의 기분으로 읽어 내려가는 그런 책들. 그런데 다르다. 어떻게 다르냐고?

 
하나, 보는 법이 다르다.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베개 하나가 필요하다. 편하게 소파든 침대든 몸을 깊숙이 뉘여 앉아 베개를 무릎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는 가로로 책을 올려놓고 하나 하나 들춰가며 읽는 거다. 둘, 말투가 다르다. 대부분 책에서는 -다, 로 끝나지만 테오는 정중하고, 다정다감하고, 착하다. 이제 막 친해져가는 사람이 바로 앞에서 이야기해주듯 -합니다, 와 -요, 로 끝난다. 왠지 책을 읽으며 대답해야 할 것 같다. 아, 네, 그렇군요, 라면서.
 

테오의 두 번째 에세이인 <당신의 소금사막에 비가 내리면>은 테오의 볼리비아 여행기다. 우리보다 객관적으로 못 살지만 주관적으로 마음이 참 풍요로운 나라 볼리비아의 사람들 이야기다. 테오가 만난 볼리비아의 사람들은 친절하고, 현재 자신의 모습을 사랑한다. "지금 이 상태가 좋아요" 라면서 변화를 이해하지 않는다. 이미 그들의 삶은 너무나 자연스러우므로. 그들이라고 왜 불평이 없겠냐 만은 그럼에도 좋다고 말할 수 있는 모습에 참 부끄러웠다. 그들보다 많이 가지고서도 끊임없이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해 불평하고 아쉬워했기에.
 

테오의 여행은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며 미래를 깨우치는 잉카 예언술에서 시작한다. 제멋대로 녹아 내린 은을 보며 테오는 어떤 미래를 봤을까. 내가 만약 그 자리에 있었다면 아무 것도 아닌 은 덩어리를 보며 내 무엇을 볼 수 있었을까. 무엇이든 말해주는 걸 듣고 적기에 바쁜 우리는 스스로 미래를 꾸려나가는 힘조차 서서히 녹아 내리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목숨 걸고 지나가는 죽음의 도로, 아무것도 아니었던 꼬추나 폭포를 보며 테오는 서서히 깨닫는다. 여행의 의미를 하나 둘 찾아나간다. 아니 오히려 그런 의미들 따위 하나 하나 버리고 왔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볼리비아의 많은 것들은 그저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법을 알려주고 있으니 말이다. 어린 소녀들 그리고 소년. 행복해야 할 상황이 아님에도 그들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 피어 오른다. 무엇이 그렇게 만드는 것일까. 우리도 그 넓은 자연 속에 내던져지면 조금씩 도시사막의 때를 벗겨내고 맑은 웃음을 찾을 수 있을까.

 
분명 이 책의 주인공은 우유니 소금사막이다. 이 책을 본 다른 누구들과 마찬가지로 그 신비로움과 평화로움에 놀랐다.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의 주인공은 우유니 소금사막이 아니었다. 긴 여행 동안 마주친 사람들. 그들이 바로 여행 그 자체였고, 테오 에세이의 주인공이었다. 새로운 지명들, 이름들을 만날 때마다 입으로 소리내어 따라 불러 보았다. 다 외우진 못하겠지만 문득문득 떠오를 것이다. 더운 여름 날, 기분 나쁜 날, 내가 한 없이 싫어지는 날. 그 모든 날들에 그들은 내 삶을 돌아보는 녹아 내린 은이 되리라. 

 
끊임없이 사람과 소통하는 테오. 그가 이 곳, 볼리비아와 우유니 사막을 다시 찾을지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언젠가 그가 다시 찾아가는 날 소금 호텔에서 소금기 가득한 파티를 여는 날, 그에게 부탁하고 싶다.
 

테오, 나에게 초대장을 보내주세요. 당연히 응하고 말고요. 소금 호텔에서의 하룻밤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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