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 슬럼버 - 영화 <골든슬럼버> 원작 소설 Isaka Kotaro Collection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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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That's 감시사회.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 조지 오웰은 <1984>를 통해 개인이 파멸되는 국가체계의 위험성을 고발했다. 정말 그런 시대가 올까 싶었던 과거가 지나고 소설 속 세계는 현실로 다가왔다. 좀 더 자유롭고 인간적으로 포장되었지만. 국가라는 권력으로, 국민의 안전이란 명목 아래 자행되는 감시 체계들과 그 권력 유지를 위한 한 사람 희생시키기는 여전하다.

 
조지 오웰 후 60여 년, 여기 국가에 의해 범인으로 만들어진 쫓기는 자가 있다. 비틀즈의 골든슬럼버를 흥얼거리며 스타일 좀 구겨도 일단 도망가고 보는 이 남자 아오야기 마사하루. 이사카 코타로는 또 한번의 거대한 희생자를 만들어냈다.
 

어느 날 센다이 시내에서 퍼레이드 중이던 총리가 폭탄에 의해 죽는다. 그리고 이유 없이 쫓기는 아오야기 마사하루. 생각해보니 지난 과거 그에게는 이상한 일들이 '좀' 있었다. 온 도시가 자신을 노리며 좁혀오는 사이, 그는 어떻게 무사히 이 난관을 헤쳐나갈 것인가. 그의 현재와 과거, 그를 돕는 사람들의 시선이 실타래처럼 엉킨 가운데 서서히 그 베일이 벗겨진다.
 

소설의 구성이 다소 남다르다. 사건의 시작, 사건의 시청자, 사건 20년 뒤, 사건, 사건 석 달 뒤로 나누어진 매뉴얼은 같은 사건을 바라보는 몇 가지 관점을 소개해준다. 범인으로 몰린 자를 아는 사람의 눈, 완벽한 제 3자의 눈, 과거의 사건을 보는 눈, 그리고 쫓기는 자의 눈. 같은 사건을 바라보는 데 어쩜 이렇게 다른 양상이 나타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다 문득 자신을 바라본다. 아, 사소한 일일지라도 나의 관점과 3자로서의 관점은 얼마나 다르던가. 하물며 사회적 이슈가 된 일이야 두 말 하면 잔소리다.
 

사건의 중심에 '내'가 있는 것과, 사건의 밖에서 바라보는 '3자'가 되는 것은 분명 다른 일이다. 얄궂게 내 편이 되어 주지않는 사람들을 비판하지만 또한 안다. 같은 상황 반대편에 있다면 '나' 또한 지금의 그들과 같으리란 것을. 그렇기에 사건 속 쫓기는 자인 아오야기의 생각은 곧바르다. 무조건 세상을 미워할 법도 한데, 그저 굳은 의지로 도망다닌다. 조금의 도움에 감사하고, 조금의 배신에 아, 괜찮죠 라고 말한다. 뭐, 그런 천성이 결국에는 그를 삶으로 인도한 것이겠지만.

 
이 책은 상당히 직설적으로 현대 사회의 문제를 고발한다. 국가 권력이 어디까지 개인의 자유와 사생활을 침범할 수 있는가에 대한 윤리문제, 더 이상 진실이 아닌 이야깃거리를 파는 방송사, 국가적 음모론을 위한 개인의 희생. 분명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이루어지면 안 되는 일들이지만 천연덕스럽게 상황은 모든 것을 합리화시킨다. "상황이 이러니까." 한 마디면 모든 것이 ok이다. 길거리에서 총을 난사하는 것도, 민간인을 패는 것도. 국가란 이미 국민을 위함이 아닌 권력 지향점의 정점일 뿐이다.

 
그러나 그런 무시무시한 국가에도 여전히 정을 느끼고, 사람을 생각하는 국민이 있다. 다행히도 이야기는 피범벅으로 끝나지 않고, 책을 읽는 독자들 또한 공포에 전율하지 않고 역시 사람이 이기는구나, 라며 담백하게 책을 덮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해서 다행이다, 를 되뇌며 덮어버리면 조금 곤란하다. 어쨌든 이사카 코타로는 우리에게 이거 좀 문제 있죠, 라며 대놓고 알려준 셈이니까. 그러니 책을 책장에 돌려놓기 전에 한 번 가만히 쳐다보자. 아마 피해자일 듯한 표지 속 그의 얼굴을. 지금 편안히 앉아 컴퓨터를 만지작거리는 당신이 다음 피해자가 될 지 모르는 일이다. 표지 속 남자의 눈물, 잊고 싶겠지만 현대를 사는 우리를 위한 또 하나의 경고이자, 자화상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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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소금사막에 비가 내리면 - 테오에세이
테오 글.사진 / 삼성출판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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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세상 어느 곳에는 소금으로만 이루어진 사막이 있대요. 끝없이 하얀 소금만이 펼쳐진. 봐도 봐도, 눈 씻고 다시 봐도 하얀 소금뿐이 안 보이는 그런 사막이 있대요. 그 곳에 비가 내리면, 호수가 된대요. 그리고 하늘 위로 우리는 지나갈 수 있대요. 어때요, 멋지지 않아요? 테오의 조근조근한 말에 이끌려 여행한 볼리비아. 그리고 소금사막. 당신도 가보고 싶지 않나요?
 

여행 사진 에세이집이다. 여기까지 설명한다면 그간의 다른 책들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외국 여행을 다녀와서, 사진 좀 찍고, 글 좀 쓰는 사람이 전해주는 여행 이야기. 조금은 시샘 어린 대리 만족의 기분으로 읽어 내려가는 그런 책들. 그런데 다르다. 어떻게 다르냐고?

 
하나, 보는 법이 다르다.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베개 하나가 필요하다. 편하게 소파든 침대든 몸을 깊숙이 뉘여 앉아 베개를 무릎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는 가로로 책을 올려놓고 하나 하나 들춰가며 읽는 거다. 둘, 말투가 다르다. 대부분 책에서는 -다, 로 끝나지만 테오는 정중하고, 다정다감하고, 착하다. 이제 막 친해져가는 사람이 바로 앞에서 이야기해주듯 -합니다, 와 -요, 로 끝난다. 왠지 책을 읽으며 대답해야 할 것 같다. 아, 네, 그렇군요, 라면서.
 

테오의 두 번째 에세이인 <당신의 소금사막에 비가 내리면>은 테오의 볼리비아 여행기다. 우리보다 객관적으로 못 살지만 주관적으로 마음이 참 풍요로운 나라 볼리비아의 사람들 이야기다. 테오가 만난 볼리비아의 사람들은 친절하고, 현재 자신의 모습을 사랑한다. "지금 이 상태가 좋아요" 라면서 변화를 이해하지 않는다. 이미 그들의 삶은 너무나 자연스러우므로. 그들이라고 왜 불평이 없겠냐 만은 그럼에도 좋다고 말할 수 있는 모습에 참 부끄러웠다. 그들보다 많이 가지고서도 끊임없이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해 불평하고 아쉬워했기에.
 

테오의 여행은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며 미래를 깨우치는 잉카 예언술에서 시작한다. 제멋대로 녹아 내린 은을 보며 테오는 어떤 미래를 봤을까. 내가 만약 그 자리에 있었다면 아무 것도 아닌 은 덩어리를 보며 내 무엇을 볼 수 있었을까. 무엇이든 말해주는 걸 듣고 적기에 바쁜 우리는 스스로 미래를 꾸려나가는 힘조차 서서히 녹아 내리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목숨 걸고 지나가는 죽음의 도로, 아무것도 아니었던 꼬추나 폭포를 보며 테오는 서서히 깨닫는다. 여행의 의미를 하나 둘 찾아나간다. 아니 오히려 그런 의미들 따위 하나 하나 버리고 왔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볼리비아의 많은 것들은 그저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법을 알려주고 있으니 말이다. 어린 소녀들 그리고 소년. 행복해야 할 상황이 아님에도 그들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 피어 오른다. 무엇이 그렇게 만드는 것일까. 우리도 그 넓은 자연 속에 내던져지면 조금씩 도시사막의 때를 벗겨내고 맑은 웃음을 찾을 수 있을까.

 
분명 이 책의 주인공은 우유니 소금사막이다. 이 책을 본 다른 누구들과 마찬가지로 그 신비로움과 평화로움에 놀랐다.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의 주인공은 우유니 소금사막이 아니었다. 긴 여행 동안 마주친 사람들. 그들이 바로 여행 그 자체였고, 테오 에세이의 주인공이었다. 새로운 지명들, 이름들을 만날 때마다 입으로 소리내어 따라 불러 보았다. 다 외우진 못하겠지만 문득문득 떠오를 것이다. 더운 여름 날, 기분 나쁜 날, 내가 한 없이 싫어지는 날. 그 모든 날들에 그들은 내 삶을 돌아보는 녹아 내린 은이 되리라. 

 
끊임없이 사람과 소통하는 테오. 그가 이 곳, 볼리비아와 우유니 사막을 다시 찾을지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언젠가 그가 다시 찾아가는 날 소금 호텔에서 소금기 가득한 파티를 여는 날, 그에게 부탁하고 싶다.
 

테오, 나에게 초대장을 보내주세요. 당연히 응하고 말고요. 소금 호텔에서의 하룻밤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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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박경리 시집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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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 시절을 온전히 표현해내는 글을 보고 싶지 않아서라는 이유를 앞세우고 여태껏 만나보지 못한 토지의 작가 박경리. 얼마 전 한국문학계의 큰 별이라 일컬어지던 그 분이 돌아가셨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는 그 분의 딸이 말년 박경리 작가의 시 구절들을 묶어 펴낸 시집이다.
 

100페이지를 조금 넘는, 시집은 참 얇다. 간결하고 진실하다. 마지막 가는 길에 아무 것도 없이 빈 손으로 가시려 신건지 마지막 한 방울까지 꼭 짜내 글로 풀어놓고 가신 듯. 글에는 미련도 덧씌움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한 획에 그려낸 필체같이 한 줄 한 줄에서 마음이 전해져 온다.

 
언제나 수십 장, 수백 장의 파지를 내며 작품 하나를 완성해왔다는 박경리 작가. 그러나 이번 시집만은 그다지 고치지도, 더하지도 않고 물 흐르듯 쓰셨다는 시 구절들. 그 자연스러움이 절절히 한 편의 노래가 되어 활자로서 종이 위를 흐른다.

 
시는 크게 4파트로 나뉘어져 있다. 1_옛날의 그 집, 2_어머니, 3_가을, 4_까치설까지.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주욱 읽어나가기 시작했는데 다 읽고 한 번 휙 하니 책장을 다시 넘겨 보니 정교하게 짜여진 그룹이 아닌가 싶다. 삶의 이야기. 어머니, 할머니로 이어지는 추억의 단편들. 삶을 살아오며 느낀 이래 저래한 일들, 넉넉하고 토속적 문체로 포장했지만 그 안에 날렵한 비수를 숨긴 현대에 대한 비판까지.

 
한 번 읽을 때는 모르는 단어와 마음까지 와 닿지 못하는 구절들에 활자를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다시 들여다본다, 가만히. 여전히 알쏭달쏭한 구절 구절들이지만 어렴풋이 그림이 그려진다. 뒤로 넘어가 박경리 작가의 사진들을 또 가만히 쳐다본다. 꿈 많은 젊은 시절, 나이 드신 모습, 그럼에도 정정하게 삶을 살아가는 모습들까지. 다시 본 시 구절들이 이제는 하나의 풍경이 되어 마음을 적신다.


참 잔잔하다. 애잔하다. 그러나 통곡의 슬픔이 아니고, 늦은 깨달음도 아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생의 끝자락에서 피운 노래 꽃은 아직 어린 우리에게 조금의 교훈과 조금의 슬픔과 조금의 삶의 비밀을 전해준다. 

 
시라면 시고, 그저 풀어놓은 말이라면 풀어놓은 말이다. 이리 마음 속 말까지 풀어놓고 가시는 길은 좀 가벼우셨을까. 아니면 아직도 마음에 묻어둔 말을 채 풀어놓지 못하고 가지고 가셨을까. 그래도 이만큼이나마 우리에게 풀어놓고 가셔서 남은 우리는 어찌나 감사한지. 좋은 곳에서 좋은 말 벗 삼아 또 한 세상 사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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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원주민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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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하면 IT강국, 인터넷, 조선사업, 자동차, 반도체 등이 떠오른다. 세계 속에서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몇 십 년 전의 고생을 뒤로 하고 세련됨, 모던함으로 무장한 듯 보인다. 도심에는 아찔한 빌딩들이 그 키를 자랑하고, 못 먹는 게 아닌 안 먹는 시대가 되었다. 불과 몇 십 년간의 변화다. 
 

그런데 여기 아직 새파랗게 젊어 보이는 한 총각이 자신의 이야기라며 지난 이야기들을 슬금슬금 꺼내놓는다. 도심 속에서 밭고랑 매는 할배, 공원에서 풀 뜯는 할매 이야기로 시작하는 야그 보따리는, 그야말로 오래된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하다. 불과 30여년 전에 태어난 그의 삶이 뭐 그리 곤궁하고 어려워 이런 이야기들이 나온 걸까 싶기도 할 정도로.
 

솔직한 말로 내 삶이 그랬다면 그처럼 바르게 자라나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 같다 싶을 정도로 악 소리 나는 삶이다. 몇 십년 전으로 흘러 내려간 듯한 삶의 단편들. 도시로 나와 케이크 한 조각에 눈이 동그래지고, 2백 원 노트 값 달란 말을 못하는 삶, 말로만 듣던 누나들의 고생, 아버지의 폭정 등등등. 도대체 그 삶 어디에 행복 쪼가리라도 있나 싶기도 했다.

 
그런데 신기하다. 최규석 작가의 그림과 글을 따라가다 보면 분명 슬프고 짜증나는 일임이 분명한데 그저 슬슬 읽힌다. 가끔은 픽 하고 웃음도 나고, 거실에 혼자 앉아 읽다가 큭큭거리며 괜히 엄마한테 "이거 꼭 읽어봐~!"라며 소리도 한 번 지르고. (내가 다 읽고 내려놓기 무섭게 엄마도 앉아서 정좌하고 읽기 시작하더니 고도의 집중력 발휘 삼십 분 후 다 읽었다며 소리질렀다.) 
 

그럴 수 밖에! 그 힘든 이래 저래한 일들 사이 사이 아이다운 톡톡 튀는 감성과 구수한 이야기들이 살곰살곰 숨어있다. 아부지, 엄마의 달달한 젊을 적 사랑 이야기(거 참 답답한!)도 있고, 밝혀지지 않는 진실 속 서로 다른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도 재미나다. 엄마의 목숨 걸고 귀신 잡은 아부지 이야기는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3초 고민하다 웃게 만들고. 큭큭. 
 

이게 또 다인가 하면 아니다. 제목의 언발란스함이 전해주는 사회 통념에 대한 고찰 또한 담겨있다. 아니 너무 거창한가. 울고 웃기만 하는 게 아니라 생각도 하게 만든단 거다 이 책.

 
만화 어디 즈음에 있었던가, 인터뷰 글에 있었던가. 작가의 입을 통해 나온 말 중 이런 말이 있더랬다. 역사로는 중세, 근대, 현대가 딱 나뉘어져 있어도 사람 삶은 그렇지 않다고. 80년대 TV있는 집도 있고, 밥 굶는 집도 있고. 지금 20대 중에서도 자신 같은 어린 시절을 가진 사람이 있을 거라고. 듣고 보니 그렇다. 세상이 바뀐다고 그 많은 인구가 모두 변하는 게 아니니.

 
다 읽고 나면 짠하다. 아니 짠하다고 말하면 너무 건방지겠다. 결국 그런 삶 근처도 경험하지 못한 나의 어설픈 동정심일지 모르니 말이다. 그래서 최규석 작가에게 참 고맙다. 분명 존재하지만 자신들의 삶이 거부되는 그들의 모습을 알려주어서. 아, 그들의 밝은 웃음이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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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킹 걸즈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26
김혜정 지음 / 비룡소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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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중 이런 말이 있었다. 스무 살이 되면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고, 그런데 쉽지 않은 고비가 너무 많았고 힘들다고 투정부릴 수도 없었다고. 그래서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고 말이다. "괜찮아, 나는 괜찮아."라면서. 그러나 어느 날 뻥하고 터졌단다. 슬픈 거짓말을 하는 자신의 모습이 참 안쓰러워 보였다며 이제는 조금 덜 어른이어도 괜찮다고 자신을 격려했다는 말.

 
우리 시대는 어른이라는 걸 너무 많이 강조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완벽하고 실수도 없어야 하고 나약해지지도 않아야 하는 그런 어른. 그러나 삶을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조금은 못난 자신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해 준 책이 바로 이 책 <하이킹 걸즈>다. 
 

하이킹하는 소녀들? 그렇다. 주인공인 은성과 보라는 한국에서 문제를 일으킨 불량소녀들이다. 은성은 사람을 패고, 보라는 물건을 훔쳤다. 그런 그들에게 남은 건 소년원으로의 입성, 그 때 그들에게 놀라운 제안이 들어온다. "실크로드를 걸어보지 않을래?" 라는 소년원보다 매력적이고 낯선 제안이.

 
입에 맞지 않는 음식, 찜질방을 방불케 하는 더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숙소. 채 몇 일이 되지 않아 그들은 자신의 선택에 불평을 단다. 그러나 여행은 사람을 키운다고 했던가. 그들의 힘든 도보여행은 몇 가지 사건들을 겪으며 철없는 문제아들을 생각의 사막에 던져놓는다. 

 
청소년기의 가족 문제, 친구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다뤄짐에도 눈살 찌푸려질 만큼 슬프거나 과하지 않다. 시종일관 담백하게 서술된 글은 여행의 후반기로 접어들며 은성의 내면을 통해 보다 솔직한 이야기들을 펼쳐놓는다. 처음엔 욕지거리에 불평만 입에 담던 은성은 스스로를 돌아보는 멋진 시간을 겪는다. 타인을 생각하고, 조금은 어설프게 다가가기도 한다. 
 

나는 너무 작다. 하지만 괜찮다. 더 이상 그 사실을 숨기지도 부정하지도 않을 것이다. 작아도 좋아. 야호! 달려라, 달려! p.272
 

은성의 독백이다. 80일간의 눈물 나는 고된 여행기의 끝에서 그녀가 느낀 감정과 생각이다. 스스로 선택한 시간을 완수하고 난 은성은 아이러니하게 자신의 작음을 인정함으로써 지난 자신보다 더 큰 자신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이미 문제아로 낙인 찍힌 은성과 보라를 기다리는 건 다시 괄시와 무시와 폭력일지 모른다. 그러나 스스로의 약함과 강함을 깨달은 그들에게 시련이란 더 이상 시련 그 자체는 아니란 생각이 든다. 수많은 신기루를 만나 쓰러질지 모르지만, 결국 어딘가에 숨은 오아시스를 찾을 수 있을 것이란 나의 사소한 기대는 변치 않을 테고.
 

세상의 수많은 은성과 보라, 미주 언니들에게 요만큼의 행복 바이러스와 용기 바이러스를 함께 날려보내보는 건 어떨까! 아니, 어쩌면 우리가 그들에게 요만큼의 이것저것을 챙겨 받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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