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밥바라기별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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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황석영을 문학계의 큰 별이라고 이야기한다. 언제나 진중한 문체로 우리의 지나온 모습을 그려오던 그가 새로 펼쳐낸 세계는 이전과는 다른 솔직함과 풋풋함이 가득하다. 이미 십대의 추억에서 먼 거리를 달려나간 사람이 쓰는 십대의 이야기. 과연 얼마나 공감할 수 있고, 재미있을까?

 

십대의 정점 고등학교 시절에 한 배를 탄 준, 영길, 인호, 상진, 정수 그리고 선이와 미아. 이들이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화자들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준. 베트남 파견을 가는 군행열차 안, 준은 고등학교 시절로 생각을 돌린다. 데모와 총질이 난무하던 시대, 한 무리의 고등학생들은 시내 나들이에서 친구 한 명을 잃는다. 이어지는 퇴학과 휴학. 아이들의 삶은 정해진 철로에서 삐그덕거리기 시작한다.

 

학교에 남는 대신 방황하는 준과 친구들은 그들만의 아지트에서 예술을, 사랑을 논하며 청춘을 바친다. 그리고 어느 여름, 정처없이 떠난 여행길. 그들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얻었을까. 이 책은 방황하는 청춘의 모습을 담은 책이다.

 

자신의 삶을 책 속 인물에게 이리저리 투영시켰다는 소설 속 장면 자체는 지금의 십대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다. 학교를 관두고 변변한 차비 없이 떠나는 여행, 학교에 남아있지도 삶에 뛰어들지도 못하는 경계 속 인물들의 모습은 솔직히 낯설다. 학교라는 틀 안에서 하라는 것만 하면서 조용히 지내온 모범생 부류였던 나로서는 그야말로 소설 속 이야기일 뿐이었다. 작가 스스로 "이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다" 라는 말에도 정말 이렇게 파란만장한 시간을 겪었을까? 란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럼에도 책이 다가오는 느낌은 낯설지 않다. 겉으로 겪은 일이야 사람마다 달라도 청춘, 그 시기를 지나는 속마음은 시대가 바뀌어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에 대한 막막함, 지금 내가 잘 하고 있는 건가의 불확실함, 남녀 사이의 아릿한 감정. 끝없이 고민하기에 아름다운 나이이지만, 그 속 또한 한없이 타들어만 가는 시기가 십대가 아닐까.

 

가라는 길이 아닌 자신만의 길을 찾아 떠나는 주인공들의 모습에 눈길이 간다. 어디로 가서 부딪칠지 모르는 각박한 삶이지만 잘해보라고 응원하고 싶다. 

그게 나쁘냐? 나는 말야, 세월이 좀 지체되겠지만 확실하게 내 인생을 살아보고 싶은 거다.

나는 궤도에서 이탈한 소행성이야. 흘러가면서 내 길을 만들 거야 -p.41

그렇다. 조금 늦어져도 결국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간다면 그 시간들은 아깝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삐뚤어질테다"를 외치며 집을, 학교를 박차고 나오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무조건 끌려가는 삶이 아닌 내가 주인이 되는 삶을 생각하며 살아가라는 조언. 먼저 그 시절을 보낸 사람으로서 황석영 작가는 그 마음을 지금의 청춘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인생이란 누구도 딱 한 번 살아가는 과정이다. 비단 청춘 때뿐이 아니라도 우리는 끝없이 헤매이는 존재일지 모른다. 그렇기에 황석영이 보여주는 방황의 시간들이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나만 방황하는 것이 아니란 안도, 더하게 아픈 사람도 있다는 안도. 준과 친구들을 통해 '나의 길을 걸어갈 용기'를 얻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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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글쓰기
셰퍼드 코미나스 지음, 임옥희 옮김 / 홍익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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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는 힘이 있다."

 

힘든 시간을 '글'이란 녀석과 부대끼며 살아온 나의 청춘은 이 말에 긍정한다. 그대로 주저앉고 싶을 만큼 무력감에 빠질 때 나를 다시 밖으로 이끌어준 것은 언제나 글쓰기였다. 블로그에 주절이 늘어놓았던 글, 작은 노트에 솔직하게 써내려간 말들은, 그렇게 토해냄으로써 나를 삶으로 돌려주었다.

 

여기 글쓰기의 효능을 몸소 체험한 또 한명의 사람이 있다. 꾸준히 글을 씀으로써 몸의 질병까지 떼어버릴 수 있었던 셰퍼드 코미나스. 다른 사람들에게도 '글을 통한 새로운 나와의 만남' 알려주기 위해 글쓰기 워크숍을 진행하는 사림이다. 처음에는 저자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시작한 일기쓰기가 이제는 50년을 넘어선 습관이 되었다고 한다. 정말 효과가 있는걸까? 그렇다면 어떻게 써야하는걸까?

 

저자가 말하는 '일기쓰기' 란 온전히 자신과의 만남을 이야기한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는 것, 바로 그 지점에서 치유는 시작된다. 자신을 만나는 과정은 쉽지 않다. 온갖 방어로 둘러싸인 벽을 타파해야만 그 안에 갇힌 나를 볼 수 있거니와, 그렇다해도 여전히 무방비상태의 나를 보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런 약한 나에게 다가가는 한 가지 방법은 질문이다. 특정한 주제를 골라도 좋고, 그저 하루 일과의 어느 지점에서 시작해도 좋다. 생각하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다보면 그 끝에는 분명 진정한 나와 만나는 문이 있게 마련이다. 물론 한 번에 그 문이 열릴리 만무하다. 저자 또한 강조하듯 처음엔 어렵더라도 일단 3개월을 목표로 그저 한 줄이든, 한 단어든 써보는 것이다. 변화는 분명히 찾아온다.

 

그렇다면 생각을 하면 되지, 구지 왜 써야하나? 라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의 경험상 생각과 쓰기는 다르다. 특히 종이에 펜을 갖고 쓴다는 행위 자체는 자신이 내뱉는 감정에 대해 물러섬없이 받아들인다는 의지를 내포한다. 그렇기에 저자는 컴퓨터 상에 입력하는 것이 아닌, 노트에 펜으로 쓰는 작업을 권한다. 입력은 손쉬운 수정이 가능하고, 그만큼 자신을 더 방어하게 되기 때문이다.

 

코미나스가 권하는 글쓰기의 방법은 간단하다. 아무 노트, 아무 펜을 들고 당신이 편한 장소 어디든 앉아서 쓰라는 것이다. 다만 매일 쓰고, 3개월 이상 쓰라고 한다. 또 하나, 절대 비밀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오로지 나만이 볼 수 있어야 솔직한 자기 감정이 나올 수 있음이다. 이렇게 간단한데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글쓰기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일기쓰기는 작품이 아니다. 완벽과 자신을 만나는 것에 대한 부담을 버릴 때 글쓰기는 진정 치유의 힘을 발휘한다.

 

나 또한 2년여 넘는 시간을 블로그와 작은 노트를 통해 나 자신과 만나고 있다 생각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며 느끼기에 난 여전히 자신을 위함이 아닌 보여주기식의 글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끄러웠다. 스스로를 치유하고 있었다는 자만심이, 말로만 번지르르하고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한 나약함이. 

 

책에는 단순한 일기쓰기를 넘어 '글쓰기 워크숍'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글쓰기 방식들을 소개한다. 유언편지, 여행기, 꿈목록, 그림그리기 등등. 이 많은 것들을 자유자재로 다루기에 아직 우리는 버거울지 모른다. 그러나 그 과정들이 보다 나은 내일의 나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됨은 부인할 수 없다. 지금의 내가 모자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조금씩 글을 통해 발전해가는 나를 만나고 싶다. 그 과정에 이 책은 책 이상의 조언자가 되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또 다른 누군가에게도 책 이상의 책으로 곁에 남을 수 있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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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0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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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하다. 이 책에 대해서 다른 어떤 수식어가 필요할까. 사실 책을 막 덮은 지금 나는 딱 한 마디로 이 책,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의 리뷰를 마치고 싶은 기분이다. 그래야 책이 주는 느낌을 더 이상 훼손시키지 않을테니까. (그래도 차마 그럴순 없어서 눈물을 머금고 부연부연.)

 

그렇다. 이 책은 달콤하고 사랑스럽고 아기자기하며 귀여운 책이다. 읽다보면 함께 병아리 똥만큼 자신을 작게 만들어야 할 것 같은 마법의 세계. 그러나 분명 소설의 배경은 현실이다. 청춘들이 밤을 지새는 거리, 축제, 학교. 돌아보면 바로 우리의 일상인 모습들로 가득찬 소설인데, 어떻게 이런 마법같은 시간을 만들어낸걸까, 작가는.

 

일단 표지. 도도하게 걸어가는 여인네를 멍 + 저기요 상태로 부르는 남자. (자세히 보면) 신발 끈이 풀려서일까, 얼음땡 놀이라도 하는걸까, 그대로 굳어버렸다. 한편 한 손에는 동그란 사과 들고, 어깨에는 잉어를 매고 걷는 그녀. (역시 자세히 보면) 도도하기보다는 순수한 표정이다. 이쯤되면. 귀여운 여인을 짝사랑하는 찌질남 이야기?!

 

반은 정답이고 반은 오답이다. 일단 주인공 '나'(선배)는 선배 결혼식장에서 본 그녀에 한 눈에 반한다. 이제부터는 저 성을 뚫고 들어가기 위해 일단 밖에 둘러친 해자를 채워넣기 시작한다. 시도때도 없이 우연을 가장한 그녀와의 만남, 그러나 순진한 그녀는 정말 '우연'히 선배를 만나는 줄만 아는데. 그렇게 흐르는 시간 동안 '나'는 밤거리에서 한바탕, 헌책방 축제에서 한바탕, 학교 축제에서 목숨걸고 한바탕, 마지막으로 감기의 신이 휩쓸고 간 도시에서 한바탕 하며 그녀 뒤를 쫓는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랑스런 그녀의 속마음은?

 

열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난 아직 못 들어봤다. (대부분 사람들은 10번 찍기 민망해 한 대여섯번 찍고 포기해서 안 넘어가는지도 모른다.) 그리 수도없이 쫓아다니니, 순진한 그녀의 마음도 슬쩍슬쩍. 반년의 해자 매우기 끝, 새로운 관문 연애의 시작으로 소설은 안녕을 고한다. 새벽부터 일어나 준비하는 그들의 모습은 어쩜 그리 사랑스러운지, 첫 데이트는 달콤 가득이다.

 

창가의 멍한 선배 곁으로 걸어가는 그녀의 마지막 한마디. "이렇게 만난 것도 어떤 인연." 새로 시작하는 연애가 무조건 그동안의 짝사랑보다 쉬운 길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더 힘들고 복잡할지도 모르겠고. 하물며 그렇게 그녀와의 사랑을 꿈꾸던 '나'조차도 첫 데이트 앞에서 짝사랑 시기로의 회귀를 꿈꿀까.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연애를 꿈꾼다. 왜? 짝사랑의 애달픔보다는 연애의 콩닥콩닥이 즐거우니까!

 

그렇게도 이렇게도 만나는 게 사람 일이라면, 당신과 나의 만남도 마찬가지 아닐까. 나도 따라 말해본다.

"이렇게 만난 것도 어떤 인연. 우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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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 김열규 교수의 열정적 책 읽기
김열규 지음 / 비아북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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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것을 가리켜 우리는 "독서"라 한다. 책 한 권을 집어 들고 독서를 하려는 참인데 제목을 보니 또 "독서"다. 그렇다. 회색과 빨강이 섞인 이 책의 제목은 <독서>다. 제목부터 참. 독서를 좋아하는 나지만 이런 제목의 책이라면 정말 여간해서는 끌리지 않는다. 왠지 재미없을 것 같은 예감. 그럼에도 독서를 사랑하는 한 명으로서 그저 지나칠 수 없어 다시 책을 들고 펼쳐본다.

 

말 그대로 독이고 서다. '한국학'의 석학이라는 김열규 교수 평생의 책 읽기 기록이 반, 그런 그가 알려주는 책읽기 노하우가 반이다. 여전히 미심쩍지만 조금은 풀린 마음으로 일단 "서" 파트로 넘어가본다. 이 대단한 사람은 어떻게 책을 읽으라고 우리에게 일장연설을 하실까나 싶어 바짝 긴장하고 책장을 넘긴다.

 

아니, 근데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다. 이 사람 그저 공부만 해서 석학이 아닌가보다. 글빨이고 말빨이고 죽여준다. 방법론에 해당하는 파트라 지루하면 후딱 넘겨읽기해야지 싶었는데, 오히려 꼼꼼읽기에 돌입이다. 친절히 들어준 예시를 보면서 같이 문장과 문장 사이를 해독해보기도 하고, 시 한 구절 한 구절을 따라 읽으며 하나라도 놓칠새라 긴장상태다. 새로운 정보를 알려주되, 니네 원하는 대로 가져가라 싶은 여유로움이 가득하다. 덕분에 간만에 책에 바짝 붙어 글자 하나하나를 내 것으로 만든답시고 읽어낸다.

 

무엇보다 맛깔스런 문장들이 많다. 가령 이런 문장.

그러니까 글을 익는 것도 늑장을 부릴대로 부리고, 미적댈대로 미적대야한다. 서두르지 말고 심지어 졸듯 말듯 졸눌하게 읽어나가야 한다. 다리지 말고 뛰지 말아야한다.
흔히 보통들 독서 방법론을 이야기하면 수려하고 재미난 문장과는 거리가 먼, 딱딱한 문장으로 가르침을 주고자하는데 김열규 교수는 다르다. 그냥 천천히가 아니라 늑장 부리고, 미적대고, 심지어 졸듯말듯 졸눌하게란 표현까지 나왔다. 이 얼마나 공감이 가는 문장인지! 특히 책을 붙잡았다 하면 나도 모르게 잠에 빠져드는 요즘의 나를 보건데, 이 문장은 괜시리 나를 콩닥거리게 만들었다.

아! 책이라는 그 기막힌 수면제여!

 

책도 요령껏, 그러나 의미를 놓치지 말고 읽으라 한다. 결국 그간 나온 다른 사람들처럼 슬로우 리딩을 해보란 이야기다. 그러나 읽다보면 그게 전부는 아니다. 요컨대 그의 주장은 즐기라는 것, 독서 쾌락주의가 아닐까. 즐거움 없이 슬로우 리딩이고 꼼꼼이 읽어 정보를 캐내는 게 다 무슨 소용일까. (물론 정보를 알아내는 것도 독서의 큰 목표 중 하나이지만.)

 

그의 소개 책까지를 읽은 후 다시 앞으로 돌아갔다. 이제 정말로 궁금해진다. 과연 이 사람은 어떤 책 읽기를 했었는지 말이다. 소년시절, 학창시절을 거쳐 청년, 노년까지. 그의 책 읽기는 부유하지 않았으나 부유했고, 그의 청춘은 책 속의 고뇌와 함께 자라났다. 그렇게 수십년의 세월. 이제 그는 노련하게 책을 즐길 줄 아는 독서가가 되어있는 듯 보인다. 그 여유로움의 미학이란!

 

언젠가 나도 비트윈 그린 앤 블루 사이에서 다시 좋아진 눈을 자랑하며 책과의 연애를 할 수 있을까. 끝나지 않을 아름다운 시간들. 아직은 멀다면 먼 그 시간을 위해 오늘도 아끼는, 그리고 새로운 책들을 찾아 눈과 손이 바삐 움직여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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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춤이다
김선우 지음 / 실천문학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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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가 김선우 시인의 시집을 펼치고 그 안에 가득한 여성들의 내음을 맡아본 적이 있다. 담담하지만 섬세하게 살려낸 여자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십여년의 시간을 시와 함께한 김선우 시인이 이번에는 한 여자의 일생을 다룬 소설로 찾아왔다. 동방의 무희 '최승희'가 그 모델이다. 자유롭지 않은 시대 속에서 끝없는 욕망의 자유를 꿈꾼 여인의 모습을 시인은 어떻게 그려냈을까.

 

작가의 말에 의하면 최승희란 인물은 최고의 재능과 열정을 가졌지만 불우한 시대, 불우한 국가에서 태어났기에 완벽할 수 없는 영혼이었다. 친일, 월북 예술가란 타이틀로 먼저 평가되는 그녀를 이 시대에 살려내고 싶었다는 김선우 시인. 그렇다면 그 일단의 목표는 달성한 듯 보인다. 최송희는 '최승희' 본인으로써 멋지게 재탄생했으니 말이다.

 

그녀 최승희는 극한의 모순을 껴안고 살았던 인물이다. 아름다움을 추구했지만, 그를 위해 힘도 함께 추구해야했다. 설령 돌아서서 무너지더라도 사람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던 여자. 소설의 도입 부분에서 보름달 진 밤, 모란 꽃 송이를 통째로 떼어 버리고, 먹고를 반복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절정을 본다. 미처 표현되지 못한 그녀의 광기의 절정을.

 

소설은 몇 사람의 관점으로 나뉘어져 진행된다. 최승희 자신, 그녀를 기록화하는 사진작가 기타로, 뗄 수 없는 인연으로 묶인 예월과 그의 아들 민 등등. 시작은 현재, '아프신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뵈어주세요'라는 한 남자의 인력거를 타고 떠나는 최승희의 모습이다. 그리고 돌아가는 과거. 대단한 춤꾼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어린 나이 조국을 떠나 일본에서 춤을 시작하는 그녀는 또래와는 다른 자신과 꿈으로 무장해있다. 피나는 노력이 더해진 일본의 '사이쇼키'는 반도의 무희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도약을 위한 결혼 후 일본, 나아가 세계에서의 성공을 거머쥐는 최승희지만 불안한 시대는 그녀의 재능을 마음껏 뽐내기에는 역부족이다. 마지막 선택인 북조선으로 들어가는 길. 기타로를 일본으로 보내며 그녀는 말한다. "나는 내가 구할 거야. 나는, 내가, 구할 거라고!" 옹골차 그녀의 말은 왠지 듣는 이의 마음을 베어낸다. 꽃봉오리를 먹는 맨 몸의 그녀만큼이나 강렬한 맺음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두 여인 -최승희와 예월의 끊어질 듯 긴 인연이 인상적이다. 서로를 구해주고, 북돋아주고, 살려주는 모습을 보며 마치 한 사람과도 같은 느낌을 받는다. 자신의 것을 지키며 뒤켠에 숨어있는 예월, 예월의 기운으로 새로운 세상을 펼쳐나가는 승희. 예월의 마지막 길에 화려한 교방무를 입히는 승희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외적인 그녀가 내적인 그녀와 합쳐지는 순간, 최승희는 오랜 꿈 속의 자신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모습을 맞이했는지도 모른다.

 

읽는 내내 최승희를, 그에 덧대어진 김선우 시인을 만나게 된다. 예술인으로서의 고뇌, 여자로서, 한 인간으로서의 나약함. 표출되지 못한 광기를 내보이는 순간의 미학. 비뚤어지고 오해되어 바라봐지던 최승희가 우리 곁에 살아돌아옴이 기쁘다. 어느 독자와의 모임에서 잔을 높이 올리며 작가가 했던 말을 인용하며 마치고 싶다. "최승희를 위하여!" 한 마디 보태자면 "김선우를 위하여!" 시만큼이나 매력적인 그녀의 또 다른 소설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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