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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춤이다
김선우 지음 / 실천문학사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언제가 김선우 시인의 시집을 펼치고 그 안에 가득한 여성들의 내음을 맡아본 적이 있다. 담담하지만 섬세하게 살려낸 여자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십여년의 시간을 시와 함께한 김선우 시인이 이번에는 한 여자의 일생을 다룬 소설로 찾아왔다. 동방의 무희 '최승희'가 그 모델이다. 자유롭지 않은 시대 속에서 끝없는 욕망의 자유를 꿈꾼 여인의 모습을 시인은 어떻게 그려냈을까.
작가의 말에 의하면 최승희란 인물은 최고의 재능과 열정을 가졌지만 불우한 시대, 불우한 국가에서 태어났기에 완벽할 수 없는 영혼이었다. 친일, 월북 예술가란 타이틀로 먼저 평가되는 그녀를 이 시대에 살려내고 싶었다는 김선우 시인. 그렇다면 그 일단의 목표는 달성한 듯 보인다. 최송희는 '최승희' 본인으로써 멋지게 재탄생했으니 말이다.
그녀 최승희는 극한의 모순을 껴안고 살았던 인물이다. 아름다움을 추구했지만, 그를 위해 힘도 함께 추구해야했다. 설령 돌아서서 무너지더라도 사람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던 여자. 소설의 도입 부분에서 보름달 진 밤, 모란 꽃 송이를 통째로 떼어 버리고, 먹고를 반복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절정을 본다. 미처 표현되지 못한 그녀의 광기의 절정을.
소설은 몇 사람의 관점으로 나뉘어져 진행된다. 최승희 자신, 그녀를 기록화하는 사진작가 기타로, 뗄 수 없는 인연으로 묶인 예월과 그의 아들 민 등등. 시작은 현재, '아프신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뵈어주세요'라는 한 남자의 인력거를 타고 떠나는 최승희의 모습이다. 그리고 돌아가는 과거. 대단한 춤꾼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어린 나이 조국을 떠나 일본에서 춤을 시작하는 그녀는 또래와는 다른 자신과 꿈으로 무장해있다. 피나는 노력이 더해진 일본의 '사이쇼키'는 반도의 무희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도약을 위한 결혼 후 일본, 나아가 세계에서의 성공을 거머쥐는 최승희지만 불안한 시대는 그녀의 재능을 마음껏 뽐내기에는 역부족이다. 마지막 선택인 북조선으로 들어가는 길. 기타로를 일본으로 보내며 그녀는 말한다. "나는 내가 구할 거야. 나는, 내가, 구할 거라고!" 옹골차 그녀의 말은 왠지 듣는 이의 마음을 베어낸다. 꽃봉오리를 먹는 맨 몸의 그녀만큼이나 강렬한 맺음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두 여인 -최승희와 예월의 끊어질 듯 긴 인연이 인상적이다. 서로를 구해주고, 북돋아주고, 살려주는 모습을 보며 마치 한 사람과도 같은 느낌을 받는다. 자신의 것을 지키며 뒤켠에 숨어있는 예월, 예월의 기운으로 새로운 세상을 펼쳐나가는 승희. 예월의 마지막 길에 화려한 교방무를 입히는 승희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외적인 그녀가 내적인 그녀와 합쳐지는 순간, 최승희는 오랜 꿈 속의 자신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모습을 맞이했는지도 모른다.
읽는 내내 최승희를, 그에 덧대어진 김선우 시인을 만나게 된다. 예술인으로서의 고뇌, 여자로서, 한 인간으로서의 나약함. 표출되지 못한 광기를 내보이는 순간의 미학. 비뚤어지고 오해되어 바라봐지던 최승희가 우리 곁에 살아돌아옴이 기쁘다. 어느 독자와의 모임에서 잔을 높이 올리며 작가가 했던 말을 인용하며 마치고 싶다. "최승희를 위하여!" 한 마디 보태자면 "김선우를 위하여!" 시만큼이나 매력적인 그녀의 또 다른 소설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