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저드 베이커리 - 제2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창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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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소년이 동네의 빵집으로 뛰어들어간다. "저 좀 숨겨주세요!" 빵집의 점장은 커다란 오븐을 가르키며 그 안으로 들어가라는데. 이거야 원, 헨젤과 그레텔도 아니고!

 

배다른 여동생의 성추행범으로 오인받아 집에서 도망쳐나온 주인공 소년이 뛰어들어간 곳은 평소 단골로 이용하던 '위저드 베이커리'. 오갈데 없는 신세가 된 소년을 점장은 일시적으로 머무르게 해 준다. 소년은 그 곳에서 지내며 현실이 아닌듯한, 그러나 고통스런 현실들과 마주한다.

 

겉으로 보기에 위저드 베이커리는 흔히 있는 빵집같아 보인다. 그러나  인터넷 몰을 이용해 파는 빵과 쿠키류는 심상치않다.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를 실수하게 만드는 악마의 시나몬 쿠키, 사귀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먹고 떨어져라' 할 수 있는 노 땡큐 사브레 쇼꼴라, 상대에게 저주를 내릴 수 있는 마지팬 부두인형, 심지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타임 리와인더까지.

 

그렇다. 이 곳은 사람들에게 현실의 경계를 어그러뜨려주는 마법의 빵집. 그러나 거기에는 책임이 뒤따른다.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세상의 질서를 바꾸어놓은만큼의 책임. 물론 일반 빵보다 비싼, 때론 터무니 없는 가격으로 구입자들은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내 돈 내고 내가 샀는데 뭔 상관이야 식의 오만함. 그러나 그건 최소한의 비용일 뿐. 닥쳐온 상황에 대한 부담과 공포 또한 모두 자신의 것이다.

 

어느 날 위저드 베이커리로 한 소녀가 찾아온다. 그저 얄미운 친구에게 시험 날 쿠키를 전해줬을 뿐인데, 결과는 친구의 자살. 막막한 결과 앞에서 점장 탓만을 하는 그녀에게 점장은 날카롭게 반박한다. '난 이미 모든 주의사항을 줬고, 이제 그 책임은 너에게 있는 거' 라고. 그래도 뉘우침 없는 소녀에게 '평생 괴로워하며 살'라고.

 

그럼 애초에 팔질 말지, 팔았으면서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하냐할지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이란 그런게 아닐까. 받아들이기, 남 탓하지 않기. 운명이려니 체념하라는 게 아니라 그 기억을 자기안에 묻고 다시 살아가기.

 

그래서 이 빵집에서 가장 비싼, 심지어 정해진 가격조차 없는 종류는 타임 리와인더다. 정해진 시간을 어그러뜨리는 작업. 단 10분간만 나를 위해 시간을 돌려도 세상은 어지러워진다. 균형이 깨지는 것이다. 게다가 돌아간 과거에서는 미래의 기억조차 사라진다. 어쩌면 다시 반복될지 모르는 고통의 시간. 책임의 양도, 질도 감당하기 만만치않다. 그런데 점장은 바로 그 타임 리와인더를 현실의 삶으로 돌아가는 소년에게 선물로 준다. 결과는?

 

이 책은 좀 독특한 결말을 보인다. Y의 경우와 N의 경우. 즉 타임 리와인더를 사용했을 때와 그렇지 않았을 때의 두 결말을 열어놓은 채 보여준다. 어떤 경우도 행복한 결말은 아닌, 퍽퍽한 현실. 그러나 저자는 그 안에 작은 희망을 담아두었다. 그래도 삶은 흘러가리라고. 자신의 삶에 책임질 수 있는 만큼 삶은 우리에게 길을 열어준다고 말이다.

 

<완득이>에 이어 제2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인 이 작품은 <완득이>만큼 유쾌하진 않지만, 그만큼 교훈적이다. 조금은 형이상적이고 판타지적이지만 지극히 현실에 바탕을 두었다. 무엇보다 책임 없이 요구만을 부르짖는 요즘의 젊은 사람들에게 그 의미를 다시 새겨보도록 하는 책이 아닐까 싶다. 매혹적인 위저드 베이커리의 빵내음마냥 한 번 잡으면 마지막 글자를 읽을 때까지 손에서 놓기 힘든 마법같은 책. 다가오는 여름밤을 위해 하나쯤 쟁여두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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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하지 않은 삶
최영미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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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시인들은 특별한 사람인가 고민했다. 시를 알기 위해서는 특별한 무언가가 필요한가 싶었다. 시는 마치 풀지 못하는 수학공식마냥 어려워보였다. 그러나 최영미는 말한다. 시는 그리 별난게 아니라고. 내 삶의 한 장면이, 나를 둘러싼 세상의 모습이 모두 시라고. 그저 산문 읽듯 편하게 흘러가는 그녀의 시들이 그걸 증명해보인다.

 

독특한 이력의 이 시인, 최영미가 <도착하지 않은 삶>(문학동네.2009)을 통해 부르는 노래들은 우리의 모습이다. 난해하게 풀 필요 없이 그저 주는대로 받아먹으면 되는 이야기다.

 

[화장실을 나오며 나는 웃었다

 

끝난 줄 알았는데......

그게 다시 시작됐어!

 

젊어서는 쳐다보기도 역겨웠던

선홍빛 냄새가 향기로워,

가까이 코를 갖다댄다

 

중년의 기쁨 中]

 

여자들이면 으레히 찾아오는 한 달의 한 번 마법을 이렇게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낸 시가 또 있었을까. 꾸밈없이 일상을 열어보이는 발랄한 감성에 웃음이 절로 나온다.

 

시에는 솔직한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지 않는다 생각했다. 진짜 감정은 깊숙이 숨겨놓고 이리도 저리도 해석되도록 장치를 해 놓는게 시라 알고있었다. 그러나 다시 시를 찾게 된 그 연유를 시인은 숨김없이 내보인다.

 

[시를 쓰지 않으마

불을 끄고 누웠는데......

옆으로, 뒤로, 먼지처럼 시가 스며들었다.

 

...

 

누군가 뒤에서 나를 불렀다.

떠나지 말라고

내 손에 꽃을 쥐여주며

 

다시는 中]

 

그 어떤 단어가 찾아와도 연필을 쥐지 않던 시인을 다시 부르는 목소리, 그게 정말 있었는지 없었는지에 상관없이 그 부름을 쳐내지 못한 최영미는 다시 시로 돌아온다. 매몰차게 돌아서지 못하고 다시는, 이란 맹새를 깨뜨리고 시에게 돌아온 그 사연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참, 인간다운 고백.

 

어느 날 아침 일어났는데 세상이 참 막연히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뭘 하며 살아왔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끝없는 막연함에 마음까지 서늘해지는 순간을 시인은 이렇게 표현한다.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아침인지...... 저녁인지......

天地間에 곡예하듯

사반세기를 흘려보내고

게으른 생애가 지나가고

 

내 뺨에 닿는

차가운 아침의 칼날

얼음처럼 낯선

지금 이 순간.

 

얼음처럼 낯선 전문]

 

과격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표현이지만, 그래서 읽는이를 더 동감의 전율에 몸서리치게 하는 짧은 기록. 8줄 짧은 시가 순간의 고통을 몸으로 불러들인다.

 

그런가하면 세상이 주는 잠깐의 유머러스함이 최영미의 시에는 유쾌하게 녹아있다. '한가한 오후'의 관리실에서 내보내는 아이를 찾는 방송, '행복'이 보여주는 이모와 조카간의 달콤한 대화들은 평범한 오후를 '졸깃졸깃'하게 만드는 생의 선물들이다. 이렇게 급작스레 찾아오는 즐거움으로 시인은 위로를 받는다고 고백한다. 돌이켜보면 우리를 살게 하는 힘도 이 작은 삶의 유머들이 아닐까.

 

[오- 인생, 너는 엉뚱한 곳에 시를 감춰두고

실패한 자의 오후를 위로하는구나

 

그나저나 오늘 점심은 뭘 먹을까?

 

한가한 오후 中]

 

그러나 최영미는 이렇게 작은 에피소드에만 몰두하는, 세상을 피해가는 시인은 아니다. '내일을 위한 기도', '글로벌 뉴스', '2008년 6월, 서울', '지상 최대의 쇼'를 통해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난 세상의 불합리함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이러지 않길 바란다고, 소극적이지만 강한 어조로 주장한다. 여기 진실을 바라는 또 하나의 목소리가 있다고 소리친다.

 

<도착하지 않은 삶>이란 제목을 보고 왠지 허무함이 담긴 조용한 시를 만나게 될거라 예상했다. 나의 예상은 기분좋게 비껴갔다. 시라면 어렵다며 질색을 표하는 사람, 진지함 속에 일상의 쾌활함을 느끼고 싶은 사람이라면 추천해주고 싶은 시집이다. 난, 몇 편쯤 외워서 졸깃한 오후, 허기를 채우기 위해 말랑말랑 씹어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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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흐트와 아들
빌렘 얀 오텐 지음, 유동익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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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을 통한 부활을 믿는지? 많은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제대로된 작품을 통해서는 죽음조차 넘어설 수 있다고. 바로 그 점이 오랜 시간을 거쳐 예술 작품이 살아남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일지 모른다. 단순히 캔버스와 물감만으로 이루어진 이차원적 세계. 그러나 화가의 혼을 통해 캔버스 위에는 새로운 삶이 펼쳐질 수 있다. <스페흐트와 아들>(문학동네.2009)은 그 예술적 위대함을 표현한 책이다.

 

주인공은 초상화로 유명한 화가 펠릭스. 어느 날 그에게 스페흐트란 남자가 찾아와 제안한다. '내 죽은 아들을 그려'달라고. 살아있는 사람만 그리는 걸 원칙으로 했으나 제의를 거절하지 못한 펠릭스는 영상과 사진을 통해 스페흐트의 아들 싱어의 초상화를 그리게 된다. 완성된 작품은 역대의 걸작. 그와 부인은 그림 속에서 추억속의 인물을 떠올리고, 새로 태어날 아이를 찾아낸다. 그러나 과거의 연인이자 기자인 민커로부터 스페흐트와 싱어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고, 결국 작품은 한낱 불 앞에 재로 변하고 마는데.

 

책은 여러가지 실험적 요소들을 더해 독자들의 읽는 재미를 부가시킨다. 스토리상의 주인공은 분명 펠릭스이지만 이야기를 끌어가는 화자는 그가 아니다. 그렇다면? 처음 화방에서 펠릭스란 남자에게 팔려가는 순간부터, 주문을 받고 고뇌하며 결국 최고의 작품을 그리고 끝내 불태우기까지. 그 모든 과정을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건 그림이 그려진 캔버스다. 이 장치는 독자들로 하여금 이야기를 좀 더 모호하고 미스터리하게 읽도록 유도한다. 그렇다. 이 책의 묘미는 어디로 도착할지 모르는 결말. 마지막 한 장을 읽을 때까지 독자들은 아리송한 작가의 메시지에 어리둥절해야한다.

 

이 책을 읽는 또 한 가지 묘미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아들에 대한 집착과도 같은 부정(父情)으로 캔버스에 그 모습을 담으려는 스페흐트, 그 때 그 때의 감정에 충실하고 주변의 잣대에 흔들리는 범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펠릭스, 재빠르게 순간의 이슈를 포착해내는 현대인의 모습을 담은 민커.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을 한 이야기 속에 자연스레 녹여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책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포인트는 진실이다. 단 하나의 진실과 수많은 왜곡된 사실. 주인공 펠릭스는 그 사이에서 괴로워하며 자신의 작품을 한낱 재로 날려버린다. 그렇게 또 다른 주인공 캔버스는 삶을 마감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마지막 장에 이르러 모든 진실이 밝혀졌을 때 실체가 사라진 캔버스는 새로운 삶을 부여받는다. 스페흐트의 '다시 싱어를 그려'달라는 한 마디로 인해. 이가 바로 죽음조차 넘어선 예술의 부활성 아닐까. 비록 원래 캔버스의 몸체는 사라졌지만 그 영혼만은 다시 재생산되어 살아남게 되리란 걸 독자들도, 캔버스도, 펠릭스도, 스페흐트도 믿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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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나이트
커트 보니것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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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사람이 동시에 또 다른 사람이 된다. 가능한 명제일까? 겉으로 보기엔 오류가 있는 문장이다. 한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동시에 다른 사람이 되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스파이를 생각해볼까? 실제 소속은 원 국가로 되어있으나 외양적인 삶은 스파이로 살아가는 국가에 소속되어 있다. 이게 바로 동시에 두 사람으로 살아가는 가장 적절한 예가 아닐까. 그런 경우 그는 어떤 존재로서 정의되는 게 맞는걸까. 원래 소속으로서? 아니면 스파이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마더나이트>(문학동네.2009)를 이끌어가는 화자 하워드 W. 캠벨 2세가 그러한 딜레마에 빠져있다. 겉으로 드러난 캠벨은 나치 전범이다. 나치에 열광하며 그들의 사상을 전파한 방송인이다. 직접 총칼을 들고 싸우지도, 가스실에서 유대인들을 죽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많은 유대인들에게 캠벨이란 이름은 그보다 더한 나치로 기억된다. 요컨대 사악한 개자식.

 

그런데 그가 고백하기를 자신은 스파이란다. 미국의 은밀한 명을 받은. 방송 중에 위에서 내려온 지령을 방송 실수 등으로 전달했다고 주장한다. 이쯤되면 이 책이 도대체 무슨 책인지 알법하다. 바로 캠벨이 밝히는 '나는 사실 스파이였습니다'의 고백록이다. 의문이 생긴다. 스파이라면 전후에 그 사실을 증명받고 원래의 삶으로 복귀하면 그만인데 그는 왜 도망치고 숨어다니는걸까.

 

알고보니 그에게는 스파이로서의 활동을 증명해 줄 사람이 없다. 유일하게 캠벨의 임무를 아는 사람은 그가 '푸른 대모의 요정'이라고 부르는  '프랭크 위르타넨' 대령이다. 그러나 그의 존재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유령같이. 캠벨은 스스로 미국인이고, 나치가 아님을 알지만 주위 사람들 모두가 그를 나치라고 인식하는 상황. 과연 그의 정체성은 어떻게 되는걸까.

 

한 사람의 본질, 그리고 가면. 그 이중성의 오묘한 관계를 커트 보네거트는 명쾌하게 표현한다. 유일하게 그의 본질을 아는 대령과 캠벨의 대화 중엔 이런 말이 오간다.

["그것도 당신의 실체였소." "그건 내가 아니었습니다." "그게 누구였든, 그는 지구상에서 가장 사악한 개자식 중 한명이었지." "내가 나치였다고 생각합니까?" "물론 그렇소. 믿을 만한 역사가라면 당신을 나치가 아닌 무엇으로 분류하겠소?"] p.244-245

구분은 필요없다. 이런 캠벨도, 저런 캠벨도 모두 그 자신인거다. 생각해보면 당연한거다. 어떤 모습으로든 그 시간을 살아낸 건 캠벨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책의 주제는 결코 가볍지 않다. 나치, 존재의 이중성, 전쟁과 인종에 대한 양극의 시각. 그러나 책이 전하는 느낌은 오히려 가볍다. 그 안에 사람들이 쉬이 넘길 수 없는 날카로움은 존재하지만 읽는 이까지 가라앉게하는 무거움은 존재하지 않는다.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이게 바로 커트 보네거트의 블랙유머 폭탄이란거군!' 하고 느꼈다. 설명이 필요없다. 일단 한 번 만나보면 다시 빠져들 세계. 그게 보네거트의 매력이 아닐까.

 

내 말에 믿음이 안 가는 사람들을 위해 그가 악에 대해 한 멋들어진 문장 하나를 소개하며 마쳐야겠다. 작가라면 이 정도 재치와 통찰 정도는 겸비해줘야지. 정말 읽을 맛 나게 하는 글쟁이다.

[이 어디 있는 줄 아는가? 그건 적을 무조건 증오하고, 신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신과 함께 적을 증오하고 싶어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 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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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기가 좋다
한창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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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소, 나는 여기가 좋소. 여기가 생에 찌든 곳이어도 좋고, 세상이 나를 홀대해도 좋소. 나 갈 곳 여기 한 군데이니, 나를 예서 떼내려하지 마오. 나는 예서 이리 살라우. 혹시 아우. 별볼일 없는 이 곳에도 뭔가 싹이 틀지.'

한창훈이라면 이리 말하지 않을까. 바다 사나이라는 그가 풀어내는 자신의 동네 이야기(바다 이야기)는 쓸쓸하고 비참하다. 바다는 예전처럼 우리에게 살가움만을 주는 곳이 아니다. 살기는 힘들고, 일거리는 떠나보내고, 그러다보니 식솔도 떠난다. 그러나 떠나는 자가 있으면 들어오는 자도 있는 법. 바다 한가운데 섬 동네에는 혈기 왕성한 젊은이도, 사랑도 있다. 그러니 그라면 이러겠다. 나, 그냥 예서 살라우.

 

한창훈은 '바다와 섬의 작가'라 불린다. 그 동안 꾸준히 낮은 곳의 사람들을 그려냈다는 그는 이번 작품에서도 어김없이 고집을 부린다. 그의 소설엔 명품도, 커다란 집도, 그 흔한 문화생활 한번 접할 길 없다. 고요하고 때론 심술맞은 바다, 사람들을 묶어놓는 섬, 작은 동네 하나면 충분하다. 더해 구수한 사투리 몇 마디 보탤 인물 서너명이면 준비 작업은 끝이다. 어디에서나 있을 법한 뻔하디 뻔한 삶의 이야기가 녹아나온다.

 

어쩜 이리도 궁상맞을까 싶게 바다와 섬 사람들은 힘겹게 살아간다. 빚더미에 올라, 마지막 남은 배까지 팔며. 그럼에도 자기 자식들은 뭍으로 보내겠다고 자존심까지 굽혀가며. 그렇게들 살아간다. 때론 그 고단한 일상에 뭍사람들의 죽음이란 흔치않은 소동도 더해져가며. 바다에 묻혀 큰 소리 한 번 안내고 굽실대며 살아간다. 그래서 한창훈의 소설은 유쾌하지 않다. 삶의 이야기니 묵직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

 

그러나 한 편씩 이야기를 읽고 책을 덮을 즈음이면 미소가 번진다. 그리 힘들게 살지만 그래도 그들에게는 미래를 향한 의지와 희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때론 과거의 행복한 기억이 오늘, 내일을 살아갈 힘이 되어준다. 한 동네에 함께하는것만으로 삶에 힘을 불어넣어줄 수 도 있고, 타인의 죽음을 통해 지금 나의 삶을 돌아보고 다시 살아갈 수도 있다. 게다가 젊음이 있다. 요즘은 농어촌에서 젊은 사람들이 다 빠져나오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 곳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바다, 섬은 시대에 뒤떨어진 벌판이 아닌, 삶을 위한 장소다. 도시에서처럼 사랑도, 일에 대한 열정도 살아 숨쉬는 삶의 현장!

 

이 책을 즐겁게 만들어주는 장면도 그 젊음이다. '아버지와 아들'에 나오는 아들은 뭍에 나갔다가 결국 내 터전은 여기요, 라며 섬으로 돌아온다. 그리고는 씩씩하게 아버지의 일을 돕는다. 섬은 아들이 꿈을 키워갈 베이스진지다. '올 라인 네코'에서는 마음을 닫은 한 여자 미정이 사랑에 빠진다. 빨리 빚 갚고 뭍으로 나가야겠다는 미정을 붙든 건 단순하게 밀어붙인 섬사내 용철. 도시에서처럼 이리재고 저리재기 없이 사랑에 빠진 순수한 남녀의 모습이 바다의 모습처럼 자연스럽다. 그들은 이 섬에 또 다른 미래를 만들어갈거다.

 

첫날 밤, 용철이 미정에게 던진 한 마디가 파문이 되어 울린다. '올라인네코'. 배타는 사람이면, 섬 사람이면 알 법한 이 단어. 미정을 속박하던 모든 걸 마법처럼 풀어냈듯이 나에게도 일상으로부터의 자유를 건네주길. 아무래도 오늘부터 '올라인네코' 전도사가 되야겠다. 아, 도대체 '올라인네코'가 뭐냐고? 답은 책에서. 힌트는, all line let go!

 

바다든 섬이든 산골짜기든 도시든. 어디에서나 사람 사는 모습은 같은 게 아닐까. 그래서 딴 곳으로의 꿈을 꾸기 대신 한창훈과 같이 말해보련다. '나는 여기가 좋다'. 내뱉고 나니 정말로 내가 발디딘 여기가 좋아지는 기분이다. 그러니 오늘도 살아가자 오늘을. 마법같은 주문 '올라인네코'를 외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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