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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하지 않은 삶
최영미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3월
평점 :
시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시인들은 특별한 사람인가 고민했다. 시를 알기 위해서는 특별한 무언가가 필요한가 싶었다. 시는 마치 풀지 못하는 수학공식마냥 어려워보였다. 그러나 최영미는 말한다. 시는 그리 별난게 아니라고. 내 삶의 한 장면이, 나를 둘러싼 세상의 모습이 모두 시라고. 그저 산문 읽듯 편하게 흘러가는 그녀의 시들이 그걸 증명해보인다.
독특한 이력의 이 시인, 최영미가 <도착하지 않은 삶>(문학동네.2009)을 통해 부르는 노래들은 우리의 모습이다. 난해하게 풀 필요 없이 그저 주는대로 받아먹으면 되는 이야기다.
[화장실을 나오며 나는 웃었다
끝난 줄 알았는데......
그게 다시 시작됐어!
젊어서는 쳐다보기도 역겨웠던
선홍빛 냄새가 향기로워,
가까이 코를 갖다댄다
중년의 기쁨 中]
여자들이면 으레히 찾아오는 한 달의 한 번 마법을 이렇게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낸 시가 또 있었을까. 꾸밈없이 일상을 열어보이는 발랄한 감성에 웃음이 절로 나온다.
시에는 솔직한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지 않는다 생각했다. 진짜 감정은 깊숙이 숨겨놓고 이리도 저리도 해석되도록 장치를 해 놓는게 시라 알고있었다. 그러나 다시 시를 찾게 된 그 연유를 시인은 숨김없이 내보인다.
[시를 쓰지 않으마
불을 끄고 누웠는데......
옆으로, 뒤로, 먼지처럼 시가 스며들었다.
...
누군가 뒤에서 나를 불렀다.
떠나지 말라고
내 손에 꽃을 쥐여주며
다시는 中]
그 어떤 단어가 찾아와도 연필을 쥐지 않던 시인을 다시 부르는 목소리, 그게 정말 있었는지 없었는지에 상관없이 그 부름을 쳐내지 못한 최영미는 다시 시로 돌아온다. 매몰차게 돌아서지 못하고 다시는, 이란 맹새를 깨뜨리고 시에게 돌아온 그 사연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참, 인간다운 고백.
어느 날 아침 일어났는데 세상이 참 막연히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뭘 하며 살아왔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끝없는 막연함에 마음까지 서늘해지는 순간을 시인은 이렇게 표현한다.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아침인지...... 저녁인지......
天地間에 곡예하듯
사반세기를 흘려보내고
게으른 생애가 지나가고
내 뺨에 닿는
차가운 아침의 칼날
얼음처럼 낯선
지금 이 순간.
얼음처럼 낯선 전문]
과격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표현이지만, 그래서 읽는이를 더 동감의 전율에 몸서리치게 하는 짧은 기록. 8줄 짧은 시가 순간의 고통을 몸으로 불러들인다.
그런가하면 세상이 주는 잠깐의 유머러스함이 최영미의 시에는 유쾌하게 녹아있다. '한가한 오후'의 관리실에서 내보내는 아이를 찾는 방송, '행복'이 보여주는 이모와 조카간의 달콤한 대화들은 평범한 오후를 '졸깃졸깃'하게 만드는 생의 선물들이다. 이렇게 급작스레 찾아오는 즐거움으로 시인은 위로를 받는다고 고백한다. 돌이켜보면 우리를 살게 하는 힘도 이 작은 삶의 유머들이 아닐까.
[오- 인생, 너는 엉뚱한 곳에 시를 감춰두고
실패한 자의 오후를 위로하는구나
그나저나 오늘 점심은 뭘 먹을까?
한가한 오후 中]
그러나 최영미는 이렇게 작은 에피소드에만 몰두하는, 세상을 피해가는 시인은 아니다. '내일을 위한 기도', '글로벌 뉴스', '2008년 6월, 서울', '지상 최대의 쇼'를 통해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난 세상의 불합리함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이러지 않길 바란다고, 소극적이지만 강한 어조로 주장한다. 여기 진실을 바라는 또 하나의 목소리가 있다고 소리친다.
<도착하지 않은 삶>이란 제목을 보고 왠지 허무함이 담긴 조용한 시를 만나게 될거라 예상했다. 나의 예상은 기분좋게 비껴갔다. 시라면 어렵다며 질색을 표하는 사람, 진지함 속에 일상의 쾌활함을 느끼고 싶은 사람이라면 추천해주고 싶은 시집이다. 난, 몇 편쯤 외워서 졸깃한 오후, 허기를 채우기 위해 말랑말랑 씹어먹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