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완벽한 하루
채민 글.그림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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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만화책과는 가까이하지 않았었다. 이해하기 쉽게 나왔다는 역사 만화책도, 사춘기 시절을 촉촉하게 적셔준다는 순정 만화책도, 이상하게 만화책은 읽고 싶지 않았었다. 그렇게, 나름 어른이 되어(?) ‘만화책은 어린 애들이나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내가 접한 만화책은 그야말로 생소하고 낯설기 짝이 없었다.

 

<그녀의 완벽한 하루>라는 제목과는 아주 반대로, 내용은 아주 암울하고 우울했다. 뭔가 발랄하고 신나는 ‘그녀’의 이야기가 담겨있을 거라는 혼자만의 예상은 아주 보기 좋게 빗나갔다. 흑백으로 처리된 만화책 그림처럼 이 책을 읽고 있는 나 역시, 조그만 빛 하나 보이지 않는 아주 어두컴컴하고 질척거리는 동굴 속에 갇혀 있는 것만 같았다. 여기에는 10편의 시가 실려 있었고, 그 시들을 기반으로 하여 9편의 만화가 그려져 있었다. 이 책을 한 마디로 말하라고 한다면, 주저하지 않고 ‘우울한 하루’ 쯤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에 등장하는 그녀에게서는 설렘이나 기쁨은 고사하고, 즐거워하는 표정도 행복하다는 감정도 편안하다는 생각도, 그 어느 것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자기 무게보다도 더 나가는 짐이 위에 얹혀 있는 것처럼 어깨는 축 쳐져 있고, 마음대로 되는 것 하나 없고, 무료하고 짜증나는 일상이, 건조하고, 씁쓸하고, 케케묵은 냄새가 나는 것만 같은 하루하루가 그려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사실 오늘은 요 근래 들어, 날씨가 가장 좋았음에도 손끝이 기분 나쁘게 시려오는 것 같았다.

 

‘그녀’들에게서 내일이라는 것은 없어보였다. 그녀는 내일은 없는 것처럼 오늘을 살고 있었다. 그것이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고 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어제 같은 오늘, 엊그제 같은 오늘처럼 내일도 모레도 오늘 같으리라는 그런 느낌. 무미건조한 삶을 사는 사회복지사, 매일을 힘들게 살아가는 백화점 여직원, 꿈이 없는 전업주부, 프리랜서 등. 그들에게서는 어떤 희망의 빛도 발견할 수다 없었다. 그들에게는 누구도 따듯한 손을 내밀어주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그들 스스로 따듯한 곳을 찾아 나가고자 하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렇게 읽을수록 나를 가라앉게 만드는 이야기를 아주 오랜만에 접해서인지, 가슴 속에서 뭐라 부를 수 없는 생소한 감정이 생겨나는 것 같았다. 그녀들을 향한 동정인지, 아니면 그들에게서 한심함을 느끼는 것인지,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은 건지, 손을 내밀고 싶은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악몽은 아닌데도 뭔가 깔끔하지 못한, 그런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이 슬금슬금 든다.

 

 



 

 

가는 비 온다 - 기형도

 

간판들이 조금씩 젖는다

나는 어디론가 가기 위해 걷고 있는 것이 아니다

둥글고 넓은 가로수 잎들은 떨어지고

이런 날 동네에서는 한 소년이 죽기도 한다

저 식물들에게 내가 그러나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나는 안다, 가는 비......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며

누구도 죽음에게 쉽사리 자수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랴, 하나뿐인 입들을 막아버리는

가는 비...... 오는 날, 사람들은 모두 젖은 길을 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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