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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밀리건 - 스물네 개의 인격을 가진 사나이
다니엘 키스 지음, 박현주 옮김 / 황금부엉이 / 2007년 7월
평점 :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스물 네 명이나 들어 있다.
종종 친구들과 서로 우스갯소리로, 다중 인격이라는 농담을 할 때가 있다. 개그 프로그램에서 ‘다중이’를 소재로 하기도 할 만큼 가볍고 재미있게 다루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가볍게만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처음으로 다중 인격에 대한 이야기를 접했던 건 몇 년 전 보았던 영화, <아이덴티티>에서였던 걸로 기억한다. 평소 좋아하던 존 쿠삭이 연기를 했던 터라 더욱 기억에 남는 영화다. 그리고 그 후로, 미국 드라마나 영화 혹은 책에서 다중 인격이 많이 다루어지는 것을 보았다. 다중 인격 장애는 공식 명칭으로는 ‘해리성 정체장애’라고 불린다. 한 사람 안에 둘 또는 그 이상의 각기 구별되는 정체감이나 인격 상태가 존재하는 것이다. 친구와 혹은 누군가와 마주보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어느 순간 상대방의 눈빛이 변한다, 바로 눈앞에서 말이다. 그리고는 방금 전까지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달라진 인상을 준다. 이 정도면 충분히 소름이 끼칠 것 같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빌리 밀리건’은 해리성 정체장애를 인정받은 사람의 이름이며, 그의 일대기를 저자가 재구성한 이야기, 휴먼 논픽션이다. 1977년 어느 대학가에서 벌어진 세 명의 여성 성폭행 사건의 용의자로 빌리 밀리건이 체포되면서 그의 정체가 세상에 밝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재판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으면서 결말에 이르기까지의 순탄치만은 않았던 힘들고 고독했던 과정들을 이 책에 담았다. 처음엔 작가 역시 빌리 밀리건의 상태를 받아들이기 힘들었으나 점차 마음을 열고 그를 믿기 시작했으며, 발품을 팔아 모든 그의 주변 인물들과 인터뷰를 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이렇게 실감나고 감동적인 진짜 같은 진짜 이야기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
실제 몸의 주인인 빌리를 중심으로, 지극히 신사적이고 인격적인 부분을 담당하는 선생 아서, 불의를 참지 못하는 행동주의자이면서 보호자 역할을 담당하는 유고슬라비아인 레이건, 말 잘하는 사기꾼 앨런, 그림을 잘 그리는 예술가 타미, 레즈비언 에이들라나, 마약쟁이 케빈, 폭력적인 성향이 짙은 뉴욕 출신 필립, 3세의 영국 소녀 크리스틴 등등등. 그들은 모두 각기 다른 성격과 외모(?), 언어와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국적이 다른 탓에 말을 하다 보면 누가 ‘자리’를 차지했느냐에 따라 억양과 속도 등이 수시로 바뀌었고 성격마저도 바뀌었다. 그들이 말하는 ‘자리’는, 일종의 스포트라이트 같은 것이란다. 그 주위에서 스물 네 개의 인격들이 자유롭게 활동을 하는데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 즉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람이 세상과 만나는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나름대로 서로 지켜야 할 룰도 정해져 있었다. 빌리 밀리건 안에는 하나의 작은 사회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일인 다역 같은 연기는 감히 비교도 되지 못할 만큼 빌리 밀리건은 스물 네 개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데도 정작 본인인 빌리 밀리건은 범죄가 일어나기 전까지도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빌리 밀리건이 용의자로 지목된 후, 그의 정신 장애를 이유로 무죄를 추진하려고 하자, 처음엔 아무도 그의 그런 변화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와 함께 지내본 사람은 금방 그의 상황을 받아들였고, 그 안의 각기 인물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을 즐겼다. 그리고 나 역시 마치 빌리 밀리건을 마주 대한 것처럼 책을 마주본 채 점점 그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의 안에는 너무나 이성적인 사람도 있었고, 너무나 의리파인 사람도 있었고 너무 착하고 순수한 아이도 있었다. 한 명씩 자리를 차지하고 나타나 이야기를 할 때마다 한 사람 속에 어쩌면 갇혀 있는 그들이 반갑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책 속에는 실제 빌리 밀리건의 모습이 사진으로 담겨 있었다. 너무나 멀쩡한 외모라서 그런지 더욱 그의 스물 네 개의 인격, 그 존재를 믿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작가의 인터뷰를 따라가면서 나도 모르게 나 역시 빌리 밀리건을 믿기 시작했고 그를 응원하게 되었다. 빨리 그에게 안정과 행복이 찾아오게 해달라고 말이다. 그의 치료과정을 책을 통해 지켜보면서 다중 인격 장애라는 것을 믿으면서도 막상 실제로 내 눈앞에 그 증상이 나타난다면 바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그가 아닌 그’가 저지른 범죄 때문에 ‘그’가 죄값을 치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발생한 범죄에 대해서는 누가 책임을 져야 하지? 생각할수록 어렵고 복잡한 문제였다. 결국 나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