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도쿄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일본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그 간결한 문체가 싫었었다. 처음 일본 소설을 읽은 건 고등학생 때였던 것 같다. 짤막짤막한 문장들이 그 때는 뭔가 허무하게만 느껴졌고, 가벼워 보이기만 해서 싫었다. 책이란 뭔가 교훈을 주어야 하고 배울 수 있어야 한다고만 생각했었다. 모든 일본 소설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혀 한동안 일본 소설은 만지지도 않았다. 그렇게 기피하기만 했던 일본 소설을 다시 읽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는다. 그냥. 언젠가부터 그렇게 간결한 문장에서 또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알게 된 작가 중 한 명이 바로 오쿠다 히데오다. 그의 작품을 많이 읽어본 건 아니지만, 경쾌하면서도 뭔가를 전달하는 것만 같은 문장이 주는 그 느낌이 좋게 느껴졌다.

  이 책, <스무 살, 도쿄>는 주인공 다무라 히사오가 도쿄에서 살아가는 날들을 그린 오쿠다 히데오의 작품이다. 단편인 듯 하면서도 장편인 이야기. 짤막하면서도 긴 이야기다. 이 책 속에는 1979년과 1978년, 1980년, 1981년, 1985년, 1989년의 다무라 히사오가 등장한다. 그 해 그 해의 하루씩을 모아 한 편의 이야기가 완성되었다.




  갓 대학에 입학한 히사오는 우연히 아름다운 선배에 반해 무작정 그 선배의 연극 동아리에 가입한다. 그러나 그 선배는 동경의 대상일 뿐, 현실적으로는 가까이 접근조차 불가능한 하나의 탑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좋아하는 동기 에리가 있다. 그렇게 새내기 대학생으로서 그들은 자유를 만끽하며 말 그대로 풋풋한 생활을 한다. 가슴 설레는 첫 키스, 서툰 고백과 표현들. 그들은 성장을 위한 계단 하나를 그렇게 디뎠다. 그리고 다시 일 년 전. 처음 히사오가 독립해 도쿄로 상경하던 날로 시간은 거슬러 올라간다. 구실은 재수를 하기 위해서였지만, 아버지로부터, 그리고 지긋지긋한 나고야로부터 히사오는 도망쳐 나온 것이다. 처음 도쿄에 발을 내딛으며 히사오는 왠지 어른이 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상경한 첫날부터 밀려드는 외로움과의 사투를 벌여야만 했다. 어른이 되는 건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그 다음은 존 레논이 사망한 날로 이동한다. 히사오는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대학을 중퇴하고 조그만 광고대행 회사에서 카피라이터가 되어있었다. 그 날 그 즈음의 히사오는 정말 정신없이 바쁜 생활을 하며 보내고 있었다. 사장의 동생인 겐지의 끊임없는, 그리고 말도 안 되는 부탁과 심부름을 하느라 제 때 밥도 먹지 못하고 발품을 팔아야하는 모습에 괜스레 나도 겐지에게 약이 올랐다. 그리고 일 년 후, 히사오는 이제 제법 회사에서 인정받는 ‘실세’가 되어있었다. 후배 직원도 셋이나 거느린 카피라이터가 되어서 말이다. 그렇지만 그는 어린 나이에 너무 우쭐해져 버렸다. 후배들의 장점에는 눈을 감아버리고, 못하는 것들만 콕콕 짚어가면서 윽박지름으로써 사기를 저하시켰다. 물론 그에게 악의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 테지만, 자신의 올챙이 적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거다. 그런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던 하루이면서, 1988년에 열릴 올림픽이 서울인지 나고야인지 발표하는 날이기도 했다. 아, 서울 올림픽이 나고야와 경쟁했었구나. 이제 또 다른 하루는 스물다섯이 된 히사오가 엄마 때문에 선을 보게 된 날이었다. 엄마 친구의 딸인 같은 나고야 출신의 동갑내기. 키도 크고 성격도 제멋대로. 싫은 사람 앞에선 하이힐을 신어 상대를 내려 보는 것으로 눌러버리고, 맘에라도 든다면 로퍼를 신어 눈높이를 맞추는 별난 여자였다. 그 날, 하루에도 여러 번 하이힐과 로퍼를 번갈아 신어가며 히사오를 당혹스럽게 한다. 어느덧 히사오는 스물아홉이 되어 있었고 그 날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날이기도 했다. 서른을 코앞에 두고 있는 히사오는 이제 동업자 친구들과 회사를 꾸리고 있었다. 많이 성장했고 수입도 꽤 많아서 삶에 여유도 생겼고 귀여운 여자 친구도 만나고 있다. 결혼을 앞둔 친구를 위한 파티에서 그들은 젊었을 시절, 분명 지금도 젊긴 하지만, 더 젊었던 한창 청춘의 날들을 회상하며 꿈을 나눈다.

  

  오쿠다 히데오가 그려낸 소설 속의 엿새는 역사적인, 문화적인 사건과 각각 맞물려 있는 하루이기도 했다. 존 레논이 사망한 날이거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것 등 말이다. 그렇게 히사오의 젊은 날 역시 자연스럽게 시간과 함께 흘러간다. 주위 사람들과 함께 말이다. 스무 살, 그 시절 히사오가 음악 평론가가 되고 싶었던 것처럼 그의 친구들도, 회사 사장도 각각의 꿈이 있었다. 점점 보호라는 울타리가 벗겨지면서 현실이라는 것에 동화되어갔고, 그 과정에서 꿈을 잃기도 뒤로하기도 미뤄두기도 하면서 각각의 삶을 살아나가게 되었다. 날짜로 따지면 엿새였지만, 그 여섯 날은 히사오의 10년을 여실히 그려내고 있었다.

  지금 내 꿈은 뭘까?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걸까?










     거울에 빠져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밖에 눈에 안 들어와.

     주위의 풍경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지.

     자의식이란 바로 그런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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