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관한 연구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지음, 전기순 옮김 / 풀빛 / 2008년 2월
평점 :
품절



 가로로 길게 누워있는 표지가, 그리고 제목의 글씨체가 대본책자를 연상하게 하고 독특하다는 느낌을 주어서 책을 읽기 전에 많은 궁금증을 일으켰다.

 저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사랑이 고통이라는 점을 피력하면서 이 책 <사랑에 관한 연구>를 시작한다. 그리고 팬더의 ‘사랑이론’을 차용하여 사랑과 증오의 공통점을 찾아내 서술한다. 팬더의 사랑이론이란 바로 이것이다. 

 “사랑은 한 영혼이 다른 영혼을 향해 나아가는 구심력이며, 
    그 힘은 지속적인 흐름 속에서 유지되면서 가공할 힘을 분출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 대상과 하나가 되면서 그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즉, 사랑과 증오의 공통점을 구심력과 이동성, 유영성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크게 세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부에서는 사랑의 본질에 관하여 서술하고 있는데, 주로 철학적인 이론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2부는 남자의 심리와 본능이라는 주제로, 3부는 무엇이 남자의 사랑을 완성시키는가? 에 대한 답변을 중심으로 글을 써나가고 있는데, 제목만으로도 이 책이 남성의 입장을 중심으로 서술되고 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저자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플라톤, 칸트 등 여러 철학자들의 말을 인용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의견을 찾아내는 서술 방식을 택하고 있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프롤로그에서부터 쉽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동안 내가 사랑이라는 것을 너무 쉽게 보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에 관한 학문적인 접근은 내게 너무나도 어렵게 다가왔다. 사랑의 개념에서부터 나는 혼돈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사랑’과 ‘사랑들’에 어떤 차이가 있단 말인가, ‘사랑’과 ‘사랑에 빠짐’의 다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적어도 내 생각에 사랑이라는 것에 함부로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사랑에 대해 과감하게 철학적 접근을 시도했고, 그에 대한 결과를 그만의 잣대로 확고하게 피력해나간다.

   우리의 연애감정은 대상에 의해 조절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우리의 뜨거운 환상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 
   사랑은 언젠가는 죽게 되는데 
   그것은 탄생 자체가 착각이었기 때문이다.

 칸트의 말이다. 탄생 자체가 착각이었다는 말에 의하면, 온전한 사랑이란 지극한 이성을 지닌 사람이 아니고서는 쉽게 다다르지 못하는 것이다. 대상으로 인해 사랑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환상으로 인해 대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니까 말이다.

 저자는 1부에서 주장한 사랑의 본질을 관철시키기 위해, 2부와 3부에서는 문학 작품 속의 인물과 사랑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음유시인들의 시도 인용하고 있다.

 유럽에서 넬슨 제독과 헤밀턴 경이 동시에 사랑했던 여인 레이디 헤밀턴 - 마리 앙투와네트의 자매이기도 한- 의 이야기, 수많은 남성들의 구애를 받고도 이를 거절하고 고독의 길을 걸었던 마르셀라의 이야기 등이 그것이다. 물론 저자의 지식이 워낙에 뛰어났던 탓도 있기는 하지만 -21세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하니 눈으로 보지 않아도 그 정도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이미 그가 언급한 문학 작품들과 인물들에 대해 독자가 어느 정도의 앎을 지닌 상태라는 전제하에 설명되어지고 있었다. 적어도 나는 그것들과 그들에 관한 지식이 충분치 않았기에 수박 겉핥기식의 독서를 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스탕달의 <연애론>이라든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단테의 <신곡>, 이븐 하즘의 <비둘기 목걸이> 등을 저자의 시각으로 다시 한 번 읽어볼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연애론>과 <비둘기 목걸이>는 접해보지 못했는데, 특히 <비둘기 목걸이>는 저자의 잠깐 동안의 언급만으로도 충분한 매력을 느껴서, 꼭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문학 작품들도 단순한 재미와 감흥으로 읽히기보다는 그의 머릿속에서는 그의 이론을 정립시켜줄 근거가 되고 비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놀라웠다.   

 사랑이 다의어인지에 대한 저자의 논의에 대해서도 관심이 집중되었다. 남녀의 이성 간의 사랑과 부모님과 자식 간의 사랑, 조국에 대한 사랑, 이런 모든 것들을 아우르는 사랑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을 남기며 마지막 장을 덮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사랑에 관한 나만의 생각이 정리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저자의 생각에 완벽한 일치점을 찾은 것도, 그의 주장을 비판할 만한 근거를 찾은 것도 아니다. 아마 그것은 이 책을 아무리 여러 번 읽는다고 해도,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불가능할 것 같다. 사랑에 대해 연구한다는 것 자체가 모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