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새로운 어린이가 온다 - 교사와 학부모가 알아야 할 디지털 시대 어린이의 발견
이재복 지음 / 출판놀이 / 2020년 11월
평점 :
# 1. 서평이 아닌 토론문, 발제문을 쓰다
저자가 '새로운 어린이'라고 하는 말은 다른 말로 '디지털 시대 원주민'이다. 지난 수십수백년 동안 책읽으며 문자로 사유했다면 이제는 화면 통해 영상으로 본다. 스마트폰과 SNS를 떠올려보라. 안 하는 아이가 얼마나 되나? 좋든 싫든 이미 생활이 됐고 거스르기 힘든 흐름이다. 아이들이 관계 맺고 사고하는 방식 역시 새로워질 수밖에 없다.
이 책은 그동안 아동문학 활동을 해왔던 저자가 아이들과 소통하는데 도움되길 바라며 썼다. 저자는 토론을 즐겨하는데, 책에서 논쟁을 유발하는 부분들이 있다. 특히 '잔혹동시'에 대한 해석은 반론도 많이 접할 거다. 저자는 그걸 충분히 예상한다. 그걸 감수하고 한 발 더 들어가길 원한다. 그러면서 그동안 감추어졌던 문제들을 드러내려 한다. 집필 목적이 그러하기에 이 책은 그냥 편하게, 수용하면서만 읽을 수는 없는 책이다.
나는 서평이라기보다 토론문에 가까운 글을 썼다. 핵심은 '어떤 사람이 되어갈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다. 쓰다보니 우리 사회 문명에 대해 포괄적으로 이야기하게 되었다. 분량이 많아지고, 하나의 발제문이 되었다. 나중에 실제로 저자와 만나 토론할 걸 염두에 둔 글이라고 이해해주면 좋겠다.
내가 보는 알맹이는 "생명감수성"이다. 이에 대한 관심은 진작부터 있었지만, 이번 글을 작성하며 한 데 모으게 되었다. 영감에 자극을 준 저자에게 고맙다. 이 글에 이은 토론이 뒤이어지길 바란다.
# 2. 잔혹동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2015년에 어린이가 쓴 <학원 가기 싫은 날>이란 시는 일명 '잔혹동시'라는 말이 붙었다. 엄마를 씹어 먹어, 구워 먹어, 파먹어, 가장 고통스럽게.. 뭐 대강 이런 내용이다. 내용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깜짝 놀랐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그런데 저자의 해석에 한 번 더 놀랐다. 모성의 신화, 가부장제의 교육 엄마에게 비수를 날린다며 반가워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상당히 거북했다. 그 내용을 읽은 것 자체로도 불쾌했다. 나는 공포영화를 안 본다. 폭력적인 영화도 불편하게 느껴서 피한다. 그러한 이미지에 담겨 있는 기운은 결코 생명에게 유익하다고 생각들지 않는다. 그런 걸 처음보면 눌려서 잠 못 들기도 하니까.
문득 이종격투기가 떠올랐다. 처음에는 상당한 충격이었다. 아주 거칠었고 토 나올 것 같았다. 그런데 좀 지나니까 익숙해졌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심지어 몇 번 찾아보기도 했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내게서 폭력적인 모습이 느껴졌다. 그런 걸 느낀 후로는 손절하고, 더 조심한다.
엽기적인 것도 반복되면 반응이 약해지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우리 사회는, 특히 자본은 더욱 쎈 것을 추구한다. 이러한 사회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스마트폰, SNS에서 벗어나는 것 이상으로 힘들다.
문제는 아이들에게도 손쉽게 노출된다는 거다. 그 동시 쓴 아이가 그런 상황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었을까? 적도에 사는 이들이 눈을 떠올려볼 수 없는 것처럼, 그런 폭력성을 경험할 수 없는 환경에서는 나올 수 없는 글이다. 이걸 가능하게 한 오늘날 문화 환경이 심각한 문제다. 우리 아이가 이런 시를 쓴다면 어떨까? 이런 시를 쓰는 아이들이 가득한 세상이라면 나는 어떻게 느낄까? 이런 질문을 던졌을 때 별로 반갑지 않다.
아이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밀어넣는 어른들이 문제다. 지금 어른들도 무한 경쟁, 각자도생에 지쳐 출산을 미루고 포기하는 시대에 아이들은 오죽하겠나. 아이들은 더 안타까운 피해자다. 어른들은 이래야 살아남는다며 아이를 콜로세움으로 우겨 넣는다.
모성의 신화와 가부장제, 천박한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데 꼭 잔인한 폭력이 필요한 건 아니다. 만약 폭력으로 비수를 꼽고 극복할 수 있다면 더 할 수도 있겠지만, 충분한 대안으로 보이진 않는다. 앞에 언급한 것들은 우리를 '생명답게' 살지 못하게 얽매는 생활양식이다.
이를 어떻게 풀어내야 하는가? 이 때 견지해야 할 게 '생명감수성'이라고 본다. 우리가 추구하는 평등하고 아름다운 세상은 자기 기질과 특성에 맞게 있는 그대로 살고, 조화롭게 어울리며 서로를 살리는 것이다. 진위, 혹은 선악의 문제라기보다 미추의 문제다. 아, 그런데 지금껏 당한 폭력과 억압은 너무나도 심각하다는 것은 명확하다. 기득권은 무릎 꿇고 통렬히 반성해야 한다. 대안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바라봐야 할 지점을 말하는 거다.
요즘 '30호', 이승윤씨가 인기다. '싱어게인'이라는 음악 경연 방송에 나와서 알려진 인물이다. 그의 노래도 독특하지만 그가 하는 말들도 남다르다. 자신은 누군가를 떨어뜨리면서 살아남는 서바이벌 경연방식에 맞지 않는다며, 동료도 잘 하고 자기도 잘 해서 심사위원을 패배자로 만들겠다고 한다. 자신 때문에 다른 이가 탈락하게 되자 눈물도 흘린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애매한 경계선에 서 있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서 하는 고민과 자기 색깔이 인상적이다. 특히 jtbc 뉴스룸에 나와서 "기도보다 아프게"라는 자작곡을 불렀는데, 그 곡은 세월호 아이들에게 부르는 노래다. 세월호 참사 보도를 그나마 괜찮게 했던 곳이 뉴스룸이다. 우와 거기서 그 노래를 부르다니, 그런 안목은 도대체 어떻게 형성된 걸까?
이승윤씨 이름이 공개되며 그의 가족들도 주목받았다. 그 부모의 자녀 교육이 회자되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기독교계에서 널리 존경받는 이재철 목사다. 이런 이유로 이재철 목사가 20여 년 전에 출간했던 <아이에게 배우는 아빠>는 요즘 개정되어 새로 나왔고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 책에 나오는 이야기 중에 우리 주제와 연관되는 게 있어 옮겨온다. (승윤이의 '빵')
이재철 목사 부부는 총이나 칼은 장난감으로 부적절하다고 본다. 나누기에도 적합하지 않아서 혹시 선물받게 되면 쓰레기통에 버린다. 어느날 밖에서 승윤이가 총을 얻어왔다. 기뻐서 하루 종일 갖고 놀았다. 그러다 아빠와 엄마에게 총을 겨누며 '손들어'하고 외치기 시작했다. 부부는 반응하지 않았다. 승윤이가 '빵, 빵'하면서 총을 쏘았다. 그래도 꼼짝하지 않았다. 그러니 승윤이가 '엄마 왜 안 죽어요. 빵 그러면 죽어야 되요'. 엄마는 '그건 총이 아니니까 엄마는 죽지 않아. 그리고 엄마에게 총을 쏘는 사람은 엄마 아들일 수 없어요'라고 답했다. 아빠에게도 마찬가지 대화가 오갔다. 그날밤 승윤이는 행여 엄마아빠가 총을 치워버릴까봐 염려하여 자기 팬티 속에 넣어놓고 잔다. 며칠을 그렇게 보내다가 관심을 잃었다.
이를 두고 이재철 목사는 "당신은 혹 당신의 자녀들에게 총이나 칼 같은 장난감을 사주고, 또 아이들이 당신을 향해 총을 발사하는 순간 '악'하면서 멋지게 죽어주는 연기를 하고 있는 건 아닙니까?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놀이를 아무 거리낌 없이 하게 하면서도 그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며 평화의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바로 그런 것을 가리켜 망상이라 하지 않겠습니까?"하고 글을 맺는다.
'잔혹동시'에 대한 저자의 해석과 이재철 목사 입장은 아무래도 대조적이다. 이 목사 입장이 보수적이고, 가족 삼각형 구도를 강화시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키우더라도, 가부장성을 뛰어 넘을 수 있다.
<아이에게 배우는 아빠>에 나오는 또 다른 일화를 보자. 그 집은 남자 아이들이 4명이다. 그렇다보니 필요한 것을 스스로 해결한다고 한다. 어느날 아이들이 식사 중에 필요한 것은 (엄마에게 부탁하지 않고) 무엇이든지 스스로 가져오기로 했다. 아이들이 식사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하며, 아빠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했다. 엄마는 아빠가 밖에서 고생하셨으니 집에서는 쉬시고, 예외로 하면 어떻겠냐고 했다. 승윤이와 승주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아이들이 좋은 품행을 스스로 익히겠다는데 아빠만 불참할 수 없었다. 아빠도 그렇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아이들이 먼저 밥 다 먹고 거실에 가서 놀았다. 식탁에는 부부만 남았고, 아빠는 작은 목소리로 엄마에게 '애들이 안 볼 때 밥 좀 퍼다줘요'라고 말했다. 그 순간 등을 돌리고 앉아있던 승윤이가 소리쳤다. '아빠! 애들이 안 본다고요? 난 봤어요!' 아빠는 승윤이의 질책을 받고서 밥을 퍼왔다. (애들이 안 본다고요?)
아주 통쾌한 장면이다. 물론 이런 일이 있어도 엄마아빠가 뿌리 깊게 내면화된 가부장성을 반성하고 평등한 모습으로 살아가진 않았을 거다. 하지만 분명,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얼 중요하게 여겨야하는지는 잘 느낄 수 있다.
'생명감수성'의 중요한 관점 중 하나는 '억울한 일 없게 하는 것'이다. 모든 이에게 같은 기준을 적용할 수 없다. 원칙과 기준을 세울 필요가 있으나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반응하는 게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율법이 되고, 경직된 문화를 갖게 된다. 관건은 서로 이해할 수 있고, 존중 가운데 배려할 수 있어야 하는 점이다. 혹시 이걸 놓친다면 창백해지기 십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