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태엽 오렌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2
앤소니 버제스 지음, 박시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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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친구의 소개로 접하게 된 책이다. 자극적이고 조금은 음침한 내용일 거라 예상했다. 친구의 독서 취향도 그렇고, 그런 친구가 추천한 책이다 보니, 자연스레 그런 내용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표지를 보고선 처음에 나는 이 텍스트가 인디언을 배경으로 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친구가 추천해주고, 지금에 직접 읽게 되기까지 줄곧 인디언 학살에 대한 얘기일거라 생각해왔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전혀 다른 세계를 배경으로 삶고 있다. 현대를 배경으로 한 비행 청소년의 성장과정 아닌 과정을 보여주는 책이었다. 생각과는 달랐지만, 생각 이상의 것을 보여준 책이다.


이야기는 주인공 ‘알렉스’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식으로 시작된다. 따른 화자가 나오지 않고 말이다. 비행 소년인 알렉스의 행동을 보다보면 정말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놀라울 게 많다. 가게를 부수거나 금품 갈취는 물론, 가정집에 들어가 아녀자를 성폭행 하는 것은 물론이요, 결국엔 한 할머니를 살인하기까지 한다. 거의 초중반 부분이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데, 정말 읽다가 몇 번 입술을 깨물었는지 모르겠다. 눈살이 찌푸려지는 알렉스의 행동에 정말 이런 학생이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렇다보니 자연스레 이 아이가 나중에 교도소에 가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조금의 난해한 기분이 든 것도 사실이다. 막상 교도소에 간다니 뭔가 이 알렉스라는 아이가 굉장히 안쓰럽게 느껴졌다. 분명히 잘못을 저지른, 인륜에 어긋난 행동을 한 아이지만, 이 사건을 서술해가는 알렉스의 화법 때문일까. 어딘가 불쌍하게만 느껴졌다. 읽으면서 정말 인물에게 말린다는 생각이 든 것은 처음이었다.


전반부는 비행 청소년인 알렉스가 저지른 사고와 그로 인해 교도소에 가게 되는 것이 중점을 이루고, 후반부에는 그런 알렉스가 새로운 개조 아닌 개조를 받는 내용과, 교도소에서 나와 세상으로 나와 겪게 되는 갈등이 주를 이룬다. 나는 후반부가 조금 섬뜩하게 느껴졌다. 일부러 잔인한 영화를 알렉스에게 보여주어 그것이 역겨운 일이라는 것을 자각시키고, 무의식으로 인해 혹여나 그런 일을 벌이게 되거나 보았을 때 자연스레 그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그것도 눈을 감지 못하게 집게로 짚어 놓거나, 팔다리를 묶어놓는 등.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알렉스를 개조하는 방법이 물론 효과는 있었지만, 그것이 소설의 끝마무리까지 이어지지 않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런 식으로의 개조는 한 인간을 끝까지, 완전히 새롭게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 같다. 영화를 보여주거나 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뭐라 할 말이 없다. 정말 나도 보면서 아, 이런 기분이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사실 나는 아직 이 책을 깊이 이해하진 못했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정계에 대한 이야기가 특히 그런데, 정확히 그것이 무엇을 지칭하는지 모르고, 그 당시의 배경지식이 없으니 무슨 내용인지 잘 몰랐다. 그저 표면적으로 드러난, 이 알렉스라는 아이에게 닥친 일을 사람들이 정계와 연관 짓는다는 생각뿐이 못했다. 물론 그것이 큰 주된 내용이긴 하지만, 조금의 배경지식이 있었으면 좀 더 읽는데 수월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처럼 배경지식에 대한 필요성을 깨닫게 해준 책은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이 <시계태엽 오렌지>를 읽으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알렉스에게 몰입해 있었다. 책을 다 읽고 이렇게 기록을 남기는 지금, 알렉스라는 아이가 여전히 머릿속을 맴돈다. 비록 비행청소년에 못할 짓을 많이 한 아이지만, 이렇게 여운을 남기는 걸 보니 분명 매력적인 캐릭터임은 틀림없는 것 같다. 앞으로도 이런 비슷한 유형의 인물들이 소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아졌으면 한다. 재미있고 유쾌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니 말이다.


이 책은 정말 속도감 있게 읽혀진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책장이 넘어가고,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는 부분도 속도감 있게 넘어간다. 그렇다 보니 나도 자연스레 몇 시간 만에 다 읽게 되었는데, 정말 읽고 나서도 한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만큼 강렬하면서도 재미있는 책이었다. 비행청소년에 대한 자기성찰이랄까, 화법으로 내용을 말해주니 그런 생각도 들었다. 처음 예상했던 강렬한 캐릭터는 비록 아니었지만 무척이나 마음에 든 주인공 캐릭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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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의 결혼식
한지수 지음 / 열림원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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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의 결혼식>에 실린 7편의 단편이 제각기 다른 분위기와 느낌을 가지고 있어서 조금 혼란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신선하게 느껴졌다. 대부분의 작가들의 단편집을 보면 그 분위기가 하나로 통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자정의 결혼식>은 여러 가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서 여러 권의 단편집을 읽는 것 같았다. 물론 그만큼 읽는 내내 조금은 혼란스러웠던 것도 사실이지만 말이다.


이 소설집에 든 단편들이 전부 마음에 들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들었던 단편은 <이불 개는 남자>와 <자정의 결혼식>,<페르마타>다. 물론 이 세편의 분위기도 제각기 다르다. <이불 개는 남자>는 무난히 흘러가는 분위기라면, <자정의 결혼식>은 조금은 끈적끈적하면서도 몽롱한 분위기이고, <페르마타>는 조금은 어려운, 그렇지만 힘차게, 속도감 있게 나가는 분위기였다. 이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단편을 뽑자면 나는 <이불 개는 남자>를 뽑을 것이다. 소설가 지망생인 ‘나’라는 캐릭터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가장 마음에 든 문장들도 많았는데, 그 중 하나만 뽑자면 ‘99%의 문제를 안고도 끄덕하지 않던 관계가 1%가 더해지면 와르르, 끝장나는 거 알아?’ 하는 문장이었다. 굉장히 감각적이면서 허를 찌르는 문장들이었다. 예전의 나라면 몰랐을, 무슨 소리지? 하고 넘어갔을 수 있을 법한 문장이었지만, 지금의 나에겐 가장 공감 가는 문장이기도 했다.


나는 이 단편집을 읽으면서 아기자기하면서도 귀여운 표지와는 다르게 소설들이 어딘지 모르게 조금씩 틀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틀어졌다는 게 소설의 방식이 틀어졌다는 게 아니라, 인물이 조금은 어딘가 부족함, 결함을 가지고 있다고 절실히 느꼈다. 사실 이것은 소설의 기본요소인데도 유독 이 소설집을 보면서 그것이 도드라져 보였다. ‘결핍’이라는 단어가 제일 먼저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이 소설집은 어떻게 보면 요즘 나오는 여타 소설집과는 달리, 흥미위주가 아닌, 조금은 진지하게 읽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소설집의 분위기처럼 화자들이나 시점들도 다양하다. 자궁이 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서술해가는 <배꼽의 기원>과 ‘당신’이라는 인칭대명사를 사용하고 있는 <자정의 결혼식>이 그러하다. 이 두 소설은 대부분 소설에서 사용되는 1인칭이나, 3인칭이 아닌, 새로운 1인칭이 아니면서도 3인칭이 아닌 그런 인칭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을 2인칭이라고 볼 수 있을 지는 의문이지만, 확실히 1인칭이나 3인칭은 아닌 것 같다. 이러한 인칭이 이 두 편의 단편에서는 알맞게 사용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배꼽의 기원>이 그러했는데, 정말 신선했고 재미있었다. 무엇보다 신선했다는 점이 가장 좋았다. 솔직히 ‘배꼽’이라는 것에 대해 이렇게 자세히 서술해 나온 단편이 없었기도 했고, 또 자궁이 화자가 되어 나온다는 것을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처음 읽었을 땐 이해가 잘 가지 않았던 부분도 많았지만, 두 번째 읽었을 때 아, 이런 내용이구나 하는 느낌을 갖게 해주면서 조금의 통쾌함까지 맛보게 해준 소설이었다. 이것이 인칭에 대한 효과인지, 아니면 신선함이 안겨준 효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찌되었든 가장 신선하고 눈이 간 소설이었다.


7편의 단편을 읽으면서 여러 개의 색깔이 떠올랐다. 제각기 다른 색을 뽐내면서 저마다 자기의 이야기를 해내가는 7편의 단편. 앞에서 말했듯이 요즘이나 그전에 나왔던 단편집과는 확연히 다른 길을 보여주고 있는 소설집이다. 뒷부분에는 조금 머리가 아픈, 생각하면서 읽어야 하는 부분도 없지 않아 있지만, 이 책도 역시 속도감이 있어서 그런지 머리가 아프면서도 빨리빨리 책장을 넘기는 부분이 있는 듯하다. 페이퍼로 읽었을 때와 달리 책으로 읽어보니 속도감 면에서도 확연히 차이가 났고, 소설의 분위기나 서사도 확연히 눈에 드러났다. 재미있었다.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는 한 권의 소설집. <자정의 결혼식>이라는 표제작을 비롯해 6편의 단편들 하나하나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결핍으로 인해 이루어진 인물들도 마찬가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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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국영이 죽었다고?
김경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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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상 수상 작품집이나 올해의 좋은 소설집을 보면 매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작가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나온 책은 아직 한 권도 접해본 적이 없는데, 그런 작품집으로 나온 작품들은 매번 내가 그 책을 읽게 만든다. 김경욱. 나에게 있어서 김경욱 작가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작가임에도 작품을 신뢰하게 만드는 작가이다. 어딘지 박식해 보이는 글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구성, 매번 흥미를 돋우는 첫 문단 등. 그의 글을 보면 읽고 싶어진다. 다른 작가들에게선 느껴보지 못한 느낌을, 그의 작품, 그것도 첫머리에서 강렬하게 느낀다. 그러면서도 그의 이름으로 나온 책은 매번 기회가 되지 못해 읽지 못했는데, 요번에 와서야 읽게 되었다. 그의 단편집 <장국영이 죽었다고?>는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이야기를 담은 9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중에서 맨 마지막에 수록된 <나가사키여 안녕>은 조금은 생소한 서사와 사건을 다루고 있어 비록 정독을 하진 못했지만, 나머지 8편의 수록작들은 모두 각각의 이야기들로 나를 끌어들였다.


그의 이름으로 난, 소설을 읽고 난 내 첫 느낌은 매우 난해하다. 좋은 듯 하면서도 내심 너무 기대를 해서인지 실망감도 물론 있었다. 좋았던 점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진행 된다는 점, 다양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과 각각의 단편들이 자신 만의 색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자신 만의 색이 각 작품마다 달랐다는 말은 아니다. 모두 비슷비슷한 구성과 스토리,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데, 한 편씩 읽어나가다 보면 그 이야기들이 자신만의 색을 만들어 낸다. 이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낭만적 서사와 그 적들>이라는 단편과 <페르난도 서커스단의 라라 양>,<당신의 수상한 근황>,<장미정원의 아름다운 원주민>이라는 단편이었다. 이 네 편의 단편들은 저마다 제 각기의 이야기와 분위기를 이어간다. 그런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고, 또 나를 끌어당겼던 것 같다. 이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바로 <장미정원의 아름다운 원주민>이었는데, 가장 좋았던 것만큼, 아쉬웠던 점도 많았다. 내가 잡아내지 못한 것일 수도 있는데, 이야기가 도입부와 전개에 비해 후반부가 너무 흐지부지했던 것 같다. 조금은 정확한 것을 좋아하는 나이기에, 김경욱 작가가 좀 더 뚜렷한 결말을 만들어 주었음 했다. 물론 이 결말이 흐릿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암시 아닌, 암시를 쓰다 보니 너무 짜임 없이 결말이 이루어진 것 같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장미를 묘사하는 부분과, 백골이 발견되는 그 장면은 눈앞에 그려질 정도로 선명했다. 정말 내 앞에 큼지막한 장미꽃송이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장미정원의 아름다운 원주민>은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만큼, 아쉬움도 다른 작품들보다 더욱 뚜렷하게 느낀 작품이었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김경욱의 글을 보면, 지식인이라는 느낌이 든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물론 이 작가의 학벌이 그런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곤 생각하지만, 이 작품집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오히려 스피드 있게 전개되는 이야기들이었던 것 같다. 어렵거나 하는 것은 없었다. 단지 너무 모호하게만 끝나버리는, 너무 열린 결말 아닌 결말로 가버리는 점이 너무 아쉬웠다. 위에서 말했듯이 <장미정원의 아름다운 원주민>도 그렇지만, <당신의 수상한 근황>도 마찬가지였다. 마지막 부분에서 차가 뒤집힌 채 구급요원을 기다리는 부분이 너무도 급하게 마무리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이야기의 포커스의 다른 데로 맞춰져 있긴 하지만, 그런 결말은 너무도 쌩뚱 맞았고, 너무 빠른 듯한 느낌을 들게 했다. 다른 단편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이 <장국영이 죽었다고?>를 읽었을 땐 그런 느낌들이 가장 주를 이루었다. 책을 읽고 이렇게 기록을 남기는 지금도 아쉽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니 말이다.


이제야 작가 본인의 이름으로 나온 책을 처음으로 읽었으니, 다음 작품들도 기대가 된다. 그렇게 꾸준히 좋은 소설들을 발표하는 그가 부러우면서도 신뢰가 간다. 이번에 조금 아쉬움이 있다 하더라도, 이 작품집이 나온 시기를 고려해봤을 때, 그것이 계속 이어져 왔을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제 김경욱 작가가 발표한 최근 작품들을 읽어보면 그런 아쉬움도 가라앉을 거라 생각한다. 내가 처음 접한 작품집이었으니 아쉬움도 컸지만, 또 그에 비하는 만족감도 얻었다. 이 이후로 어떤 글을 발표했을 지 궁금증이 일면서, 다른 단편집들과 장편들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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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스트의 책상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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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 작가 하면, 거의 재미없는 소설을 쓰는 작가라는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 그녀의 작품을 단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는데도, 왠지 어려우면서, 까다롭고 재미없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매번 들었다. 사실 내가 배수아 작가를 알게 된 것은 요번 년도 이상 문학상 때문이었다. 이상 문학상에 수록된 <무종>이라는 작품을 통해 배수아 작가를 처음 알게 되었다. 물론 그 작품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약력을 보니 제법 많은 책들을 냈고, 또 어딘가 독특해 보이는 소설 분위기 때문인지 관심이 갔다. 그러던 중 여름에 케이블 티브이에서 방영하던 배수아 작가의 낭독 회를 보게 되었고, <에세이스트의 책상>이라는 작품을 알게 되었다. 처음 읽어본 배수아 작가의 작품은, 내가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생각, 재미없다는 생각을 어느 부분에서는 인정, 또 어느 부분에서는 부정하게 했다. 커다란 사건 없이, 들쑥날쑥한 전개, 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씁쓸하면서도 또 담담한, 한 편의 연애소설과 성장소설을 동시에 보는 듯한 느낌을 들게 하는 책이기도 하다.


뭔가 새로운 느낌의 소설이었다. 조금 난해했던 부분은 있었지만 그런대로 잘 풀리면서 읽혔는데, 읽는 내내 새로운 느낌이라는 생각을 계속 하게 되었다. 어딘지 모르게 안정감 있으면서 조곤조곤하게 말하는 분위기를 주는 문체가 아무래도 그런 느낌을 주게 한 것은 아닌가 싶다. 읽으면서 마치 소설의 무대인 외국에 내가 와 있는 느낌도 갖게 해주었다. 사실 음악에 대한 묘사가 많이 나오는데, 그 부분이 도입부분에도 나오기 때문에, 처음 배수아 작가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는 채로 읽을 때는 정말 재미없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 그 음악에 대한 부분이 지나고 뒷부분으로 흘러가자, 뚜렷한 사건이 없는데도 마치 홀리듯 이야기를 읽어 내려갔다.


읽으면서 내가 가장 난해했던 것은, M의 존재였다. 나는 아직도 이 M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잘 모르겠다. 분명히 남성에 대한 묘사인데, 뒷부분에는 스커트를 입었다는 식의 표현이 나와 여자였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조금 난해했다. 하지만 가장 마음에 들었던 인물은 바로 이 M이다. 요아힘이라는 인물이 물론 주인공 인물이 아니고, 이 M이 주인공 인물이지만, 이렇게 존재감이 희미한 주인공 인물도 없을 것이다. 언어학을 전공하였고, 책이나 음악을 좋아해 그것들을 구입할 때엔 돈을 아끼지 않는 인물. 어딘지 내가 닮고 싶은 캐릭터였다. 나도 저렇게 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M이 나오는 매부분마다 하게 되었다. 소설을 읽는 내내 나와 M이 헤어지는 부분을 제외하곤, 내내 M은 물과 같이 조용한 남자일 것 같았다. 한마디로 이 <에세이스트의 책상>에 분위기와 완벽히 호응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처음 이 소설을 보고 단순히 제목만 보고는 에세이집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보니까 장편소설이었고, 읽는 내내 색다른 소설을 읽은 기분이었다. 평에서 그렇듯, 이 소설은 소설이면서도 에세이의 경계에 있는 소설이다. 그렇다보니 소설을 읽는 동시에 에세이를 읽는 기분을 맛보게 해준다. 그래서 일까, 여타 책들보다 조금은 충족감 있게 읽었던 것 같다. 재미없다는, 배수아 작가의 편견을 깨면서 이렇게 이 <에세이스트의 책상>을 읽게 된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방송에서 해준 배수아 작가의 낭독 회를 보지 않았다면, 또 봐놓고서도 그 중에서 한 독자가 <에세이스트의 책상>을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이 책을 읽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주요인물은 나와 요아힘, M이지만, 그 세 인물에 대한 갈등이 뚜렷한 사건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나오는데 내가 잘 잡아내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우선 독서를 마친 지금의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조금은 무난하면서도 큰 갈등이 없는 평탄한 소설이라고 말이다. 물론 지금은 이런 식의 소설이 먹혀들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이렇게 조용하면서도 차분한 소설을, 스펙터클한 작품들의 지쳤을 때 한 번씩 읽어주는 것도 괜찮을 거라 생각한다. 전체적인 내용을 압축하기가 무척이나 난해하면서도, 시제가 계속 왔다갔다 하다 보니 조금 헷갈리는 부분이 많은 소설이었지만, 배수아 작가를 처음 만나는 것으로는 매우 만족했다. 다음 작품은 무슨 작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식이라면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에세이스트의 책상>은 간만에 조용히 읽을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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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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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래>에 대해서라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책 좀 읽는다는 사람들이 모두 이 책을 추천했으니 말이다. 처음 이 <고래>에 대해 설명을 들었을 땐, 야쿠자 이야기 인줄 알았다. 그때 이 책을 추천해주신 분이 말해주신 부분이 바로 칼자국이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는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연히 이 책의 이야기가 그런 쪽으로만 흘러가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자연스레 ‘<고래>는 남자들의 힘찬 이야기 일 것이다’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게 주변에서 이 책을 추천 받았음에도 여태 읽지 않았던 것은, 마땅한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점점 읽을 책 리스트에만 이름을 올리고, 천명관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 먼저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그러다 만난 작품이 <고령화 가족>이었고, 그 책이 너무 재미있었기에 이 <고래>도 읽고 싶었다. 하지만 또다시 리스트에만 이름을 올리기에 그쳤고, 계속 책 읽기를 미루게 되었다. 그러다 무슨 계기가 있었는지 마음잡고 이 책을 읽게 되었고, 읽게 되자 정신없이 빠져들어 읽게 되었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그리고 다 읽고 난 뒤에 든 생각은 한편의 대하소설을 읽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애꾸눈에서부터 시작해, 금복, 춘희라는 세 여자에 이르기 까지 정말 방대한 분량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런데도 그 방대한 이야기가 크게 요동치듯 이어지다 보니 자연스레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게 된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정말 말 그대로 방대한 이야기를 읽을 것 같다는 생각에 빠지게 만든다. 그럴 정도로 이 <고래>는 서사의 힘이 강하다. 무협지나 판타지 소설을 읽는 것보다 속도감이 있고 흥미진진하니 말이다. 마치 이 인물들의 일대기를 파노라마처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다. 그렇다 보니 이 소설을 남에게 추천해 줄때, 줄거리를 요약하기가 무척이나 애매하다. 어느 부분을 말해주기도 뭐하고, 전체적인 이야기를 말해주려면 끝도 없으니 말이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여자’들이다. 내가 <고래>를 읽기 전에 가졌던 남성의 소설과는 무척이나 거리가 멀었던 인물들이다. 그런데 이 여자들이 살아가는 삶이 정말 남성이 살아가는 삶보다 역동적이고 고단하고, 천편일률적으로 다양하다. 그러한 여자들의 삶을 장작 400여 페이지에 빽빽이 다루다 보니, 앞에서 말했듯이 대하소설을 읽는 기분이 드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여자들은 각각 다른 이유로 이야기의 처음을 시작하는데,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소설에서 주로 다루었던 금복이 아닌, 애꾸눈의 여자였다. 애꾸눈의 이야기가 진행되다가 금복의 이야기로 넘어갈 때는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물론 엄청난 분량을 차지한 금복의 이야기를 읽기 전에 말이다. 그래서 이젠 애꾸눈은 안 나오겠구나, 했는데 뒷부분에서 결정적인 일들을 도맡아 하는 애꾸눈을 보자 감격스러울 정도였다. 물론 화재를 일이키는 대목에선 금복에게 마음이 뺏겨 애꾸눈을 욕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한 소설에서 이렇게까지 한 인물에게 집중한 것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물론 애꾸눈뿐만 아니라, 금복과 춘희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진행되어 갈수록 집중하게 되었다. 그러니 한 인물에게만 집중했다고 보긴 힘들겠다. 이 소설을 전체적으로 보자면, 이 방대한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은, 바로 서사와 인물이었다고 생각한다.


소설은 주로 이 인물들의 성공기와 파산해가는 모습들을 보여준다. 그것들이 마치 한 인간이 태어남과 죽어감의 법칙처럼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이 진행되어 간다. 이론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서사의 힘이 이렇게 한 소설을 요동치게 만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실감했다. 소설에서 서사의 힘이 가장 큰 줄기이자 뼈대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알게 된 것 같다.


물론 이 소설이 강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서사가 빠르고 힘차다 보니, 감정 선이 촘촘하지 않다. 아마도 그것은 소설이 이야기에 끌려가다 보니 자연스레 그렇게 된 것 같다. 서사와 감정 선이 두 쪽 모두 완벽히 채워지지 못해 조금의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도 그러한 감정 선이 약하다는 약점을 서사로 눌러버리고, 오히려 장점이 더욱 강세해 보이는 소설이다. 천명관의 <고령화 가족>도 그런 식이었는데, 다음 장편에서는 서사뿐만이 아닌, 감정 선이 촘촘하게, 디테일 하게 살려주었으면 좋겠다. 서사의 힘이 무척이나 돋보였던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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