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대리의 트렁크
백가흠 지음 / 창비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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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의 스포 포함!> 

 

 

요즘 들어 뉴스를 볼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혀온다. 세상에는 밝은 면보다 어두운 면이 훨씬 더 많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이 어두운 면보다 밝은 면이 몇 배는 더 많기 때문이지, 실은 어두운 면이 밝은 면보다 더 많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뉴스를 볼 때마다 나오는 사건 사고들. 성폭행이나 살인 사건 등을 볼 때면 숨이 턱턱 막혀옴과 동시에 불안감이 찾아든다. 나에게도 일어나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이 아니다. 이런 세상에서 내가 앞으로 살아가야 한다, 하는 불안감이다. 어둡고 칙칙한, 눅눅한 일들이 밝고 깨끗하고 산뜻한 일들보다 곱절은 더 많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금씩 소외되어 가는 것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백가흠 작가의 <조대리의 트렁크>을 읽으면서 소외되어 가는 인물들, 그리고 어둡고 눅눅한, 예를 들어 살인이나 감금과 같은 일들이 벌어지는 텍스트에서 참다함을 느꼈다.


<조대리의 트렁크>에 수록된 총 9편의 단편들은 저마다 악행들이 등장한다. 사기, 살인, 감금, 폭력 등. 그러한 일들은 이제 우리 뉴스에서 하루에 한 번씩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소스가 되었다. 보기만 해도 눈앞이 아찔해지는 사고들이 이 <조대리의 트렁크>라는 책 한 권에 모두 모여 있다. 읽으면서 참다함을 느꼈던 이유가 보다 명확해지는 순간이었다. 가장 인상이 깊었던 단편은 그 중에서도 가장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악행들이 일어나지 않는 <사랑의 후방낙법>이었다. 유도 선수인 유진과 민숙이 등장하며 이끌어가는 내용들이 각각의 테마에 맞게 잘 어우러졌다. 읽으면서 약간 동성애 느낌이 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자연스레 그런 분위기가 배어나온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이다. 원래 대개는 가장 파격적이고 읽고 난 뒤에 우리들을 파국으로 몰아치는 이야기가 가장 인상 깊게 남는 법이다. 하지만 이 <조대리의 트렁크>에서는 너무나도 그런 이야기들이 많았고, <사랑의 후방낙법>이외의 작품들이 대개 그러한 소스들을 가지고 있었기에, 오히려 잔잔한 이야기이면서도 무난했던 이 <사랑의 후방낙법>이 가장 인상에 깊게 남았던 듯싶다. 파격에 익숙해지면 오히려 잔잔한 이야기가 더욱 더 부각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조대리의 트렁크> 소설집에 실린 9편의 단편들은 저마다 부재하는 인물들, 소외된 인물들이 등장한다. 섹스돌과 사랑을 나누면서 위안을 얻는 남자나, 청소년 여자아이를 거두어 주었지만, 그 아이와 친구들에게 이용당하고 결국은 돈까지 빼앗기는 할아버지, 동성 애인을 잊지 못하는 모텔주인 남자, 아기를 얻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지방에 숨어사는 여자나, 아이를 빼앗기고 죽음을 당하는 남자, 에어컨 설치사와 잠자리를 가진 후에 에어컨을 설치하지만 결국 사기로 판명되어 도로 에어컨을 수거당하는 남자 등. 모두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평범’이라는 개념에서 조금씩은 벗어난 인물들이다. 그런 인물들이 겪는 상황은 또한 참담하기까지 하다. 아이를 빼앗기고 죽는 여자와 같은 인물은 더더욱 말이다. 이런 인물들이 겪는 상황들은 우리에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악행들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백가흠 작가의 작품을 읽기 전 나는 막연히 백가흠 작가는 유쾌한 작가일 것이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작품들이 유머가 있고 경쾌할 것이다 하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저 밑바닥까지 내려앉는 우중충함과 어두움이 가득했다. 대체 나는 왜 백가흠 작가의 작품들이 유머러스하고 경쾌할 거라 생각했던 것일까. 지금 생각해보면 뚜렷한 이유를 댈 수 없는데도 그 당시에 뚜렷하게 그런 생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게 조금은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조대리의 트렁크>도 처음에는 유머러스한 작품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어둡기 그지없는 소설집이었다. 처음에는 당혹감에 불편하기까지 했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읽어나갔던 이유는, 어두운 면도 결국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에 일어나는 일들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금은 슬픈 말일지도 모르겠다. 어두운 일들이 자주 일어나는 일들이라니. 읽으면서 앞에서 말했듯이 뉴스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일들이 떠올랐고, 그러한 일들을 텍스트로 마주했을 때에는 당혹감에서 불편함, 곧이어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나를 발견했다. 나도 이제는 악행을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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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랑흰둥 2012-08-22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백가흠 작가님 첫 장편소설 <나프탈렌> 낭독회 소식 알려드려요.
9월 1일 (토) 3시 EBS라디오연재소설 낭독의 힘!
좋은 정보가 됐으면 좋겠네요. ^^
http://home.ebs.co.kr/radionovel/index.html
 
내 이름은 망고 - 제4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36
추정경 지음 / 창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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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해외여행 경험이 없다. 가보고 싶은 나라는 무척이나 많지만 여러 가지 여건 상, 해외여행은 아직 나에게 꿈과 같은 존재이다. 그런 내가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책이나 영상매체 등을 통해서 보여지는 외국의 모습들이다. 요즘은 텔레비전을 틀기만 해도 해외 여러 나라의 모습들이 쏟아진다. 그렇지만 대게 일정한 선을 긋고 보여지는 모습들이라 아쉬울 때도 많이 있다. 그래서 나는 주로 여행담을 기록한 책을 통해서 간접적인 체험을 하곤 한다. <내 이름은 망고>도 마찬가지였다. 캄보디아라는 나라에 대해서는 이름만 알고 대략적인 기후, 그리고 생활환경과 같은 가장 기본이 되는 지식만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이 <내 이름은 망고>를 통해서 조금은 그 나라에 대해서, 심도 깊게 알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내 이름은 망고>는 전형적인 청소년 소설이다. 조금은 감정적이게 대처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는 점에서부터 나는 <내 이름은 망고>가 말 그대로 청소년들의 소설, 또는 청소년이 주인공일 수밖에 없는 제한을 가진 소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동안 청소년 소설을 많이 읽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몇 안 되게 읽은 청소년 소설 속 인물들은 대체로 감정적인 인물들이었다. 보통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인물이 절제하고 감정적이기 보다는 이성적인 반면, 청소년 소설 속 인물들은 꼭 그래야만 한다는 방식이 있는지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감정을 있는 대로 다 들어낸다. 마치 그렇게 해야지만 소설이 이끌어져 나갈 수 있다고 생각되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이해를 못하는 것은 아니다. 청소년이란 존재 자체가 아직은 미성숙하고 ‘질풍노도의 시기’라는 타이틀이 붙을 정도로 이성보다는 감성이 앞서나가는 존재들이니 말이다. 하지만 언제나 ‘예외’라는 법이 있다. 청소년들이 백이면 백 다 감정적으로 나가지는 않는다. 그런데 내가 읽은 청소년 소설들은 대부분 감정적으로 상황이 이어지고, 그 상황이 다른 사건을 몰고 오는 형식을 취한다. 여기서도 수아가 무능한 엄마에게 화를 내고, 결국 엄마가 집을 나가버리고, 엄마의 가이드 일을 대신하는 식도 마찬가지다. 이야기를 전개시키기 위해선 무조건 감정적으로 대처하는 인물이 있어야만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조금 다른 점이라면 <내 이름은 망고>에서 보다 더 감정적으로 대처하는 인물이 주인공인 수아보다 엄마인 지옥이라는 점이다.


<내 이름은 망고>를 읽는 내내 추정경 작가가 직접 체험했다는 점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세세한 부분 즉, 디테일을 잘 살려냈다. 앙고라 아트와 무희들의 춤추는 부분 등이 이곳을 직접 체험했다는 증거가 된 기분이다. 하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너무도 설명적인 부분으로만 치우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보면 적절히 필요한 부분을 잘 집어넣었다. 텍스트는 작가 자신이 직접 체험한 것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직접 겪은 일을 풀어냈을 때 그 시너지가 보다 더 크게 발한다. <내 이름은 망고>가 그런 경우라고 생각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대부분의 청소년 소설들은 감정적으로 대처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것에 비해, <내 이름은 망고>에서는 엄마인 지옥이라는 캐릭터가 주인공인 수아보다 감정적이라는 점이 새롭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점들이 억지스럽게 느껴지거나 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이후 사건을 전개시키기 위해서는 꼭 이 인물이 그래야만 했지만, 그런 걸 따지기 전에 지옥이라는 인물이 감정적 인물이라는 점이 공감이 되었고, 그런 캐릭터를 이해시키기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후반부에 사고 관련 부분이 나는 조금 우습게 느껴졌다. 결국은 아빠가 사고를 일으켰다는 점에서 아,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하지 않더라도 더욱 다양한 이야기를 해낼 수 있었을 텐데, 왜 이렇게만 흘러가야만 하는 건가, 왜 청소년 소설에는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거부하고 꼭 가족사에만 얽매여야만 하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후반부에서 아쉬움과 함께 앞에서 느꼈던 새로움과는 조금 다른, 실망감 아니 실망감을 느꼈다. 물론 수아의 트라우마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긴 했지만, 다른 인물을 통해 가족사가 아닌 다른 이야기로 했으면 이제까지와는 조금은 다른 청소년 소설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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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편제 이청준 문학전집 연작소설 2
이청준 지음 / 열림원 / 199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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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사실 우리나라 가락에 대해서 크나큰 관심이 없는 편이었다. 자주 들을 수 있는 기회도 거의 없다시피 했고, 듣더라도 다 비슷비슷한 가락에 ‘한의 정서’라는 교과서적인 느낌이 강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나라 가락에 마음이 가지 않았던 점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러던 중 우연히 이청준 작가의 원작으로 <서편제>라는 뮤지컬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우연히 뮤지컬 <서편제>의 한 부분을 보게 되었다. 그 순간, 빠져들게 되었다. 처음에는 낮은 음과 웅얼거림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후반으로 치닫을 수록, 말 그대로 ‘한의 정서’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비로소 우리나라 가락에 맛에 빠져든 것일까? 아리랑을 듣더라도 아, 그렇구나, 하는 생각에 멈췄던 나에게는 엄청나게 크나큰 발전이었다. 그렇게 되자, 자연스레 이 뮤지컬의 원작인 <서편제>의 관심이 갔다. 그리고 원작의 작가가 바로 이청준 작가라는 사실을 알고 기대감이 무척이나 컸다. 그리고 이 책을 다 읽었을 때, 그 기대치를 뛰어넘거나 하진 못했지만, 내가 예상했던 것만큼의 파장이 나를 찾아왔다.


소리를 하기 위해, 한 남자, 그리고 그의 딸과 북장단을 맞추는 남자아이가 팔도를 돌아다닌다. 남자아이는 자신의 어머니를 죽게 한 남자에게 복수를 하려고 이를 간다. 하지만 점점 그의 소리에 동화되어 가고,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 남자를 죽이려 하지만, 결국 죽이지 못하고 둘을 떠나게 된다. 그 이후로 남자는 딸의 눈을 멀게 하여 오로지 소리가 나오는 목과, 귀에게로만 신경이 가게 만든다. 말 그대로 여자의 ‘한’이 시작되는 지점이 바로 이 부분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남자를 죽이려는 남자아이의 모습에서도 한의 모습이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어느날 갑자기 찾아와 자신의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아이를 낳게 하고, 또 그런 어머니가 죽게 만드는 남자를, 남자아이는 용서할 수 없었으리라. 그를 죽일 생각으로 그를 따라 전국팔도를 돌아다니며 북장단을 맞추었으니, 그의 북장단에도 얼마만큼의 한이 서려 있었으리라. 하지만 점점 남자에게 동화되어 가는 자신을 발견하고, 더는 그렇지 않으려 남자를 죽이려고 하지만, 모든 것을 알고 있던 남자를 보고, 결국 떠난 남자 아이. 그리고 훗날 자신의 누이를 찾으러 다니는 남자 아이. 그리고 그 누이가 눈을 멀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서로 자신이 누구라 말하지 않고 날이 샐 때까지 장단과 소리를 주고받는 둘의 모습. 그렇게 이 <서편제>는 우리나라의 ‘한’의 정서가 형성되고 해소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나에게 우리나라 가락에는 ‘한’이 있다, 라는 말이 좋게 들리지 않았다. 너무 그것으로만 밀고나가는 거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서편제>에서는 왜 우리나라 가락이 ‘한’이 깃들어 있는지 정확히 짚어주었다. 그리고 그 한을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한을 풀어나가면서 형성되는 감정이 우리나라 가락을 더욱 더 돋보이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마치 변명하듯 우리나라 가락에는 ‘한’이 서려 있어요, 가 아닌, 우리나라 가락에는 ‘한’이 형성되고 해소되는 과정이 드러나 있어요, 그러므로 더욱 더 ‘한’의 정서를 깨달을 수 있게 되었어요, 하는 정의를 내릴 수 있게 만들었다. 이제야 깨닫는다. 우리나라 가락만큼 더 좋은 가락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각각의 단편소설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통해지는, 연작소설 형태의 이 <서편제>를 읽는 동안, 이 당시의 나왔던 소설이, 현재 활발히 활동하는 신진작가들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말이다. 상상력과 흥미를 이끄는 사건이 주로 등장하는 현대 소설과는 달리, 서정적이면서도, 토속적인, 그러면서도 ‘한’을 이끌어내는 이청준 작가의 <서편제>가 무척이나 동떨어지게 느껴졌다. 세월의 차가 있겠지만, 너무도 달랐다는 점이 오히려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어떻게 보면 이 <서편제>를 구닥다리 식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상상력과 사건이 주로 등장하는 현대 소설도 이런 식의 60~80편대 소설을 바탕으로 창작되어지고 있다. 제 3자가 속칭하는 구닥다리식의 작품, 즉 거름이 없이는 새로운 작품, 즉 작물이 자라날 수 없다. 현대 문학들이 비록 다양한 소스들을 가지고 저마다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옛것이 없이는 새것이 없듯, 이 당시의 소설들을 읽어야지만 바탕이 형성되고 그 이후의 소스들을 빨아들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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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휘 2011-08-13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보고 갑니다~^_^
 
안인희의 북유럽 신화 2 - 죽음의 예언에서 라그나뢰크까지, 영원한 상징의 세계
안인희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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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신화>는 다양한 문화 콘텐츠로 우리들에게 선보여졌다. 신들의 세계인 ‘아스가르드’라는 이름은 게임으로, 반지 모티프는 톨킨의 <반지의 제왕>등 다양하게 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북유럽 신화’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이유가 무엇일까. 내가 생각해본 이유는, 바로 ‘북유럽 신화’가 그리스 신자들에게 쓰였다는 점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신들을 절대 신으로 신격화 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을 광명의 신인 발데르와, 그의 아내인 난나의 죽음을 그리기도 하고, 거인족 출신인 로키가 술에 취해 신들에게 욕설을 내뱉고, 발데르를 죽인 게 자신이라는 진술을 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거구인 토르가 거인족에 술수에 말려 망신을 당하는 것과 로키가 형벌을 받는 모습 등을 보여준다. 기존의 우리가 잘 알고 있던 <그리스 로마 신화>와는 조금은 다른 면모다.


신들의 소개와, 세계의 탄생, 그리고 주요 신들의 이야기를 다뤘던 1편과 달리 2편에서는 본격적인 ‘종말’을 향해 가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라그나뢰크와 함께, 불행의 씨앗이 되는 로키의 세 아이의 탄생과, 그 아이들과 신들의 대립, 그리고 결정적으로 광명의 신인 발데르의 죽음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진다. 오딘과 로키의 자식인 늑대 ‘펠리스’의 전통에서 오딘이 죽고, 펠리스는 오딘의 아들에게 죽는다. 로키의 또 다른 자식인 미트가르트 뱀은 토르와 겨루게 된다. 그리고 뱀과 함께 죽게 된다. 오딘과 바다의 아홉 파도 사이에서 태어난 헤임달은, 로키와 싸우다 죽게 된다. 해와 달이 ‘스콜’과 ‘하티’라는 늑대에게 잡아먹히고, 전투는 끝나지 않을 것처럼 이어진다. 그리고 전투가 끝났을 때, 몇몇이 살아남은 신들과, 저승에서 돌아온 발데르와 난나, 인간 한 쌍이 살아남아 새로운 세상을 또 한 번 살아가게 만든다. 이점에서 신화가 마냥 절망적으로 끝나지 않고, 새롭게 살아가는 용기와 교훈을 남겨둔다.


1권에서는 다루어지지 않았던 신들, 예를 들어 헤임달과 오딘의 아내이자, 종종 프레이야와 지위가 동일시된다는 프리그 여신, 전쟁의 신이면서 한쪽 팔이 없는 티르, 황금사과를 지키는 이둔 등 다양한 신들의 이야기가 단편적이나마 이어진다. 짝사랑에 애태우는 오딘이나, 사랑에 눈이 먼 프레이야 여신의 모습도 짧게나마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발퀴레와 노르네와 같은 신들과, 여자 예언자들의 이야기도 촘촘히 구성되어 있다. ‘최후의 전쟁’이라는 어두운 이야기를 꺼내기 전, 못 다한 신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흥미로웠다. 만화로 보지 못했던 이야기들도 있어서 더욱 더 좋았다. 어두운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전야제 같은 느낌이 있긴 했지만 말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북유럽 신화>는 절대적인 신의 모습이 등장하지 않는다. 거인 이미르의 육체로 세계를 창조하고, 물푸레나무로 인형을 만들고, 아홉 세계를 구분 짓는 순간, 멸망은 예고되어 있었다. 오딘은 그런 예언을 알고 있고, 멸망에 대해 철저하게 대비한다. 자신의 성과 프레이야 성에 발퀴레를 시켜 전장에서 맹렬히 전사한 군사들을 되살려 내 끌어 모으는 등의 행동을 통해서 말이다. 시작이 있듯이 끝이 있다, 라는 명제 아래서 시작되는 이야기라, 처음에는 생각되었다. 하지만 훗날 신들이 살아나고, 생물이 다시 돋아나기 시작하는 장면에서는 끝이 있으니 다시 시작이 있다, 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비록 신들은 전처럼 많이 남지 않았지만, 남은 신들이 새로운 세상을 꾸려가고, 잠시 동안이나마 행복하고 살기 좋은 세상을 이끌어 갔으니 말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리스 로마 신화>보다 <북유럽 신화>를 더 선호한다. 신화에 대해서는 그리 많이 아는 편은 아니지만, 앞에서 계속 말했듯이 인간적인 미가 있고 단순히 신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양한 종족들과의 조합을 통해 이루어가는 이야기인 <북유럽 신화>가 더 마음에 든다. 그리고 현재 다양하게 우리 문화 콘텐츠에 적용되어 있다는 것은, 바로 이 신화가 그만큼 영향력이 있고, 사람들의 호응을 살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비록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북유럽 신화’라고 말하면 잘 모르지만, 이야기 자체가 가진 힘과, 다이내믹한 사건들이 지금보다 더욱 더 사람들에게 읽히게 되었을 때, 한때 열풍처럼 불었던 <그리스 로마 신화>를 뛰어 넘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신화에 위아래가 어디 있겠느냐마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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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인희의 북유럽 신화 1 - 신들의 보물에서 반지전설까지, 시대를 초월한 상상력의 세계
안인희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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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신화라고 하면 ‘단군신화’를 가장 대표적으로 꼽을 것이다. 서양 신화라고 한다면 열이면 열 ‘그리스 로마 신화’라고 대답할 게 틀림없다. 신화는 모든 문학의 근원이다. 신화 속에 다양한 이야기 형태들이 현재의 문학의 구도와 기반이 되어 전승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나오는 한 이야기는, 그대로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로 전해졌다. 벽과 벽 사이로 난 작은 틈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사랑을 나누던 원수 집안의 두 남녀가, 달밤에 다른 나라로 도망가기로 하고 정해진 시간에 뽕나무 앞에서 만나기로 하지만, 엇갈림으로 인해 죽음의 길로 들어선 이야기가, 셰익스피어라는 사람을 통해 같은 형태지만, 보다 대중적인 이야기로 재탄생 된 것이다. 이렇듯 신화는 우리나라, 아니 전 세계적으로 문학의 자양분이 되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신화라고 하면, 우리나라 신화는 ‘단군신화’, 서양신화라고 하면 ‘그리스 로마 신화’가 대표적으로 되고, 다른 여타의 신화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생각보다 ‘북유럽 신화’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부분 외눈박이 신인 ‘오딘’에 대해서는 아, 들어 본 것 같은데, 하는 반응을 보일 뿐, ‘북유럽 신화’에 대해 물어보면 그런 신화도 있어? 하는 반응이다. ‘북유럽 신화’를 초등학교 때 알았던 나는, 한창 그 시기에 유행했던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보다 더 역동적이고 인간적인 매력이 있는 <북유럽 신화>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 그리고 이제야 미화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북유럽 신화>를 읽게 되었다. 원본의 <북유럽 신화>는 보다 더욱 더 역동적이었다.


만화로 봤던 <북유럽 신화>와 달리, 이 <북유럽 신화>는 보다 사실적으로, 미화되지 않고 이야기를 전달한다. 프레이야 여신이 브리싱가멘을 얻기 위해 난쟁이들과 키스를 나누었다고 미화된 부분을 이 책을 통해서 원래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서양 신화가 대개 그렇듯 선정적이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대부분의 사랑 이야기가 그랬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연히 어린이들의 시각에 맞춰 출간된 만화들이 미화될 수밖에 없었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만화로 봤던 것보다, 프레이야 여신의 비중이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신들의 여왕이자, 오딘 신의 아내인 프리그 여신이 비중이 작아, 의아했을 정도이다. 프레이야 여신의 이야기 또한 다른 <북유럽 신화>에서 다루던 이야기와 조금씩 어패가 있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신화의 속성에 대해 생각했다. 조금씩 달라지며 전승되었을 신화들. 과연 신화에 정답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누군가는 A라고 전해 들었고, 누군가는 B라고 전해 듣게 되는 신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정답이 없는 신화. 비록, <북유럽 신화>를 기독교 신자들이 집필했다고는 하지만, 신화란 원래부터 전승되어지는 것이 아닌가.


<안인희의 북유럽 신화 1>는 신들의 탄생과, 세계의 탄생, 이그드라실과 오딘, 프레이야, 토르 신에 대해 중점을 두고 이야기가 펼쳐진다. <북유럽 신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지식들을 알려주는 셈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프레이야 여신의 비중이 생각보다 많아 놀랐고, 오딘 신이 탐욕적이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신들의 왕인 ‘오딘’은 지혜로운 현자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그리고 황금을 위해 서로 치고받고 하는 신들의 모습에서 인간미 아닌 인간미를 느꼈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말 그대로 신들을 신격화 했기에 나는 그들에게서 신성성을 더 많이 느꼈다. 그런데 <북유럽 신화>에서는 탐욕스런 신들의 모습과, 치기 어린 모습, 장난치는 모습, 싸우는 모습 등이 다른 서양신화보다 더욱 자세하게 그려진다. 신성성과 함께 신들과 인간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심어준다. 모든 거인들이 두려워하는 토르 신이 겪은 황당한 상황과 조금은 멍청해 보이는 그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서 더욱 더 친밀감을 느낀다고 생각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가 말 그대로 신들의 이야기라면, <북유럽 신화>는 신들도 인간과 다를 바 없다, 신들도 인간과 같다, 하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보다 다이내믹하다는 이야기다. 역동적인 이야기들이 인간들이 아닌, 신들의 모습을 빌어 펼쳐지는 것만 같았다. 신들의 탄생부터 죽음, 최후의 결전인 라그나뢰크 까지. 신들이 죽는다는 것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신이 죽는가? 그렇지 않다. 이점부터가 북유럽 신화가 더욱 인간적인,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신화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대중화되지 못했다는 점이 너무도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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