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위대한 소리들 작고 위대한 소리 시리즈
데릭 젠슨 지음, 이한중 옮김 / 실천문학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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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네 멋대로 써라> 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글쓰기에 관한 책들을 몇 권 읽으려고 도서관에 갔는데 제목이 마음에 들어 빌려왔다. 책은 너무 유쾌하고 재밌고 좋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쓴 또 다른 책 <거짓된 진실>을 읽었는데 이건 또 너무 무겁고 심각하고 생각할 만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번에 읽은 책 <작고 위대한 소리들>(Listening to the land)은 너무 재밌지도, 너무 무겁지도 않은 잔잔한? 책이다.

    데릭 젠슨은 1960년 생으로 콜로라도 광업대학을 졸업하고 동부 워싱턴 대학교에서 문예창작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급진적인 사회변혁운동가이면서 작가, 농부이다. 이 책은 잒가인 저자가 12명의 환경론자, 신학자, 선주민, 심리학자, 여성주의 등의 지성인들과 보다 평화롭게 사는 법을 인터뷰한 내용을 담고 있다. 따라서 독자들은 한 권의 책으로 여러 명의 생각을 읽고, 공감하고, 발견할 수 있다. 나도 모르게 자연을 얼마나 무시하고 있었는지 반성하는 시간이었다. 또한 어떻게 사는 것이 지구와 인간 모두에게 좋은지 다시 한번 생각 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다만 인터뷰어 대부분이 환경과 연관지었을 때 기독교를 좋지 않게 보고 있고,(일부 맞는 말이긴 하지만 틀린 부분도 있다고 생각한다) 또 그것에 대해 잘못된 발언을 한 사람도 있어 조금 아쉬웠다.

 

# 요즘은 우리들 대부분이 도시에 살지요. 그 말은 우리 대부분이 우리 스스로 만들어내지도 않았고 감각 정보나 감각 경험으로부터도 완전히 차단된, 일종의 격리된 감방에 산다는 뜻이에요. 우리가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만지는 모든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물이에요. 우리가 받아들이는 모든 감각 정보는 ‘조작된’ 것이고, 그 대부분이 기계를 매개로 전달되는 것이지요. 나는 그런 현실을 견딜 만하게 만드는 유일한 이유는 우리의 감각 능력이 너무 축소되어 더 이상 우리가 뭘 상실했는지도 모르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존 A 리빙스턴

 

# 사랑에 빠지면 상상력은 과로를 합니다.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은 서로를 발견할 방법을 찾습니다. -매튜 폭스

 

# 미디어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현실로 인식하도록 요구받는 것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텔레비전을 볼 때 편집이 많이 되고 속도를 아주 높인 버진의 현실을 보게 됩니다. 그것도 서로 많이 뒤섞인 것을요. 소위 뉴스란 걸 보는데, 그건 사실이라곤 하지만 진작에 찍어둔 것일 수도 있고 실제로 볼 수 없는 대상에 것들일 수도 있지요. 그리고 실제와는 사실상 다른 무엇에 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시간적으로 앞뒤로 조종하며 시간을 압축하기도 하는 허구의 프로그램으로 보게도 됩니다. 게다가 광고와 스포츠가 섞이고 다큐멘터리도 가세하지요. 다큐멘터리는 이전에 일어나 현실을 개조한 허구적 버전입니다. 이 모든 자르고 편집하고, 극도의 효과를 부여한 것들입니다. 카메라는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어서, 우리는 실내에 있으면서 바깥을 구경하게 되지요. 화면에 두 가지 영상이 나오기도 하고, 만화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설령 사실이라 해도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것에 대해 뭐라고 말하건 이미지는 우리 머릿속에 박히게 되어 있어요.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 해도 일단 텔레비전을 보고 나면 머릿속에 콜게이트 치약이니, 맥도날드니,포드 토러스 자동차니, 미클롭 맥주니 하는 것들의 이미지가 불쑥불쑥 떠오르게 되어 있어요. 그런 이미지들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 이미지는 이미 우리의 뇌리에 박혀버리고 맙니다. 그게 광고주들의 목표지요. 광고주는 잘 알고 있어요. 우리 뇌리에다 이미지를 충분히 자주 심어주면, 우리가 신경으로 이루어진 광고판 같은 이미지를 저장해두고 돌아다니다 시장에 가서 그 상품을 볼 때 그 광고판의 불이 번쩍 켜진다는 걸 말이죠.(중략)

혹 텔레비전에 폭력이 없다 해도 텔레비전을 많이 보는 일은 폭력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건 텔레비전을 볼 때 화면에서 활발한 움직임을 보기 때문입니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거기서 일어나는 일에 반응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만, 그것이 텔레비전의 일이고 실제가 아니기 때문에 반응을 억누르게 되지요. 그런 일은 계속해서 반복되게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시청자는 모든 반응을 조용히 속으로 억누르게만 되지요. 뿐만 아니라 지각체계가 너무 빨라지는 문제가 있습니다.(중략)

그러다 텔레비전을 끄고 나면 방 안은 빙빙 돌고 있지도 않고 마구 뛰어다니고 있지도 않지요. 자연으로 나가면 도무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산들바람은 슬슬 불고 강물은 유유히 흐르기만 하지요. 자연에 호흡을 맞추기 위해서는 아주 느리고 조용해질 필요가 있어요. -제리 맨더

 

# 나는 ‘정신적 무감각’이란 것에 대해 광범위한 연구를 해보았아요. <살아있는 죽음: 히로시마의 생존자들>에서 처음으로 소개한 개념이지요. 히로시마의 생존자들에게 무감각은 삶을 지탱해주는 메커니즘이었어요. 감정을 거의 자동적으로 차단해버림으로써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지요. 그러나 파괴행위에 관여하는 집단의 경우 정신적 무감각은 위험한 것이 됩니다. -로버트 제이 리프튼

 

# 최근에 나는 폴 윈터와 참여적 음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어요. 연주자와 객석의 감상자를 나누는 음악과는 대조적인 음악 말이에요. 음악은 우리가 권위주의적 체제에 사회적으로 복종하는 방식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지요. 우리가 음악을 이용하고 듣고 경험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사회구조의 차이를 상상해 보세요. 심포니를 예로 들어 봅시다. 작곡가, 지휘자, 독주자는 섬처럼 고립적인 묘기를 보이고, 청중은 각자의 고립된 작은 공간에 가만히 앉아 겁이 나서 말도 기침도 못하지요. (중략) 규모가 작은 사회의 음악은 나누기보다는 합치지요.-폴 셰퍼드

 

# 에리히 프롬이 한 말이 생각나는군요. “기본적으로 나는 비관론자다. 그러나 낙관론자가 아니라면 나는 자살을 해야 할 것이다” 계속해서 시도해보는 수밖에 없습니다.-아르노 그루엔

 

# 우린 너무 심각하고 진지해요. 우리가 놀이를 하건 도발을 하건 사람들이 들어주거나 봐줄 시간이 없기 때문에 우린 자신의 유희적 에너지를 잊어버리거나 두려워하거나 불신해버려요. 우리의 광대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가버렸나요? -테리 템피스트 윌리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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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마코스 윤리학 돋을새김 푸른책장 시리즈 12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조대웅 옮김 / 돋을새김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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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윤리학에 관한 단어 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선, 우애, 정의, 쾌락, 친애, 행복의 정의는 물론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최고의 선은 무엇인가? 등의 질문에 대해 꼼꼼하게 대답한다. 먼저 다루어야 할 문제를 정의하고, 여러 사상가들의 견해를 평가한 후, 자신의 예비적 의견을 제시하고, 여러 난점과 반론에 비추어 이 의견을 수정할 필요가 있는지 검토하며, 다른 관점을 지지하는 논증을 듣고, 문제의 가장 적절한 해답을 찾아내는 식이다. 와우~ 쾌락은 당연히 나쁜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쾌락이 과연 나쁜 것인가? 라고 질문하는 것을 보며 깜짝 놀랐다. 책을 읽으며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생각이나 일들을 무조건적으로 단정 짓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행복, 덕, 선 같은 단어들은 너무 흔하고 많이 듣는 말이기 때문에 평소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이렇게 깊이 사색하고 정리해놓았다니, 왠지 부끄러워지기까지 하네.

    책 이름에 나오는 니코마코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아들로 그가 원고를 정리하였기 때문에이런 제목이 붙은 것이다. 이 책은 행복에 대한 논설을 모은 것으로, 도덕 철학적 내용을 담고 있다. 그래서인지 조금 어려운 도덕 교과서를 읽는 느낌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BC 384년 그리스 북동부에 있는 마케도니아의 작은 도시 스타게이로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왕실의 의사였기 때문에 그 역시 의술을 익혔고 그 영향으로 그의 저술들 중 해부학, 생리학, 동물학 등 과학에 관한 연구서가 상당부분이다. 그는 17세에 아테네에 있는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서 수학했고 스승 플라톤을 매우 존경하였다. BC 343년 말 그의 나이 42세 경 알렉산더 대왕을 가르치기 위해 펠라로 갔다. BC 323년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아테네에서는 마케도니아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그로 인해 이전에 소크라테스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에게도 신들에 대해 오만하고 무례하다는 날조된 혐의가 씌워졌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를 떠나 칼키스 섬으로 갔고 BC 322년에 위장병으로 죽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 ‘최고의 선’을 실현하는 것이 ‘행복’이라면 이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인간의 삶의 형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향락적 삶이다. 둘째는 정치적 삶이다. 셋째는 관조적 삶이다.

 

# 덕에는 두 종류가 있다. 지적인 덕과 도덕적인 덕이다. 지적인 덕은 대체로 교육에 의해 얻어진다. 그러므로 지적인 덕은 경험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도덕적인 덕은 올바른 습관들이 쌓여서 생긴다. 이런 까닭에 도덕, 윤리를 의미하는 에티케(ethike) 라는 말은 습관을 의미하는 에토스(ethos)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 방종한 사람들이 기쁨을 느끼는 것은 모두 촉각에서 오는 실제적 향락, 즉 먹는 것, 마시는 것, 성교 같은 것들이다. 어떤 미식가는 자신의 목이 학과 같이 길어지기를 바랐다고 하는데 이것은 그가 감촉에서 쾌락을 얻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방종과 결부되어 있는 촉각은 인간이 아닌 동물과 같은 것이므로 비난을 받아 마땅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따라서 그런 것에 쾌락을 느끼는 것은 짐승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체육에서 전신을 마사지한다거나 함으로써 얻는 즐거움은 동물적인 쾌락에서 제외된다. 방종한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 촉각은 신체 전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의 극히 일부분만을 만족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무절제(방종)한 사람은 쾌락을 주는 모든 것을, 혹은 가장 쾌락을 주는 것을 추구하며 욕망에 끌려 다른 모든 것들을 제쳐 놓고 이것들을 먼저 선택한다. 따라서 이런 쾌락을 얻지 못할 때나, 욕망을 채우지 못하고 그저 바라보기만 할 때 괴로워한다. 욕망과 고통은 함께 있기 때문이다.

 

# 우리가 피해야 할 성품에는 세 가지가 있다. 즉, 악덕과 자제력 없음, 그리고 짐승과 같은 품성 상태인 야만성이다. 이와 반대되는 것들은 각각 악덕의 반대는 덕, 자제력 없음의 반대는 자제, 야만성의 반대는 초인간적이고 영웅적이고 신적인 덕이다.

 

# 그러므로 친구란, 좋은 사람에 대하여, 선의를 품고 있어 상대방이 잘 되기를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마음을 서로가 알고 주고받는 사이에서 성립한다.

 

# 한편 젊은 사람들의 우정은 쾌락을 목표로 하는 것 같다. 그들은 감정에 따라 살며,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쾌락을 주는 것, 그것도 바로 눈앞에 있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그들의 쾌락도 달라진다. 그래서 친구가 되는 것도 빠르고 헤어지는 것도 빠르다. 그들의 우정은 유쾌하게 여겨지는 것이 변함에 따라 함께 변하며, 또한 급히 바뀐다.

 

# 이런 까닭에 사랑(에로스적인 사랑)의 상대는 단 한 사람인 것이다. 사랑이란 본래 ‘우정이 지나친 것’으로, 이것은 오직 한 사람에게만 느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 우리는 행복이 하나의 상태가 아니라고 말했다. 만일 행복이 상태라면 평생 잠들어 있는 사람에게도 속하고, 비운을 당한 사람에게도 속할 것이다.

행복은 활동으로 보아야 하고, 활동에는 필수적이고 다른 어떤 것 때문에 바람직한 것도 있는 반면에 그 자체로 바람직한 것도 있다고 한다면, 행복은 다른 무엇을 위한 것이 아닌 그 자체로 바람직한 것에 속해야 한다. 행복은 아무것도 결여되어 있지 않고 자족적이기 때문이다.

 

# 쾌락은 어떤 순간에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운동(활동)’처럼 지속된 다음에 완결되는 것이 아니다. 쾌락을 느끼는 그 순간의 느낌이 그 쾌락의 전체이다. 그런데 쾌락은 활동을 완성시킨다. 삶과 즐거움은 활동과 결부되어 있어서 활동이 없으면 쾌락이 생기지 않고, 활동은 그에 따르는 쾌락으로 말미암아 완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유와 관조처럼 가장 완전한 활동에 따르는 쾌락은 가장 즐거운 것이다.

 

#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은 ‘선’의 추구인데 그중 인간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선’은 ‘행복’이다.

 

# 모든 학문은 정치학에 종속되며 그런 이유로 정치학은 인간의 모든 활동에 있어서 ‘인간에게 최고의 선’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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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비평에서의 실험 동문선 현대신서 103
C.S. 루이스 지음, 허종 옮김 / 동문선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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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관에 가서 어떤 책을 찾고 있었는데 그 책 옆에 C.S.루이스 작가의 책이 있길래 제목도 보지 않고 얼른 가져왔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그 작가의 책을 모조리 읽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읽어야 할 책의 분량이 점점 늘어나 감당이 안되긴 하지만. 지금까지 루이스의 책은 <순전한 기독교>와 또 한권의 책(제목을 까먹었다) 두 권밖에 읽지 못했지만 두 권만으로도 얼마나 글이 깊이가 있는지 쓰는지 느낄 수 있다. 기독교 관련 도서를 많이 쓰기는 하나, 아동 작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작품은 <나니아 연대기>. 극과 극의 글쓰기를 모두 소화할 수 있는 그의 능력이 놀랍다.

   <문학 비평에서의 실험>은 딱딱한 제목에 비해 무척 재미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문학적인 사람들의 독서와 비문학적인 사람들의 독서 방법을 비교하는 내용도 흥미진진하고, 비평가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도 재미있다. 또 소수와 다수가 그림과 음악을 보고 듣는 방식의 차이점을 설명하는 부분도 공감이 간다, 읽는 내내, 맞다, 맞아, 그렇지,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다. 저자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완고하게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밝히고 있다. 그는 단어 하나도 신중하게 사용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천천히 읽어야한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시 곱씹고 생각해봐야 한다. 그런 과정을 거칠 때 이 책은 자신의 의도대로 따라와 준 우리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볼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책에 별을 클릭하여 평점을 매기는 것이 더 싫어졌다...

 

# 그들에게 한번 읽은 책은 죽은 것이다. 마치 다 타버린 성냥이나 날짜가 지난 기차표나 어제 신문처럼 말이다. 그들은 이미 그 책을 사용해 버렸던 것이다. 반면 명작을 읽는 사람들은 같은 책을 일생동안 열 번, 스무 번, 서른 번도 넘게 읽을 것이다.

 

# 비문학적인 청취자들이 오로지 선율만을 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문학적인 사람은 오로지 사건만을 원한다. 비음악적인 사람은 오케스트라가 실제로 만들어내고 있는 거의 모든 소리를 무시한다. 그는 선율만을 따라서 흥얼거린다. 비문학적인 사람은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거의 모든 단어를 무시한다. 그는 다음에 일어날 것이 무엇인지 그것만을 알고 싶어한다.

 

#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는 어떤 이야기의 매력이 오로지 이기적인 성 쌓기에만 의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가 남아 있다. 성공 스토리, 특정한 러브 스토리, 그리고 특정한 상류 사회의 이야기가 그런 것에 속한다. 이런 이야기들은 최하층 계급의 독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독서 유형이다. 왜냐하면 독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최소한 벗어나도록, 이미 그들이 빈번히 사용한 탐닉 속에서 자신들을 확신하도록, 그리고 책과 인생 두 가지 모두에서 가장 소중한 것으로부터 외면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 문학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는 정직한 시험관과 같아서, 그가 의견을 달리하거나 심지어 혐오하는 그런 관점에서 논리를 전개하면서도 조직적이고 설득력 있는 시험지에 최고의 점수를 줄 준비가 되어 있는 시험관 같은 사람이다.

 

# 우리 자신을 비움으로써 우리는 작품을 완전히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우리가 독서하는 동안 판단을 하고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으면 작품의 완전한 수용은 점차 더 실패하게 된다.

 

# 고금을 막론하고 극소수와 모든 여성, 특히 나이 든 여성들은 엘라 휠러 월콕스나 파티언스 스트롱의 운문을 반복함으로써 우리를 당혹스럽게 할 수 있다. 그들이 좋아하는 시는 언제나 격언적인, 따라서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인생에 관한 논평이다.

 

# 하지만 나는 운율의 훈련 없이도 자유시를 수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걷기도 전에 달리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 이런 의미에서 ‘취향’은 주로 연대기적인 현상이다. 여러분의 출생 연도를 나에게 말해보다. 그러면 나는 여러분이 홉킨스 또는 하우스먼을 선호하는지, 아니면 토머스 하디 혹은 로렌스를 선호하는지 알아맞힐 수 있다. (생략) 내 취향에 관해 여러분이 말한 모든 것은 정말로 낡은 유행이 고작이다. 여러분의 취향 또한 얼마 못 가 낡은 유행이 될 것이다.

 

# 이와 유사하게 그가 좋아하는 책이 계속 나쁜 것처럼 보여서, 우리는 그의 취미를 어린 시절의 연상이나 다른 심리적인 사건의 탓으로 돌려야 하는 때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불확실하게 남아 있어야 하고,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언제나 그런 책 안에도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런 비평가들의 신랄함은 빛을 희생한 대가로 얻은 열기이다. 그들은 좋은 독서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의 능력을 향상시키지 못한다. 사람들의 취향을 수선할 수 있는 진정한 방법은 그 사람의 현재 취향을 헐뜯는 것이 아니라 보다 나은 것을 어떻게 즐길 수 있는지, 그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 이들 불침번학파에게 비평은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위생학의 형태가 된다. 그들은 모든 분명한 사고와 실재의 모든 의미와 인생의 아름다움들이 광고와 건전과 영화와 텔레비전에 의해서 위협받고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미디어의 주인들은 ‘먹이를 찾아 배회하면서 주위를 돌아다닌다.’ 하지만 그들은 그 중에서도 특히 활자화된 단어 위를 가장 위험스럽게 배회하고 있다. (중략) 이와 같은 독약에 저항하기 위해 우리의 불침번학파들은 우리의 충실한 경비원이자 탐정이다. (중략) “내가 복음을 전도하지 않으면 나에게 재난 있을진저”라고 말할 수 있었던 바울처럼, 그들은 내가 천박함과 표피성과 그릇된 감상과 그들이 무엇을 감추었든지간에 그것을 찾아내 폭로하지 못한다면 나에게 재앙이 있을진저라고 말이다.

(중략) 인생의 불침번 철학이 잘못된 것으로 마침내 드러난다 하더라도, 불침번 비평이 좋은 책과 좋은 독자가 결합하는 많은 행복을 이미 방해해 왔음에 틀림없다.

 

# 대학의 영문학과에서 우등생의 페이퍼를 쳐다보는 모든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책이라는 안경을 통해 책을 통독하는 것이 증가하는 추세임을 우울하게 주목해 왔다. 모든 희곡, 시, 소설에 관해 그들은 유명한 비평가의 견해를 반복한다. 초서와 셰익스피어 비평에 관한 놀랄 만한 지식이 초서와 셰익스피어에 대한 대단히 부적절한 지식과 공존하고 있다. 우리는 점점 더 개인적인 반응과 만날 기회가 없어지고 있다. (중략) 그와 같은 비평의 폭식은 이험하기 때문에 즉각적인 치료가 요구된다.

 

# 문학 예술 작품은 두 가지 측면에서 조명할 수 있다. 문학 에술은 의미하는 것임과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로고스(말해진 어떤 것)임과 동시에 시학(만들어진 어떤 것)이다.

 

# 문학적인 경험은 특권이나 개별성을 훼손시키지 않고도 상처를 치유한다. 상처를 치유하는 방대한 감정들이 있다. 하지만 그런 감정들은 특권을 파괴한다. 그런 감정들 속에서 우리의 분리된 자아들은 고여 있게 되고, 우리는 개별성 아래로 가라앉게 된다. 하지만 위대한 문학을 읽을 때, 나는 수천의 자아를 가지면서도 여전히 나 자신으로 남아 있다. 그리스 시에서 나오는 밤하늘처럼 나는 무수한 눈으로 바라보지만, 바라보는 자는 여전히 바로 나 자신이다. 참배 속에서, 사랑 속에서, 윤리적인 행위 속에서, 앎 속에서처럼 바로 여기서 나는 나 자신을 초월한다. 그리고 나는 이때처럼 더 이상 나 자신이 된 적이 없다.

 

# Festina lente '신속하게, 그러나 서두르지는 말고 신중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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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바꾸는 책 읽기 - 세상 모든 책을 삶의 재료로 쓰는 법
정혜윤 지음 / 민음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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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들보다 책을 좀 읽었다고 나를 오해한 한 친구가 물었다. "<삶을 바꾸는 책 읽기> 괜찮아?" 그때 나는 그 책을 읽지 못한 상태였고, 정혜윤이라는 이름도 처음 들어봤기 때문에 "글쎄, 근데 요즘 그런 책들 너무 많이 나와서, 잘 보고 사야돼" 라고 대답해 버렸다. 집에 와 생각해보니 책을 읽지도 않았는데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되는대로 말해버렸을까 후회가 되었다. 그래서 책을 펼쳤는데, 생각했던 거와는 달리, 유행을 타고 그런 류의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책이었다.

     CBS 라디오 프로듀서이자 작가인 그녀는 사람들이 자주 묻는 질문들을 모아 그에 대한 답변을 해주고 있다. 예를 들어 책이 정말 위로가 될까요? 라고 물으면 왜 위로가 되는지 자신이 겪은 사례와 책의 구절들을 인용하여 조목조목 설명해준다. 작가가 일적으로 혹은 우연히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무심하게 지나치지 않고, 생각하고 글로 풀어내는 능력이 인상 깊었다. 또한 작가가 읽어온 수많은 책들을 주제에 맞게 적절하게 인용하는 것도 놀라웠다. 똑같은 책을 읽었는데 왜 나는 이렇게 설명할 수 없을까 하는 회의도 살짝 들고.

    작가가 인용하며 소개하는 책들을 메모하는 것도 큰 기쁨 중 하나이다. 역시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정말 배워야 할 것이 많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한다. 먹고 살기도 바쁜 데 언제 책을 읽나? 책이 쓸모가 있나? 의문이 들 때 책을 펼치면 다소 마음이 놓일 것이다.

 

# 한 영화 감독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쁜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너희들은 바라보기만 해. 보여 주는 건 우리가 다 할 테니."라며 관객들을 구경꾼, 수동적인 인간으로 만드는 영화라고요. 그런 영화는 인간성에 위배된다고요.

 

# 게으름은 자기 자신을 얕보는 정신의 행위 입니다.- 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

 

# 우리 시대에 가장 오염된 말 중 하나는 바로 '자기 계발'입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헨리 경의 입을 통해 "인생의 목적은 자기 계발"이고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오스카 와일드가 말한 자기 계발은 우리 시대에서 통용되는, 스펙 쌓기를 통한 경쟁력 강화란 의미의 자기 계발과 그 의미가 판이하게 다릅니다. 그가 말한 자기 계발은 "자신의 본성을 완벽하게 깨닫는 것"이었습니다.

 

# 책을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놀라울 정도로 특이한 비밀 결사를 구성한다. 모든 것에 대한 호기심과 연령의 구분 없이 섞이지 않음이, 결코 만나는 일 없이도 그들을 한데 모아 놓는다. 그들의 선택은 출판업자의, 즉 시장의 선택에 부합하지 않는다. 교수들의, 즉 코드의 선택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역사학자들의, 즉 권력의 선택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중략) 그 선택은 오히려 틈새와 주름들 안에, 즉 고독, 망각들, 시간의 경계, 열정적인 생활 태도, 응달 지역, 사슴의 뿔, 상아 페이퍼 나이프들 안에 칩거하고자 한다. - 파스칼 키냐르 <은밀한 생>

 

# 플로베르는 흔해 빠진 아무것도 아닌 것"(보바리 부인)에 대해 썼다고 표현했지만 제게 이 책이 중요했던 것은 제가 '아무것도 아닌 것'의 과잉 속에 푹 잠겨 있단 걸 퍼뜩 알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건 몸서리쳐지는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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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

 

순결하고 생기 있어라, 더욱 아름다운 오늘이여,
사나운 날개짓으로 단번에 깨뜨려 버릴 것인가.
쌀쌀하기 그지 없는 호수의 두꺼운 얼음.
날지 못하는 날개 비치는 그 두꺼운 얼음을.

백조는 가만히 지나간 날을 생각한다.
그토록 영화롭던 지난 날의 추억이여!
지금 여기를 헤어나지 못함은 생명이 넘치는
하늘 나라의 노래를 부르지 않는 벌이런가.
이 추운 겨울날에 근심만 짙어진다.

하늘 나라의 영광을 잊은 죄로 해서
길이 지워진 고민의 멍에로부터 백조의
목을 놓아라, 땅은 그 날개를 놓지 않으리라.

그 맑은 빛을 이 곳에 맡긴 그림자의 몸이여
세상을 멸시하던 싸늘한 꿈 속에 날며,
오, 구더기! 눈도 귀도 없는 어둠의 빛이여,
너 위해 부패의 아들, 방탕의 철학자
기뻐할 불향배의 사자는 오도다.

내 송장에 주저 말고 파고들어
죽음 속에 죽은, 넋없는 썩을 살 속에서
구더기여, 내게 물어라, 여태 괴로움이 남아 있는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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