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 창비시선 238
문태준 지음 / 창비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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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시선 238권

   문태준 시인의 시를 읽으면 머릿속에 풍경이 그려진다. 완만한 산등, 촉촉한 논바닥, 구부정한 할머니, 따끈따끈한 온돌, 어스름한 저녁 노을, 풀벌레 소리. 시를 읽다보면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자동차가 쌩쌩 지나가는 현대에 향수가 웬 말이냐는 사람도 있겠다만, 누구에게나 고향과 가족에 대한 본질적인 그리움(특히 나처럼 시골에서 뛰놀았던 촌놈의 경우에는 더더욱)이 있는 법이다. 그래서 괜히 생판 모르는 가족의 사진집을 (『윤미네 집』) 넘겨보며 맞아, 나도 이럴 때가 있었는데 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것이다.

   시인의 시 ‘가재미’를 처음 읽고 나서 시를 풀어내는 방식과 은유법에 빠져버렸다. 지금도 병상에는 얼마나 많은 환자들과 가족들이 슬픔에 잠겨 있는가. ‘가재미’는 환자의 전 생애를 담담하고 유려하게 그려낸다. 그리고 환자의 옆에 누워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것을 가재미 라는 생선을 가지고 표현할 수 있는 시인이 바로 그이다.

   <맨발> 시집에도 시인만의 독특한 서정적인 느낌이 가득하다. 그가 묘사한 세계는 아름다운 한국의 풍경이다. 한 폭의 그림을 이토록 따뜻하고, 아름답게 꾹꾹 눌러 써내려간 그가 참으로 좋다. 그가 쓴 수필 <느림보 마음>도 한 편의 시처럼 차분하다. (그 책을 읽으면 분명 향긋한 차를 마시고 싶을 것이다.)

 

# 어두워지는 순간

 

어두워지는 순간에는 사람도 있고 돌도 있고 풀도 있고

흙덩이도 있고 꽃도 있어서 다 기록할 수 없네

어두워지는 것은 바람이 불고 불어와서 문에 문구멍을

내는 것보다 더 오래여서 기록할 수 없네

어두워지는 것은 하늘에 누군가 있어 버무린다는 느낌,

오래오래 전의 시간과 방금의 시간과 지금의 시간을

버무린다는 느낌,

사람과 돌과 풀과 흙덩이와 꽃을 한사발에 넣어 부드럽게

때로 억세게 버무린다는 느낌,

어두워지는 것은 그래서 까무룩하게 잊었던 게 살아나고

구중중하던 게 빛깔을 잊어버리는 아주 황홀한 것,

오늘은 어머니가 서당골로 산미나리를 얻으러 간 사이

어두워지려 하는데

어두워지려는 때에는 개도 있고, 멧새도 있고, 아카시아

흰 꽃도 있고, 호미도 있고, 마당에 서 있는 나도 있고.....

그 모든 게 있어서 나는 기록할 수 없네

개는 늑대처럼 오래 울고, 멧새는 여울처럼 울고, 아카시아

흰 꽃은 쌀밥덩어리처럼 매달려 있고, 호미는 밭에서

돌아와 감나무 가지에 걸려 있고, 마당에 선 나는 죽은

갈치처럼 어디에라도 영원히 눕고 싶고......그 모든 게

달리 있어서 나는 기록할 수 없네

개는 다른 개의 배에서 머무르다 태어나서 성장하다

지금은 새끼를 밴 개이고, 멧새는 좁쌀처럼 울다가 조약돌처럼

울다가 지금은 여울처럼 우는 멧새이고, 아카시아 흰 꽃은

여러 날 찬밥을 푹 쪄서 흰 천에 쏟아놓은 아카이아

흰 꽃이고....그 모든 게 이력이 있어서 나는 기록할 수 없네

오늘은 어머니가 서당골로 산미나리를 베러 간 사이

어두워지려 하는데

이상하지, 오늘은 어머니가 이것들을 다 버무려서

서당골에서 내려오면서 개도 멧새도 아카시아 흰 꽃도

호미도 마당에 선 나도 한사발에 넣고 다 버무려서,

그 모든 시간들도 한꺼번에 다 버무려서

어머니가 옆구리에 산미나리를 쪄 안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세상이 다 어두워졌네

 

 

# 따오기

 

논배미에서 산그림자를 딛고 서서

꿈쩍도 않는

늙은 따오기

늙은 따오기의 몸에 깊은 생각이 머물다 지나가는 것이

보입니다

어느날 내가 빈 못을 오도카니 바라보았듯이

쓸쓸함이 머물다 가는 모습은 저런 것일까요

산그림자가 서서히 따오기의 발목을 흥건하게 적시는

저녁이었습니다

 

# 와글와글와글와글와글

 

고샅을 돌아 부푼 달 아래 걷는데

거뭇거뭇한 논배미에서

한 뭉테기로 와글,

귀를 촘촘하게 열었더니

논개구리들이

와글와글와글와글와글

와글와글와글와글와글

이 봄밤에 방랑악사들이

대고를 두드리는데

참 멋진 춘화 한장입니다

온 우주가 잔뜩 바람난 꽃입니다

 

# 산모롱이 저편

 

산모롱이 한 굽이 돌아 당신을 만나러 간다. 당신의

희미하고 둥근 눈썹을 예전에 내가 어루만지기나 하듯이

꺼져가는 달을 어루만지는 허공, 저렇게 오래 배웅하는 것도

큰 상처가 될 것이다. 잠깐 눈발은 그쳐 있다. 산새가 다시

운다. 울음이 성성하다. 나와 당신 사이에 싸락눈에 묻힐

산모롱이가 한 굽이 있다.

 

# 뻘 같은 그리움

 

그립다는 것은 당신이 조개처럼 아주 천천히 뻘흙을

토해내고 있다는 말

 

그립다는 것은 당신이 언젠가 돌로 풀을 눌러놓았었다는

얘기

 

그 풀들이 돌을 슬쩍슬쩍 밀어올리고 있다는 얘기

 

풀들이 물컹물컹하게 자라나고 있다는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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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학 펭귄클래식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김한식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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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학>아리스토텔레스. 로즐린 뒤퐁록, 장랄로 서문 및 주해/김한식 역

    670쪽까지 있는 엄청나게 두꺼운 책이다. 펭귄 클래식에서 만들었는데 아니 펭귄에서 이렇게 두꺼운 양장판 책도 출판하나 하고 뒷편을 봤더니 100권 출간 기념 특별판이란다. 참내.

아리스토텔레스가 시에 대해 뭘 그렇게 많이 썼나 하고 책을 펼쳤더니, 와우, 원문보다 주석이 더 많다. 시학은 총26장인데 각 장마다 그리스어 원문 프랑스어 번역, 주해, 개념 색인, 고유명사 색인, 서지 사항으로 이루어져 이토록 두꺼운 책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주저하지 않고 주해는 읽지 않았다. <시학>이 뭔지 맛만 보자는 심정으로.

    <시학>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이 세운 뤼케이온 학원에서 공부하는 제자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기 위해 초록 형태로 작성한 것이다. 따라서 초고 형태의 텍스트이기 때문에 다소 혼란스럽고 체계를 찾기 어렵다.

    <시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미메시스(mimesis)이다. 한국어로는 ‘모방’ 으로 해석되는데 이렇게 간단히 정의내리기엔 적절하지 않다. 이 개념이 단순이 예술 양식이나 기술의 문제를 넘어 ‘닮은’, ‘유사성’에 근거한 동일성의 철학적 전통과 얽혀 있기 때문이다. 뒤퐁록과 랄로는 미메시스를 ‘재현’으로 해석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시학>에서 미메시스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창조적’이라는 점에서 단순한 모방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시학>에서 논의의 중심은 비극에 대한 연구이며, 7장, 14장, 16장~18장에 걸쳐 있는 비극의 ‘줄거리’에 대한 연구이다. 책에서 희극은 다루지 않고 있는데(아리스토텔레스가 나중에 그에 관해 얘기할 것이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학자들 사이에서 이것이 유실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고 한다.

    책을 읽다보니 아리스토텔레스는 참 사소한 것에 다 신경을 썼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문장은 누구나 아는 지식인 것 같은데 아리스토텔레스가 진지하게 글을 쓴 걸 읽다보면, 아니지, 유명하신 분의 글인데 뭔가 깊은 뜻이 있겠지 하며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나중에 내공이 좀 더 쌓이면 다시 읽어봐야겠다.

 

# 우리는 앞으로 시 창작 기술 그 자체, 그 여러 종류와 그 각각의 고유한 목적성, 시 창작에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줄거리 구성방법, 시를 구성하는 부분들의 수와 성질, 기타 이 연구와 관련된 다른 모든 문제들을 다룰 것이다. -1장

 

# 사람은 어릴 때부터 재현하려는 성향과 재현된 것들에서 쾌감을 느끼는 성향을 동시에 타고난다. 그 증거를 실제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더할 나위 없이 추한 짐승이나 시체의 형태는 실물로는 보기만 해도 고통스럽지만 그것을 아주 잘 다듬어 그린 그림을 볼 때는 쾌감을 느낀다.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철학자들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쾌감을 주기 때문이다. -4장

 

# 서사시와 비극은 고귀한 인물을 재현하고 장중한 운율을 사용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일치하지만, 서사시는 오로지 장중한 운율만을 사용하고 단일한 운율로 이야기하는 방식을 취한다는 점에서 비극과 다르다. -5장

 

# 연대기 작가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고 시인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이야기한다는 사실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바로 이 까닭에 시는 연대기보다 더 철학적이고 더 고귀하다. 시는 보편적인 것을 다루는 데 반해 연대기는 특수한 것을 다루기 때문이다. -9장

 

# 내가 이미 여러 차례 말한 것을 명심하여 비극에 서사시적 구조를 부여해서는 안된다. 나는 줄거리가 여러 개 있는 구조를 서사시적 구조라 부른다. -1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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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방향
홍상수 감독, 김보경 외 출연 / 디에스미디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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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지인이 맛있는 칼국수를 사준다며 데려간 곳이 있다. 자주 지나는 길인데도 전혀 그런 곳이 있는 줄 몰랐을 정도로 좁은 골목길 끝에 있던 곳. 밤에는 술을 팔고, 낮에는 밥을 파는 아담하고 조용한 곳. 주인은 이제 칼국수는 팔지 않는다며 대신 카레밥을 해주었다. 그 집이 <북촌방향>에 나오는 ‘소설’이다. 영화에서 보여지는 ‘소설’은 현실보다 조금 덜 예뻐보였다. 영화 속의 장면들이 실제보다 덜 예뻐 보이기는 힘든 일이다. 그러나 홍상수 감독이라면 충분히.

   영화 <북촌방향>은 말 그대로 북촌 지역만 나온다. 몇 장면을 제외하고는. 인사동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고갈비집과 한정식 집이 나오고, 너무나 익숙한 정동길, 도서관, 북촌 골목길이 끊임없이 비춰진다. 늘 그 길들을 지나는 사람들은 영화를 보는 건지 자신의 하루를 찍은 장면을 보는 건지 헷갈릴 수도 있겠다.

    흑백영화다. 찰리 채플린이나 버스터 키튼이 출연하는 영화는 당연하다는 듯 흑백을 즐기며 봤는데, 2011년에 만들어진 영화를 흑백으로 보려고 하니 괜히 불만이 생기려고 한다. (아니, 그러면 여배우들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가 없잖아요.) 흑백영화라서 배우들의 얼굴이 더 아름답게 보인다. 예전에 4편의 영화를 만들고 지금은 대구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주인공 성준(유준상)은 서울에 올라와 북촌에 사는 선배 영호를 만나려 한다. 며칠간 서울에 머무르며 성준은 옛 여자 친구에게도 찾아가고, 영호의 여자 후배 교수와 함께 술을 마시며, ‘소설’의 여주인에게 키스를 하기도 한다. 이 모든 중심에는 술과 담배, 우연한 만남과 남녀의 밀고 당기기가 있다. 이들은 끊임없이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술에 취해 서로를 유혹하고 유혹 당한다. 영화가 아니라 그냥 평소 우리의 삶을 보여주는 것 같아 부끄럽다.

    영화를 보다보면, 저 장면이 오늘인지 내일인지 모를 정도로 인물들은 비슷한 말을 내뱉고, 비슷한 행동을 한다. 성준은 술에 취해 여자를 유혹하고, 사랑한다고 서슴없이 말하며, 다음날 가볍게 떠난다. 영호는 누군가가 했던 말 중 멋지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가져다가 자기의 의견인 것처럼 말한다. 아, 나도 이런 적이 얼마나 많았을까. 앞으로는 내 생각과 말이 아닌 것을 (내가 가진 모든 취향과 생각과 습관은 누군가의 영향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본질적으로는 불가능하겠지만) 내 것인 양 하지 말아야겠다고 영호의 모습을 보는 내내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성준이 여자들에게 칭찬하는 말은 한결같다. ‘넌 착해.’ 한 사람을 규정하는 것이 단지 ‘착하다’는 것으로 충분할까? 착하다 라는 단어가 그 사람을 얼마큼 보여줄 수 있을까? 이것은 성품에 속하는 단어일까? 그는 또한 잠자리를 가진 후 헤어질 때마다 ‘행복해야 돼’라고 말한다. 그 말 속에는 진심이 조금이라도 들어 있을까? 착하다는 말에 활짝 웃고 행복해하는 여자들과 단지 착한지 그렇지 않는지의 단순한 시선으로만 여자를 바라보는 성준의 모습에 돌맹이를 던지고 싶은 심정이다. 여자 주인공들의 제스처들도 새삼 불편하다. 두 손으로 입을 예쁘게 가리고 웃거나, 울거나 술을 마시는 모습이 왜 불편했을까? 나와 똑같은 행동을 하는 다른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고, 나의 제스처가 나만의 고유한 행동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이젠 왠지 웃을 때 손으로 입을 가리는 시늉은 못할 것 같다.

    영화는 화면을 바라보는 관객에게 너도 이들과 다를 게 있냐고 묻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저런 속물이 아니라고, 저런 행동과 저런 사고방식과 저런 말투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부인하지만 이 저항 안에는 불안이 내포되어 있다. 홍상수의 영화는 늘 이런 식이다. 자꾸 나의 생활과 생각을 돌아보도록 등을 떠민다. 그냥 좀 편하게 살고 싶은데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영화를 보고 나면 영상이 사라지기 전까진 나를 바짝 점검한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느슨해지지만. 오랜만에 흑백 영화를 보았다. 정신이 번쩍 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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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 사진의 작은 역사 외 발터 벤야민 선집 2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옮김 / 길(도서출판)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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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제 3판.

    이 에세이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나타난 예술 작품(특히 영화)들에 대한 그의 생각들을 적은 것이다. 서문에서 폴 발레리의 짧은 글과 파시즘과 예술의 관계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글은 15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졌으며 예술에 대한 벤야민의 깊은 사상이 담겨 있다. 벤야민은 기술복제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의 성격 자체가 바뀌어 버렸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은 원칙적으로는 항상 복제가 가능했지만(일회적), 이것은 기술적 복제와는 다르다. 석판인쇄술의 발명으로 복제기술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고, 이것은 그래픽 사진술로 발전했다. 그러나 가장 완벽한 복제에서도 한 가지가 빠져 있는데 그것은 예술작품이 가지고 있는 일회적인 현존재이다. 벤야민은 이것을 아우라(Aura)라고 명한다. 예술작품은 진품성(그 사물의 물질적 지속성과 함께 그 사물의 역사적인 증언 가치까지 포함)이 있지만 복제품은 이것을 제거한다. 즉 복제품의 대량생산과 복제품의 현재화는 전통을 뒤흔드는 결과를 초래하는데 특히 이것은 영화에서 잘 나타난다. 영화는 문화유산이 지니는 전통가치들을 청산(Liquidation)한다.

    가장 오래된 예술작품은 의식(Ritual)을 위해 생겨났고, 처음에는 주술적 의식에 쓰이다가 나중에는 종교적 의식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는 지금까지 종교적 의식 속에서 살아온 기생적 삶의 방식을 벗어나도록 하였다. 예술 생산에서 진품성을 판가름하는 척도가 효력을 읽는 순간, 예술의 모든 사회적 기능 또한 변하는 것이다.

   예술작품은 제의가치와 전시가치가 있다. 예전에는 제의가치가 중요했지만 예술작품을 기술적으로 복제할 수 있는 여러 방법이 생겨나면서 예술작품들이 전시될 기회가 커졌다. 사진에서는 전시가치가 제의가치를 전면적으로 밀어내기 시작한다. 제의가치의 최후의 보루는 인간의 얼굴이다. 초기 사진에서 아우라가 마지막으로 스쳐 지나간 것은 사람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표정에서이다. 그러나 사진에서 사람의 모습이 뒷전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아제가 선구자)

   무대배우의 연기는 연기자가 직접 관객에게 제시되지만 영화배우는 카메라 앞에서 촬영된다. 따  라서 공연하는 도중에 관객에 맞추어 자신의 연기를 조정하는 가능성을 상실한다. 관객은 그들이 카메라와 일치감을 느낄 때에야 배우와도 일치감을 느끼게 된다. 관중이 카메라의 태도로 테스트하는 것이다. 카메라 앞에서는 연기자를 감싸고 있는 아우라가 사라지게 마련이다. 영화배우의 연기는 하나의 통일된 작업이 아니라 여러 개별적 요소가 합쳐져 이루어진 것이다.

카메라맨(외과의사)과 화가(마술사)를 비교해보자. 마술사는 자신과 환자 사이의 자연스러운 거리를 계속 유지한다. 그러나 외과의사는 결정적인 순간에 환자를 인간 대 인간으로 대하는 것을 포기하고, 오히려 수술을 통하여 그의 내부로 파고들어 간다. 즉 화가의 영상은 하나의 전체적 영상이고, 카메라맨의 영상은 여러 개로 쪼개어져 있는 단편적 영상들로서, 이것은 새로운 법칙에 의해 다시 조립된다.

   회화는 옛날부터 건축, 서사시가 그랬듯 대상을 동시적인 집단적 수용을 위해 보여줄 수 이는 입장에 있지 못한다. 따라서 그림을 화랑이나 살롱에서 대중에게 보여주려고 시도했다고 해도 대중에게는 그 그림을 감상하면서 스스로를 조작하고 서로를 컨트롤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영화는 관중 개개인의 반응들의 합이 집단 반응을 이루며 서로를 컨트롤한다.

   영화의 어떤 상황 속에서 깨끗하게 준비되어 제시된 화면속의 행동을 보노라면 우리의 마음을 더 강하게 사로잡고 있는 것이 예술적 가치인지, 학문적 이용가치인지 분간하기 힘들다.

   다다이즘은 오늘날 대중들이 영화에서 찾고 있는 효과를 회화나 문학의 수단을 통하여 만들려고 하였다. 다다이스트들은 그들 작품의 상품적 가치보다는 무가치성을 더 중요시하였다. 그래서 그림에 단추나 승차권 같은 것들을 몽타주해 넣음으로써 작품의 아우라를 가차없이 파괴하였다. 그들의 작품은 무엇보다도 대중에게서 불쾌감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했다.

캔버스는 보는 사람을 관조의 세계로 초대한다. 그는 그 앞에서 자신을 연산의 흐름에 내맡길 수 있다. 그러나 영화의 장면은 눈에 들어오자마자 곧 다른 장면으로 바뀌어 버린다. 그것은 고정될 수 없는 것이다. 뒤아멜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미 내가 생각하고자 하는 바를 더 이상 생각할 수 없다. 움직이는 영상들이 내 사고의 자리에 대신 들어앉게 된 것이다.”

 

# 제국주의 전쟁은 일종의 기술의 반란이다. 다시 말해 제국주의 전쟁에서 기술은 사회가 평소 자연적 재료를 통해 기술에 부여하지 못했던 권리들을 “인간재료”에서 거두어들이고 있다. 기술은 강의 흐름이 나아갈 운하를 파는 대신 인간의 흐름을 전쟁의 참호 속으로 흘러들어 가게 하고, 또 비행기를 통해 씨를 뿌리는 대신 화염폭탄을 도시에 뿌리고 있으며, 아우라를 새로운 방식으로 없앨 수단을 가스전에서 발견하였다. 파시즘은 “세상은 무너져도 예술은 살리라”고 말하면서 기술에 의해 변화된 지각의 예술적 만족을, 마리네티가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전쟁에서 기대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 예술지상주의의 마지막 완성이다. 일찍이 호메로스의 시대에 올림포스 신들의 구경거리였던 인류가 이제 그 스스로 구경의 대상이 되었다. 인류의 자기소외는 인류 스스로의 파괴를 최고의 미적 쾌락으로 체험하도록 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이것이 파시즘이 행하는 정치의 심미화의 상황이다. 공산주의는 예술의 정치화로써 파시즘에 맞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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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 - 조지 오웰 평론집
조지 오웰 지음, 조지 패커 엮음, 하윤숙 옮김 / 이론과실천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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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오웰/조지 패커 엮음/하윤숙 역

   도서관에서 신간 코너를 둘러보다 발견한 책. 오웰이 쓴 평론집이라~누가 가져갈새라 얼른 빌려왔다. 읽지 않았는데도 기분이 좋다. 제목도 좋군. ‘정독 도서관’과 ‘토끼의 지혜’는 서울에서 유일한 나의 단골장소이다. 나의 사랑을 듬뿍 받아라.

   조지 오엘은 영국의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이다. 우리에겐 <동물농장>과 <1984>년으로 매우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오웰하면 돼지들이 사람들처럼 서서 식사를 하는 섬뜩한 장면과 ‘빅브라더스’의 무시무시한 눈을 묘사했던 작가 라는 정도의 정보밖에는 없었다. 이 책을 읽으며 오웰의 확고한 사상과, 글에 대한 신념과 생각 등을 읽을 수 있었다.

   오웰은 1903년 아버지의 근무지인 인도 벵골에서 태어났으며 두살때 어머니와 함께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학교를 졸업하고 버마에서 대영제국 경찰관으로 근무하였으나 1927년에 제국주의에 대한 혐오감으로 경찰직을 사직하고 런던과 파리에서 하층 계급과 함께 생활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글들을 썼으며, 제 2차 세계대전 동안 시민군과 BBC 방송작가로 활동했고, 사회주의 신문인 <트리뷴>의 문학 담당 편집자로 일하기도 했다. 1950년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책을 읽다보면 알 수 있지만 오웰은 유려한 에세이스트다. 그의 글은 단호하고,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표현한다.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면서 자신이 직면한 문제들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래서 때로는 그의 용기와 솔직함에 놀라기도 했다. 이렇게 멋진 글들을 썼다니, 오웰의 다른 비소설들을 읽어보고 싶다.

    책에는 1940~1948년까지 그가 썼던 다양한 글들이 담겨있다. 다만 모든 글들은 그 시대의 영국인으로서 바라본 세계이기 때문에 몇몇 에세이는 우리의 관심을 끌기가 힘들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소년 주간지’는 기본적으로 가판대에서 청소년들이 사보는 주간지에 관해 쓴 글이지만 여기서 등장하는 주간지는 영국의 주간지이기 때문에 (한국으로 치면 소년동아 같은) 공감을 느끼거나 몰입하여 읽기가 힘들다. 다만, 아 영국에는 이런 식의 소년 주간지가 있었구나 하는 정도. 또한 수많은 작가들을 예로 들어 설명하는데 나오는데, 한국에 알려지지 않는 작가가 많아 그 작가가 어떤 성향의 글을 썼는지 모른 채, 오웰의 말을 따라가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재미있다. 영화 <위대한 독재자>, T.S. 엘리엇, 찰스 티킨스, 살바도르 달리, <걸리버 여행기> 등에 관한 글들을 읽다보면 오웰의 논지에 자신도 모르게 동조하게 된다. 좋은 대중소설이란 무엇인지, 문학을 지키는 예방책과 작가에 관한 글들도 참 좋다. 그가 갖고 있던 신념(제국주의와 전체주의에 대한 혐오와 경계)은 어느 글을 읽어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마크 트웨인의 에세이를 읽고 그가 좋아졌듯, 오웰의 에세이를 읽고 그가 좋아졌다.

 

# 디킨스에 비해 톨스토이가 훨씬 폭넓은 이해력을 보여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톨스토이는 당신에 대해 훨씬 많은 이야기를 해줄 것처럼 느껴지는가? 톨스토이가 훨씬 재능이 많다거나, 아니면 최종적으로 판단할 때 훨씬 지적이기 때문은 아니다. 톨스토이는 성장하는 사람들에 대해 썼기 때문이다. 톨스토이의 인물들은 영혼을 가꾸기 위해 노력하는 디킨스의 인물들은 이미 완성되어 있다. 91.

 

#. 예를 들어 <율리시스>에서 정말 탁월한 점은 그 소재가 지닌 평범함이다. 물론 조이스는 시인이고 세세한 것이 깊은 관심을 쏟는 사람이기 때문에 <율리시스>에는 이것 말고도 많은 특성이 있다. 하지만 조이스의 진정한 업적은 익숙한 것을 글로 옮겨놓았다는 데 있다. 그는 과감하게도-이는 단지 기법의 문제만으로 볼 수 없는 용기의 문제이기도 하다-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어리석은 일을 끄집어내어 보여주었고 그 과정에서 바로 가까이 있는 미국을 발견했다. 145.

 

# 인기있는 작가라고 할 때 이 말은 실제로 그 작가가 서른 살 이하 사람들에게 숭배된다는 의미다. 157.

 

# 1934년 또는 1935년에는 얼마간 ‘좌파’ 색채를 띠지 않으면 문학 모임 내에서 별난 존재로 취급되었고 이후 일이 년이 지나자 하나의 좌파 정통이 자리잡았으며 특정 주제에 대해 반드시 특정 견해 체계를 지니도록 정해졌다. 작가는 적극적인 ‘좌파’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글을 못 쓴다는 견해가 힘을 없게 되었다. 1935년에서 1939년 사이에 공산당의 마흔 살 이하의 모든 작가에게 저항할 수 없는 매력으로 다가갔다. 몇 년 전 로마 카톨릭이 유행이었을 때 아무개가 카톨릭에 ‘귀의했다’는 이야기가 예삿일로 들리던 것처럼 이제는 아무개가 ‘입당했다’는 말이 예삿소리로 들렸다. 176.

 

# 히틀러 무리나 스탈린 무리는 살인을 필요한 것으로 여기면서도 자신들의 냉혈함을 결코 드러내지 않은 채 살인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청산’이니 ‘제거’니 그 밖에 다른 부드러운 표현을 쓴다....좌파적 사고의 아주 많은 부분은 불이 뜨겁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 채 불을 가지고 노는 장난 같은 것이다. 1935년에서 1939년 사이 영국 지식인들은 전쟁을 들먹이는 데 심취해 있었는데 이는 대체로 전쟁을 면제받은 개인의 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183.

 

 

# 공산주의자와 공산주의에 가까운 사람들이 문학 평론에서 불균형할 정도로 많은 영향력을 지녔다. 꼬리표를 붙이는 시기였고 슬로건과 얼버무림의 시기였다....이런 분위기에서 좋은 소설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기 힘들다. 정통의 냄새를 따지는 사람들에게서 좋은 소설이 나올 수 없으며, 자기 자신의 비정통성을 염려하면서 양심에 시달리는 사람도 좋은 소설을 쓸 수 없다. 좋은 소설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에게서 나온다. 187.

 

# 키플링의 가장 훌륭한 이점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그가 재기 넘치지 않고, ‘대담하지’ 않으며, 보수적 부르주아를 깜짝 놀라게 하려는 마음이 없었다는 점이다. 키플링은 대체로 평범한 것을 다루며 우리는 평범한 세계에 살기 때문에 그가 말한 많은 내용을 받아들일 수 있다. 심지어 그가 보여주는 최악의 어리석음조차도 와일드의 짧은 풍자시나 <인간과 초인>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멋진 경구 모음집 같은 동시대의 ‘교양있는’ 발언보다 덜 천박하고 덜 짜증나게 들린다. 255.

 

# 봉건주의나 파시즘이 산문 작가에게는 치명적이지만 시인에게는 꼭 그렇지도 않다. 시인이나 산문 작가 모두에게 정말 치명적인 것은 어정쩡하게 현대적인 보수주의다. 266.

 

# 물론 달리의 자서전이나 그림이 금지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하지만 달리는 확실히 진단이 필요하다. 그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점보다는 왜 그와 같은 사람이 되었는가 하는 점이 문제다. 그가 병든 지성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그의 말로는 개종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사실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제정신을 차린 사람 또는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그처럼 득의만면하게 자신의 과거 악행을 과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289.

 

# 하지만 ‘객관적 분리’라는 명목하에 <택시 안에 썩어가는 마네킹-달리>같은 사진이 도덕적 중립서을 띄는 것처럼 위장해서는 안 된다. 이 같은 사진은 병들어 있으며 혐오스럽다. 294.

 

# 상상력을 펼치는 작가는 주관적 느낌을 왜곡해야 할 때 자유롭지 않다. 작가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주관적 느낌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해 현실을 왜곡하거나 희화화시키는 경우가 있지만 자기 마음속의 풍경을 거짓되게 표현할 수는 없다. 작가는 싫어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믿지 않는 것을 믿는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한다. 작가에게 그런 일을 강요한다면 창작능력이 고갈되는 결과만 낳을 뿐이다. 333.

 

# 정치에서는 두 가지 죄악 중 그나마 작은 죄악을 선택하는 정도밖에 할 수 없으며 악마처럼 또는 미치광이처럼 행동해야만 겨우 벗어날 수 있는 상황도 있다. 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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