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 사진의 작은 역사 외 발터 벤야민 선집 2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옮김 / 길(도서출판)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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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제 3판.

    이 에세이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나타난 예술 작품(특히 영화)들에 대한 그의 생각들을 적은 것이다. 서문에서 폴 발레리의 짧은 글과 파시즘과 예술의 관계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글은 15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졌으며 예술에 대한 벤야민의 깊은 사상이 담겨 있다. 벤야민은 기술복제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의 성격 자체가 바뀌어 버렸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은 원칙적으로는 항상 복제가 가능했지만(일회적), 이것은 기술적 복제와는 다르다. 석판인쇄술의 발명으로 복제기술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고, 이것은 그래픽 사진술로 발전했다. 그러나 가장 완벽한 복제에서도 한 가지가 빠져 있는데 그것은 예술작품이 가지고 있는 일회적인 현존재이다. 벤야민은 이것을 아우라(Aura)라고 명한다. 예술작품은 진품성(그 사물의 물질적 지속성과 함께 그 사물의 역사적인 증언 가치까지 포함)이 있지만 복제품은 이것을 제거한다. 즉 복제품의 대량생산과 복제품의 현재화는 전통을 뒤흔드는 결과를 초래하는데 특히 이것은 영화에서 잘 나타난다. 영화는 문화유산이 지니는 전통가치들을 청산(Liquidation)한다.

    가장 오래된 예술작품은 의식(Ritual)을 위해 생겨났고, 처음에는 주술적 의식에 쓰이다가 나중에는 종교적 의식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는 지금까지 종교적 의식 속에서 살아온 기생적 삶의 방식을 벗어나도록 하였다. 예술 생산에서 진품성을 판가름하는 척도가 효력을 읽는 순간, 예술의 모든 사회적 기능 또한 변하는 것이다.

   예술작품은 제의가치와 전시가치가 있다. 예전에는 제의가치가 중요했지만 예술작품을 기술적으로 복제할 수 있는 여러 방법이 생겨나면서 예술작품들이 전시될 기회가 커졌다. 사진에서는 전시가치가 제의가치를 전면적으로 밀어내기 시작한다. 제의가치의 최후의 보루는 인간의 얼굴이다. 초기 사진에서 아우라가 마지막으로 스쳐 지나간 것은 사람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표정에서이다. 그러나 사진에서 사람의 모습이 뒷전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아제가 선구자)

   무대배우의 연기는 연기자가 직접 관객에게 제시되지만 영화배우는 카메라 앞에서 촬영된다. 따  라서 공연하는 도중에 관객에 맞추어 자신의 연기를 조정하는 가능성을 상실한다. 관객은 그들이 카메라와 일치감을 느낄 때에야 배우와도 일치감을 느끼게 된다. 관중이 카메라의 태도로 테스트하는 것이다. 카메라 앞에서는 연기자를 감싸고 있는 아우라가 사라지게 마련이다. 영화배우의 연기는 하나의 통일된 작업이 아니라 여러 개별적 요소가 합쳐져 이루어진 것이다.

카메라맨(외과의사)과 화가(마술사)를 비교해보자. 마술사는 자신과 환자 사이의 자연스러운 거리를 계속 유지한다. 그러나 외과의사는 결정적인 순간에 환자를 인간 대 인간으로 대하는 것을 포기하고, 오히려 수술을 통하여 그의 내부로 파고들어 간다. 즉 화가의 영상은 하나의 전체적 영상이고, 카메라맨의 영상은 여러 개로 쪼개어져 있는 단편적 영상들로서, 이것은 새로운 법칙에 의해 다시 조립된다.

   회화는 옛날부터 건축, 서사시가 그랬듯 대상을 동시적인 집단적 수용을 위해 보여줄 수 이는 입장에 있지 못한다. 따라서 그림을 화랑이나 살롱에서 대중에게 보여주려고 시도했다고 해도 대중에게는 그 그림을 감상하면서 스스로를 조작하고 서로를 컨트롤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영화는 관중 개개인의 반응들의 합이 집단 반응을 이루며 서로를 컨트롤한다.

   영화의 어떤 상황 속에서 깨끗하게 준비되어 제시된 화면속의 행동을 보노라면 우리의 마음을 더 강하게 사로잡고 있는 것이 예술적 가치인지, 학문적 이용가치인지 분간하기 힘들다.

   다다이즘은 오늘날 대중들이 영화에서 찾고 있는 효과를 회화나 문학의 수단을 통하여 만들려고 하였다. 다다이스트들은 그들 작품의 상품적 가치보다는 무가치성을 더 중요시하였다. 그래서 그림에 단추나 승차권 같은 것들을 몽타주해 넣음으로써 작품의 아우라를 가차없이 파괴하였다. 그들의 작품은 무엇보다도 대중에게서 불쾌감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했다.

캔버스는 보는 사람을 관조의 세계로 초대한다. 그는 그 앞에서 자신을 연산의 흐름에 내맡길 수 있다. 그러나 영화의 장면은 눈에 들어오자마자 곧 다른 장면으로 바뀌어 버린다. 그것은 고정될 수 없는 것이다. 뒤아멜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미 내가 생각하고자 하는 바를 더 이상 생각할 수 없다. 움직이는 영상들이 내 사고의 자리에 대신 들어앉게 된 것이다.”

 

# 제국주의 전쟁은 일종의 기술의 반란이다. 다시 말해 제국주의 전쟁에서 기술은 사회가 평소 자연적 재료를 통해 기술에 부여하지 못했던 권리들을 “인간재료”에서 거두어들이고 있다. 기술은 강의 흐름이 나아갈 운하를 파는 대신 인간의 흐름을 전쟁의 참호 속으로 흘러들어 가게 하고, 또 비행기를 통해 씨를 뿌리는 대신 화염폭탄을 도시에 뿌리고 있으며, 아우라를 새로운 방식으로 없앨 수단을 가스전에서 발견하였다. 파시즘은 “세상은 무너져도 예술은 살리라”고 말하면서 기술에 의해 변화된 지각의 예술적 만족을, 마리네티가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전쟁에서 기대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 예술지상주의의 마지막 완성이다. 일찍이 호메로스의 시대에 올림포스 신들의 구경거리였던 인류가 이제 그 스스로 구경의 대상이 되었다. 인류의 자기소외는 인류 스스로의 파괴를 최고의 미적 쾌락으로 체험하도록 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이것이 파시즘이 행하는 정치의 심미화의 상황이다. 공산주의는 예술의 정치화로써 파시즘에 맞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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