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방향
홍상수 감독, 김보경 외 출연 / 디에스미디어 / 2011년 12월
평점 :
일시품절


    예전에 지인이 맛있는 칼국수를 사준다며 데려간 곳이 있다. 자주 지나는 길인데도 전혀 그런 곳이 있는 줄 몰랐을 정도로 좁은 골목길 끝에 있던 곳. 밤에는 술을 팔고, 낮에는 밥을 파는 아담하고 조용한 곳. 주인은 이제 칼국수는 팔지 않는다며 대신 카레밥을 해주었다. 그 집이 <북촌방향>에 나오는 ‘소설’이다. 영화에서 보여지는 ‘소설’은 현실보다 조금 덜 예뻐보였다. 영화 속의 장면들이 실제보다 덜 예뻐 보이기는 힘든 일이다. 그러나 홍상수 감독이라면 충분히.

   영화 <북촌방향>은 말 그대로 북촌 지역만 나온다. 몇 장면을 제외하고는. 인사동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고갈비집과 한정식 집이 나오고, 너무나 익숙한 정동길, 도서관, 북촌 골목길이 끊임없이 비춰진다. 늘 그 길들을 지나는 사람들은 영화를 보는 건지 자신의 하루를 찍은 장면을 보는 건지 헷갈릴 수도 있겠다.

    흑백영화다. 찰리 채플린이나 버스터 키튼이 출연하는 영화는 당연하다는 듯 흑백을 즐기며 봤는데, 2011년에 만들어진 영화를 흑백으로 보려고 하니 괜히 불만이 생기려고 한다. (아니, 그러면 여배우들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가 없잖아요.) 흑백영화라서 배우들의 얼굴이 더 아름답게 보인다. 예전에 4편의 영화를 만들고 지금은 대구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주인공 성준(유준상)은 서울에 올라와 북촌에 사는 선배 영호를 만나려 한다. 며칠간 서울에 머무르며 성준은 옛 여자 친구에게도 찾아가고, 영호의 여자 후배 교수와 함께 술을 마시며, ‘소설’의 여주인에게 키스를 하기도 한다. 이 모든 중심에는 술과 담배, 우연한 만남과 남녀의 밀고 당기기가 있다. 이들은 끊임없이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술에 취해 서로를 유혹하고 유혹 당한다. 영화가 아니라 그냥 평소 우리의 삶을 보여주는 것 같아 부끄럽다.

    영화를 보다보면, 저 장면이 오늘인지 내일인지 모를 정도로 인물들은 비슷한 말을 내뱉고, 비슷한 행동을 한다. 성준은 술에 취해 여자를 유혹하고, 사랑한다고 서슴없이 말하며, 다음날 가볍게 떠난다. 영호는 누군가가 했던 말 중 멋지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가져다가 자기의 의견인 것처럼 말한다. 아, 나도 이런 적이 얼마나 많았을까. 앞으로는 내 생각과 말이 아닌 것을 (내가 가진 모든 취향과 생각과 습관은 누군가의 영향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본질적으로는 불가능하겠지만) 내 것인 양 하지 말아야겠다고 영호의 모습을 보는 내내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성준이 여자들에게 칭찬하는 말은 한결같다. ‘넌 착해.’ 한 사람을 규정하는 것이 단지 ‘착하다’는 것으로 충분할까? 착하다 라는 단어가 그 사람을 얼마큼 보여줄 수 있을까? 이것은 성품에 속하는 단어일까? 그는 또한 잠자리를 가진 후 헤어질 때마다 ‘행복해야 돼’라고 말한다. 그 말 속에는 진심이 조금이라도 들어 있을까? 착하다는 말에 활짝 웃고 행복해하는 여자들과 단지 착한지 그렇지 않는지의 단순한 시선으로만 여자를 바라보는 성준의 모습에 돌맹이를 던지고 싶은 심정이다. 여자 주인공들의 제스처들도 새삼 불편하다. 두 손으로 입을 예쁘게 가리고 웃거나, 울거나 술을 마시는 모습이 왜 불편했을까? 나와 똑같은 행동을 하는 다른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고, 나의 제스처가 나만의 고유한 행동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이젠 왠지 웃을 때 손으로 입을 가리는 시늉은 못할 것 같다.

    영화는 화면을 바라보는 관객에게 너도 이들과 다를 게 있냐고 묻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저런 속물이 아니라고, 저런 행동과 저런 사고방식과 저런 말투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부인하지만 이 저항 안에는 불안이 내포되어 있다. 홍상수의 영화는 늘 이런 식이다. 자꾸 나의 생활과 생각을 돌아보도록 등을 떠민다. 그냥 좀 편하게 살고 싶은데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영화를 보고 나면 영상이 사라지기 전까진 나를 바짝 점검한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느슨해지지만. 오랜만에 흑백 영화를 보았다. 정신이 번쩍 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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