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많이 알았던 히치콕? - 영화.여성.가부장제적 무의식 여이연문화 1
타니아 모들스키 지음, 임옥희 옮김 /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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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본 히치콕의 영화는 <현기증>이었다. 머리를 틀어올린 여주인공 매들린(킴 노박)의 모습이 얼마나 우아하던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든 줄거리 또한 어찌나 재밌던지. 그 다음으로 본 영화는 <사이코>였다. 노만 베이츠(안소니 퍼킨스)가 샤워하는 메리언(자넷 리)을 죽일 때 디졸브 되던 그녀의 그 눈동자. 그녀의 방을 수습하는 장면에서 노만이 종이에 싸여진 돈을 잡았을 때의 그 긴장감. 그리고 노만이 그것이 돈인 줄 전혀 모르고 메리언의 자동차 안에 던져 넣을 때의 그 안타까움. 메리언의 시체와 돈이 호수로 가라앉을 때의 그 허무함. 일련의 컷들이 지금도 머릿속에 생생하다. 그리고 히치콕을 잊었다. 왜? 위대한 다른 영화들이 한가득 쌓여 있었으니까. 다시 히치콕이 생각난 것은 지젝의 <삐딱하게 보기>를 읽으면서였다. 대체 이 책은 히치콕 영화를 보지 않으면 도통 이해하기 힘들만큼 그의 영화들이 수두룩하게 실려 있었다. 어쩔 수 있나. 또 볼 수 밖에. 그렇게 히치콕은 내게로 왔다.

  이 책은 히치콕의 작품들을 분석하면서, 특히 여성성에 관해 초점을 맞추고 있다. 히치콕 영화들을 보다 보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남성은 모르겠지만 여성인 나로서는 무언가 불편함을 느낄 때가 있다. 그 불편함은 <프린지>처럼 왜 항상 여성들이 끔찍하게 죽는 것인지와 남성의 여성 혐오증에 대한 물음이 될 수도 있다. <이창>, <현기증>처럼 오로지 남성의 시선에 맞춰진 여성의 모습과 줄거리 전개에 대한 불만 일 수도 있다. <새>에서처럼 권위적인 남성과 피해자로 전락하는 여성에 대한 분노일 수도 있다. 이러한 불편함 때문에 여성주의자들로부터 히치콕은 여성혐오주의자라는 비판을 받는다.

  하지만 책의 저자인 모들스키는 한쪽에만 치우쳐진 비평을 거부한다. 저자는 히치콕의 작품들을 양가성(ambivalence)의 개념으로 아우른다. 히치콕이 여성성에 매혹과 공포를 동시적으로 느낀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여성에 대한 매료가 혐오와 공포로 변주되며,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는 무너진다. 그렇게 보자면 히치콕의 양가적인 태도야말로 가부장제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들(남성을 포함하여)의 상호 모순적이고 복잡한 현실을 적절하게 묘사한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저자가 책에서 분석한 주요 작품은 <협박>, <살인>, <레베카>, <오명>, <이창>, <현기증>, <프린지>, <무대공포>이다.

  물론 저자의 분석은 재미있다. 잊고 있었던 영화의 장면들을 다시 상기할 수 있어 좋았고, 이런 방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새로움도 얻었다. 그런데 저자의 주장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니 명확하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어떤 면에서는 억지스러움이 느껴지기도 한다(저자의 글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이 부족해서라고 소심하게 생각하고 있다). 신나게 책을 다 읽었는데 무슨 내용이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듯한 기분이다. 대체 이를 어쩌면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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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려라, 클래식 - 초보 클래식 매니아를 위한 클래식 입문서, 개정증보판
이헌석 지음 / 돋을새김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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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피콩을 갈고 커피를 내릴 때, 양파를 썰어 온갖 요리에 넣을 때, 반들반들하게 그릇을 씻을 때, 몸을 쭉쭉 늘려 스트레칭을 할 때, 구석구석 집 안을 청소할 때, 금방 빠져드는 소설을 읽을 때, 흑맥주나 저렴한 와인을 마시며 가벼운 글을 쓸 때....이 모든 행위를 어우르는 음악 장르는 내게 클래식이다. 물론 어떤 경우는 재즈나 팝송이 더 나을 때도 있다. 하루키가 특정 요리를 할 때는 닐 영의 음악이 단연코 최고라고 말하듯.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고요하게 스며드는 음악은 클래식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창문을 열고 음악을 튼다. 워낙 작은 집이라 아름다운 선율이 작은 틈새까지 파고든다. 작은 집도 장점이 있는 법이다.

  < 열려라 클래식>은 초보 클래식 마니아를 위한 입문서라고 소개가 되어 있는데, 초보에게도 좋지만 어느 정도 클래식에 몸을 담은 사람이 읽어도 재밌게 읽을 수 있다. 책에 소개된 다양한 앨범들과 자신이 가진 것을 비교하는 것이 꽤 흥미진진하다. 하나하나 맞추다 보면 어깨를 으쓱할 수도, 풀이 죽을 수도 있으니까. 음악의 역사나 작곡가의 생애를 다시 한번 훑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책은 3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장은 클래식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고대음악에서부터 현대의 음악까지 간단하게 설명되어 있다. 독주곡, 협주곡, 교향곡, 오페라, 가곡 등등의 정의를 내린 후 고대-중세-르네상스-바로크-고전주의-낭만파-현대 음악까지의 역사를 소개한다. 2장은 클래식에 다가가기 위한 방법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 장은 조금 웃음이 날 수도 있다(이유를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3장은 각 시대의 유명 작곡가들의 생애와 잘 알려진 음악들을 소개하고 있다. 더불어 추천 음반도 함께 수록되어 있기에 자신이 가진 음반과 비교하다보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게 된다.

  책을 다 읽으니 깨달음이 왔다. 아, 나에겐 파블로 카잘스의 음반이 단 한 장도 없구나 하는 인식 말이다. 음반을 검색하니 품절된 음반도 많고, 여러 개를 사려니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하고, 뭘 골라야 할까 고민하던 차에 카잘스 스페셜 에디션이 눈에 들어왔다. 10장의 CD를 묶어 판매하는데 2008년도에 1000세트 한정 판매로 나왔다고 한다. 지금이 2014년인데 아직도 1000세트를 다 못 팔았단 말인가? 한정 판매가 맞는 건지 의심스럽다. 6년간 1000세트도 팔리지 않았다고 믿고 싶지 않은 것일 수도. 곧 그의 음반이 도착한다. 2월의 남은 시간은 첼로 선율에 맞춰 춤이나 춰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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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식의 품격 - 빵에서 칵테일까지 당신이 알아야 할 외식의 모든 것
이용재 지음 / 오브제(다산북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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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에 끌려 책을 펼쳤다. 음식에 관한 책은 아무리 할일이 많아도 우선 읽고 봐야 한다. 목차를 보니 식전빵을 시작으로 위스키까지 여러 항목들이 제시되어 있었다. 처음 시작은 무난했다. , 와인, 맥주 등은 워낙 관심이 많아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이라 정리하는 차원으로 읽었다. 수프와 가공육도 무난히 통과, 그러다 파스타 코너에서 깨달음이 왔다. 그래, 파스타는 원래 주연 음식이 아니었어. 작가는 파스타의 면이 탄수화물이니 원래 코스의 울타리 안에 머물러야 할 음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이 한국으로 넘어와서 단독 요리 취급을 당하는 것이다. ‘조연으로 완벽한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를 원치 않는 주연 자리에 덜컥 올린파스타의 이야기를 읽으며 전적으로 공감했다.      

  삐딱하게 앉아있던 나는 정자세로 앉아 다음 장을 읽기 시작했다. 피자의 정수는 반죽이다. 피자를 위한 토마토는 따로 있다. 무지막지하게 높은 고온에서 짦은 시간 구워내야 한다. 육즙은 결코 가둘 수 없다. 커피는 91~96도 물의 온도에서 내려야 한다…. 새로운 정보들이 가뭄의 단비처럼 내게 뿌려졌다. ~. 이토록 멋진 음식의 세계라니. 책을 다 읽고 난 후 바로 비싼 무쇠팬과 온도계를 주문했다. 책에 나온 대로만 실행하면 집에서도 맛있는 스테이크를 해 먹을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만약 책에서 소개한 그대로 스테이크를 구웠는데 실패한다면, 작가에게 기필코 항의 메일을 보낼 것이다. 어디 한번 결과를 봅시다.

 

* 피자를 위한 토마토도 따로 있다.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 지방의 산 마르차노에서 난다. 베수비오 화산 근처라 비옥한 땅의 혜택을 입는다.  위아래로 길쭉한 플럼 토마토의 일종으로 1996PDO 지정을 받았다. ‘산 마르차노 산’, ‘ DOP ‘인증 이라는 글자는 물론, 인증번호가지 찍혀 있어야 한다. 깡통 안에는 토마토가 통째로, 또는 조각을 낸 채로 담겨 있어야 한다. 갈거나 다진 제품도 없고, 심지어는 유기농 인증을 받지도 않는다. 158

 

 

* 왕답게 파르미자노 치즈의 몸값은 높은 편, 가격이 부담스럽다면 인접지역 롬바르디의 그라나 파다노를 대신 쓸 수 있다. 이름에 알갱이가 붙은데서 알 수 있듯 부슬부슬한 입자가 파르미자노와 비슷하고 맛 또한 빠지지 않는다. 217.

 

* 가공육과 음료의 궁합.

소시지 페일 에일, 필스너, 리즐링, 보졸레

베이컨 흑맥주, 피노그리지오, 샤르도네, 피노 누아르, 템프라니요

(하몽, 프로슈토) – 바르베라, 로제 샴페인, 셰리, 카바

 

* 스테이크 굽기

1. 200~250 그람은 나가야 고기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두께는 최소한 2~2.5. 센티미터.

2. 립 아이(등심), 뉴욕 스티립(채끝), 티본 등을 사용한다.

3. 굽기 최소 40분 전(하루 전) 소금간을 해 놓는다. 눈처럼 소박하게 넉넉히 뿌린다.  후추도 함께.

4. 온도계를 사라. 고기의 넓은 면에 평행하게 찔러 넣어 원하는 온도(레어 49, 미디엄레어 52, 미디엄 54)에 이르렀는지 확인만 하면 된다.

5.  굽기 30분 전에 냉장고에서 꺼내 놓는다.

6. 연기가 피워오를 때까지 팬을 달군다. 기름은 넉넉하게 1큰술 정도 두른다.

7. 한 면당 3분정도 굽는다. 뻔질나게 뒤집으며 고기에서 나오는 기름을 숟가락으로 스테이크의 표면에 끼얹어준다.

8. 다 익혔으면 접시에 담아 은박지를 씌운 후 5 분 동안 둔다. 남은 열로 마저 익는 것은 물론, 점도가 안정을 되찾아 고기를 썰어도 육즙이 빠져 나오지 않는다.

9. 따뜻한 접시를 준비한다. 곁들일 탄수화물은 감자, 술은 선 굵은 레드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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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이빨 1
제이디 스미스 지음, 김은정 옮김 / 민음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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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작가가 스물다섯살에 쓴 장편소설이다. 25살 이라고!!!!! 재능 있는 작가는 시작부터 다르구나. 와우. 작가는 영국에서 자메이카 이민자인 어머니와 영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그녀가 주변인 혹은 제 3세계에 관심을 기울이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어느 책에선가 <하얀 이빨>을 언급했길래 읽어봐야지 했는데 2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책을 펼쳤다. 이유는 단 하나. 25살의 젊은 아가씨의 글을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젊은 은고지 아디치에의 소설이 그러했듯 이 소설 또한 눈을 뗄 수가 없다. <오스카 와오의 짦고 놀라운 삶>과 비슷한 느낌이다. 어처구니 없는 해학적인 삶 아래 깔린 슬픔이라고 해야 할까?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영국에서 소외된 주변인이다. 그들은 자신이 우주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깨달았고 미미하고 뿌리가 없는 것임을 안다. 흑인, 황인, 여호와의 증인, 이슬람 교도, 레즈비언... 이들이 어떻게 주류사회에 동화되어 살 수 있을 것인가? 당연히 발을 붙일 수가 없지. 그렇기에 이들의 삶은 괴롭고, 억울하지만 정상인 영국인들(혹은 나는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독자)이 보기에 이들의 행동은 황당하고, 희극적이고, 어처구니가 없다. 작가는 바로 이 지점에서 각자 다른 시선들의 어긋남을 천연덕스럽게 보여준다. 이 소설의 즐거움은 거기서부터 시작이다.

   큰 그림을 그려보자면 이야기는 웰레스덴 그린에 사는 아치 존스와 사마드 미악 익발의 가족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영국인 아치는 자메이카에서 이민 온 흑인 클라라와 결혼하여 딸 아이리를 낳았다. 방글라데시 출신 익발은 방글라데시아의 아내 알사나가 있고, 쌍둥이 아들 마기드와 밀라트를 낳았다. 여기에 중산층 영국인 샬펜 가족이 더해지면서 소설은 정신없는 사건들의 연속으로 이어진다. 모든 일을 동전 던지기로 결정하는 대머리 아치, 앞니가 모두 빠져버린 클라라, 모두에게 왕따를 당하는 라이언 톱스, 열렬한 여호와의 증인인 클라라의 어머니 호텐스, 한 손이 불구이자 열렬한 이슬람교도인 사마드, 아무것도 모르고 결혼한 어린 알사나, 대마초를 입에 물고 다니는 건달 밀라트, 방글라데시아에서 더 영국적인 아이로 성장한 마기드, 뚱뚱하고 자신없는 아이리, 쥐 연구에 일생을 바친 마커스, 강경파 동물 애호 협회에 소속된 조슈아....이들의 삶은 한 곳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부표처럼 흔들린다.

   이들은 소외된 자들이기 때문이다. 인종차별을 당하고, 영국 문화에 섞이지 못하고, 종교가 다른 이들은 내면의 분노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른다. 현실을 감당하기 힘든 이들은 끊임없이 과거를 붙잡고, 과거의 영광을 추구하며, 어떤 이는 오로지 현재에만 충실한다. 이들은 불안하다. 이유없는 불안과 분노로 인해 고통받는다. 백인들의 우월한 하얀 이빨이 이들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다. 소설을 읽으며 외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과 한국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이 떠올랐다. 백인이 다른 인종(문화, 종교, 사상)보다 우월하다는 착각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얼게 한다.

   소설 마지막 부분에 얽히고 얽힌 사람들이 한 장소에 모이게 하는 글의 전개가 대단하다. 다만 그러고 난 후 갑자기 소설이 끝나버려 조금 아쉬웠다. 3권까지 만들어주세요.

 

* 종교가 마약이라면 전통은 훨씬 더 사악한 진통제다. 좀처럼 사악해 보이지 않으니까. 종교가 꽉 조이는 끈, 고동치는 정맥, 그리고 바늘이라면, 전통은 훨씬 더 가정적이고 복합적인 산물이다. 301. 1

 

* 그러나 밀라트는 다른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밀라트이며, 출신지가 어디이건 영국인들에게는, 파키이며 카레 냄새가 나고 성적 정체성이 없으며 다른 사람들의 일자리를 뺏고 아니면 직업 없이 국가의 돈이나 축내고 아니면 일자리를 친척들에게 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또한 자신이 치과 의사나 가게 주인이나 카레 나르는 사람은 될 수 있어도 럭비 선수나 영화 제작자는 될 수 없으며, 모국으로 되돌아가거나, 아니면 여기서 근근히 생활비나 벌어야 하며, 코끼리를 숭배하고 터번을 두르고 자신처럼 생기고 자신처럼 말하고 자신처럼 느끼는 사람은 최근에 살해당하지 않는 이상 뉴스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간단히 말해, 그는 이 나라에서 얼굴도 목소리도 없는 존재였다. 365. 1

 

* 사회적 변신의 귀재. 그러나 이 모든 것의 기저에는 언제나 분노와 아픔이 깔려 있었다. 어디에나 소속되는 사람들이 느끼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다는 느낌. 이 유약한 지점이 바로 밀라트를 가장 사랑받는 아이로 만들었다. 15. 2

 

* 영국인이 인자함을 베풀려 할 때는 우선 반드시 그 이유를 물어보아야 한다. 거기엔 항상 이유가 있으니까. 14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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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에 대하여 - 가오싱젠의 미학과 예술론
가오싱젠 지음, 박주은 옮김 / 돌베개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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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의 제목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얼마나 매력적인 제목인가. 창작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는 것이. 작가의 이름은 알고 있었으나 정작 그가 소설이나 희곡은 한 번도 읽어보지 못했다. 이 책은 작가가 여러 매체에 적은 글들, 강연, 인터뷰와 대담, 수상 소감 등을 모은 두툼한 책이다. 가오싱젠은 200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영혼의 산>이 대표작이다. 그는 1988년 정치적 난민의 신분으로 프랑스로 망명하였다. 가오싱젠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어렵다. 그는 소설을 쓰고, 희곡 작품을 무대에 올리며, 그림을 그리고, 오페라를 구상중이다. 스스로 고백하듯 그는 모든 분야에서 ‘정상’에 올라서길 원하는 사람이다.

  작가는 자신이 생각하는 문학은 무엇인지, 글쓰기는 어떠해야 하는지, 회화란 무엇인지, 소설, 희곡은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요즘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있는데 그가 글쓰기에 대해 사유하는 태도와 비슷함을 느낀다. 가오싱젠은 자신의 생각을 부드럽지만 단호한 어조로 이야기하는데, 글을 읽다보면 맞아, 정말 그래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말에 수긍하게 된다. 이미 작가로서 최상의 자리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진솔하고 겸손하게 문학을 대하는 작가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뜨끔하다. 그에게 고독과 창작의 자유를 배웠다. 문학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배웠다.

 

* 문학은 정치가 말하지 않는 인간 삶의 진실을 말할 수 있습니다. 19세기의 사실주의 작가인 발자크와 도스토옙스키는 구세주를 자임하거나 인민의 대변자나 정의의 화신이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다만 그 시대 사람들이 처한 현실을 보여주었을 뿐입니다. 이념을 기준으로 현실을 재단하거나 비판하지 않았고, 사회에 대한 이상적인 청사진을 제시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들은 다만 특정 정치의식 너머에 있는 인간 사회의 참모습을, 인간 삶의 곤경을, 인간 본성의 복잡함을 작품 속에 담아냈을 뿐이지요. 그래서 이들의 작품은 장구한 시간의 단련을 이겨내고 살아남았습니다. 66.

 

* 모든 개인은 살면서 이런저런 사회적 제약을 받습니다. 어떤 무리에 속하면 그 집단 고유의 제약을 받기 마련이지요. 이때 무리의 합창에, 권력의 언어에 매몰되지 않는 방법은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잊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큰 도전이 되는 일입니다.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잊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 확인의 몸부림이지만, 또한 자신의 생존환경에 대한 도전이기도 합니다. 문학에 필요한 표현은 바로 이런 것이지요. 문학은 비판을 위한 무기가 아닙니다. 문학은 다만 증언을 할 수 있을 뿐이죠. 67.

 

* 저에게 언어의 재발견이란 귀로 들어도 편한 글쓰기를 의미합니다. 소리 내어 읽었을 때 자연스럽게 들리지 않는 글은 실패작으로 치고 다시 씁니다. 저는 녹음기에 구술한 것을 초고로 삼습니다. 원고를 고칠 때도 속으로 읽으면서 최대한 구어의 느낌을 살리려고 노력합니다. 청각에 의존하면 문장의 번잡함을 많이 줄일 수 있습니다. 들어서 알아들을 수 없다면 제대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작가 자신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말을 어떻게 남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요? 언어의 본질은 소리에 있습니다. 글은 나중에 생긴 거죠. 문자는 소리인 언어를 기록하기 위해 생겨났습니다. 150.

 

* 예술의 이성은 무르익으면 무르익을수록 차가운 시선이 된다. 그 시선은 예술가 내면의 흐릿한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는 감각을 비추고, 창작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정서를 세련되게 다듬는다. 아름다움은 바로 이런 과정을 거쳐, 구체화된 형상을 통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212.

 

* 회화로 돌아온다는 것은 진실한 감수성으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미래는 영원히 이어지는 ‘지금 이 순간’ 속에 있다. 순식간에 변화하는 ‘지금 이 순간’을 관조하는 제 3의 눈으로 자신이 세계에 투사하는 형상을 바라보라. 257.

 

* 그러나 무엇보다도 작가는 독립적인 사고와 관용 의지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작가, 예술가라는 존재를 통해 현실의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심미적 감동을 얻고 싶어합니다. 문학은 결국 심미안입니다. 문학비판은 결코 윤리나 도덕, 정치에 관한 비판이 아닙니다. 문학 작품이 최종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심미적 가치여야 합니다. 문학은 사람의 감정에 호소하여 비애와 연민 혹은 이 모든 것을 뛰어넘는 감동을 자아냅니다. 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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