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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에 대하여 - 가오싱젠의 미학과 예술론
가오싱젠 지음, 박주은 옮김 / 돌베개 / 2013년 6월
평점 :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의 제목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얼마나 매력적인 제목인가. 창작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는 것이. 작가의 이름은 알고 있었으나 정작 그가 소설이나 희곡은 한 번도 읽어보지 못했다. 이 책은 작가가 여러 매체에 적은 글들, 강연, 인터뷰와 대담, 수상 소감 등을 모은 두툼한 책이다. 가오싱젠은 200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영혼의 산>이 대표작이다. 그는 1988년 정치적 난민의 신분으로 프랑스로 망명하였다. 가오싱젠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어렵다. 그는 소설을 쓰고, 희곡 작품을 무대에 올리며, 그림을 그리고, 오페라를 구상중이다. 스스로 고백하듯 그는 모든 분야에서 ‘정상’에 올라서길 원하는 사람이다.
작가는 자신이 생각하는 문학은 무엇인지, 글쓰기는 어떠해야 하는지, 회화란 무엇인지, 소설, 희곡은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요즘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있는데 그가 글쓰기에 대해 사유하는 태도와 비슷함을 느낀다. 가오싱젠은 자신의 생각을 부드럽지만 단호한 어조로 이야기하는데, 글을 읽다보면 맞아, 정말 그래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말에 수긍하게 된다. 이미 작가로서 최상의 자리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진솔하고 겸손하게 문학을 대하는 작가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뜨끔하다. 그에게 고독과 창작의 자유를 배웠다. 문학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배웠다.
* 문학은 정치가 말하지 않는 인간 삶의 진실을 말할 수 있습니다. 19세기의 사실주의 작가인 발자크와 도스토옙스키는 구세주를 자임하거나 인민의 대변자나 정의의 화신이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다만 그 시대 사람들이 처한 현실을 보여주었을 뿐입니다. 이념을 기준으로 현실을 재단하거나 비판하지 않았고, 사회에 대한 이상적인 청사진을 제시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들은 다만 특정 정치의식 너머에 있는 인간 사회의 참모습을, 인간 삶의 곤경을, 인간 본성의 복잡함을 작품 속에 담아냈을 뿐이지요. 그래서 이들의 작품은 장구한 시간의 단련을 이겨내고 살아남았습니다. 66.
* 모든 개인은 살면서 이런저런 사회적 제약을 받습니다. 어떤 무리에 속하면 그 집단 고유의 제약을 받기 마련이지요. 이때 무리의 합창에, 권력의 언어에 매몰되지 않는 방법은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잊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큰 도전이 되는 일입니다.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잊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 확인의 몸부림이지만, 또한 자신의 생존환경에 대한 도전이기도 합니다. 문학에 필요한 표현은 바로 이런 것이지요. 문학은 비판을 위한 무기가 아닙니다. 문학은 다만 증언을 할 수 있을 뿐이죠. 67.
* 저에게 언어의 재발견이란 귀로 들어도 편한 글쓰기를 의미합니다. 소리 내어 읽었을 때 자연스럽게 들리지 않는 글은 실패작으로 치고 다시 씁니다. 저는 녹음기에 구술한 것을 초고로 삼습니다. 원고를 고칠 때도 속으로 읽으면서 최대한 구어의 느낌을 살리려고 노력합니다. 청각에 의존하면 문장의 번잡함을 많이 줄일 수 있습니다. 들어서 알아들을 수 없다면 제대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작가 자신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말을 어떻게 남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요? 언어의 본질은 소리에 있습니다. 글은 나중에 생긴 거죠. 문자는 소리인 언어를 기록하기 위해 생겨났습니다. 150.
* 예술의 이성은 무르익으면 무르익을수록 차가운 시선이 된다. 그 시선은 예술가 내면의 흐릿한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는 감각을 비추고, 창작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정서를 세련되게 다듬는다. 아름다움은 바로 이런 과정을 거쳐, 구체화된 형상을 통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212.
* 회화로 돌아온다는 것은 진실한 감수성으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미래는 영원히 이어지는 ‘지금 이 순간’ 속에 있다. 순식간에 변화하는 ‘지금 이 순간’을 관조하는 제 3의 눈으로 자신이 세계에 투사하는 형상을 바라보라. 257.
* 그러나 무엇보다도 작가는 독립적인 사고와 관용 의지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작가, 예술가라는 존재를 통해 현실의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심미적 감동을 얻고 싶어합니다. 문학은 결국 심미안입니다. 문학비판은 결코 윤리나 도덕, 정치에 관한 비판이 아닙니다. 문학 작품이 최종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심미적 가치여야 합니다. 문학은 사람의 감정에 호소하여 비애와 연민 혹은 이 모든 것을 뛰어넘는 감동을 자아냅니다. 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