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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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는 현대의 투명성에 대해 탐구한다. 폭력이 내재된 투명성, 감시와 통제를 불러일으키는 투명성에 대해 경계심을 보인다. 얇은 책이고 문장들이 시처럼 간결하지만 공감되는 부분들이 많다. 이 책을 읽은 후 페이스북(안한지는 몇 년이 지났지만)에 있던 모든 사진들을 지웠다. 작가의 말에 완벽하게 낚였다고나 할까?

 

 

*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 나는 그것으로 살아간다. -페터 한트케

 

* 사물은 모든 부정성을 떨쳐버릴 때, 매끈하게 다듬어지고 평탄해질 때, 아무 저항 없이 자본과 커뮤니케이션과 정보의 흐름에 순응할 때 투명해진다. 행위는 조작이 될 때, 즉 계산하고 조종하고 통제할 수 있는 과정에 종속될 때 투명해진다. 시간은 이용 가능한 현재들의 평탄한 연속이 될 때 투명해진다. 그럴 때는 미래 또한 최적화된 현재로서 긍정성을 띄게 된다. 투명한 시간은 운명이 없는 시간, 사건이 없는 시간이다. 이미지는 모든 연출과 안무, 미장센이 제거될 때, 모든 해석학적 깊이가, 즉 의미가 사라질 때 포르노가 된다. 포르노는 이미지와 눈의 직접적인 접촉이다. 사물은 고유한 개별성을 상실하고 스스로를 오직 가격으로만 표현할 때 투명해진다. 돈은 모든 것을 비교 가능하게 만들면서, 사물의 통약 불가능성과 고유성을 완전히 철폐한다. 투명사회는 동일한 것의 지옥이다. 14.

 

* 정보에는 방향, 즉 의미가 없다. 진리의 부정성이 결여됨으로 인해 긍정적인 것이 마구 증식하고 다량화된다. 과다 정보와 과다 커뮤니케이션은 바로 진리의 결핍, 존재의 결핍을 드러낼 뿐이다. 더 많은 정보, 더 많은 커뮤니케이션은 전체의 근본적인 불명료함을 제거하지 못한다. 더 많은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불명료함은 오히려 더욱 첨예화된다. 27.

 

* 디지털 사진에서는 모든 부정성이 제거된다. 디지털 사진은 암실도 현상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진이 되기 이전의 원판, 즉 네거티브는 존재하지 않는다. 디지털 사진은 순수한 포지티브이다. 생성, 노쇠, 죽음은 지워진다. 30-31.

 

* 소셜미디어와 개인화된 검색엔진은 네트워크 내에 외부가 제거된 절대적인 인접 공간을 수립한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을 닮은 사람들을 만난ㄷ. 여기에는 변화를 가능케 할 어떤 부정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디지털 이웃 사촌의 공간은 참여자에게 마음에 드는 세계의 단면만을 제공하며, 그럼으로써 공론장, 공적 영역, 비판적 의식을 해체하고 세계를 사적인 장소로 만들어버린다. 74.

 

* 디지털 개인들은 스마트몹에서 보듯이 때때로 뭉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집단적 운도의 패턴은 마치 동물의 무리처럼 매우 순간적이고 불안정하다. 휘발성이 그러한 모임의 특징이다. 게다가 그것은 종종 카니발, 또는 특별한 책임이 따르지 않는 유희와 같은 성격을 보여준다. 이 점에서 디지털 무리는 전통적 군중과 구별된다. 예컨대 군중은 노동자 집회에서 보듯이 휘발해버리지 않고, 결의에 차 있으며, 순간적인 패턴이 아니라 확고한 대오를 형성한다. 하나의 영혼으로, 하나의 이념을 통해 뭉친 군중은 한 방향으로 행진한다. 군중은 굳은 결의를 지닌 까닭에 우리가 될 수 있고, 기존의 지배 관계를 정면으로 공격하는 행동에 함께 나설 수도 이다. 행동을 함께하기로 결단한 군중만이 권력을 산출한다. 군중은 권력이다. 디지털 무리에서는 이러한 결연함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행진하지 않는다. 디지털 무리는 갑자기 생겨났다가 갑자기 사라진다. 131-32.

 

*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은 시선이 결핍된 커뮤니케이션이다........스카이프의 시선은 비대칭적이다. 스카이프 덕택에 우리는 하루 24시간 내내 가까이 있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줄곧 서로 다른 데를 쳐다보고 있는 셈이다. 서로 다른 데를 보고 있어야 하는 이유는 비단 카메라의 각도 때문만은 아니다. 문제는 오히려 시선의 근원적인 부재, 타자의 부재에 있다. 디지털 매체는 우리에게서 점점 더 타자를 빼앗아간다. 148-9.

 

* 사랑 또한 증오의 부정적 긴장 속에 묶여 있다. 그리하여 사랑은 참/거짓, 선/악과 동일한 질서에 속한다. 부정성을 지닌 사랑은 긍정적이기에 가산적이고 축적 가능한 좋아요와 구별된다. 페이스북 친구들에게서도, 그 경쟁자들에게서도 카르 슈미트적인 의미에서 친구와 적을 갈라놓은 부정성은 찾아볼 수 없다.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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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향기 - 머무름의 기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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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가 구사하는 언어는 간결하고 시처럼 향기가 난다. 그의 모든 생각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옳다고 생각한다. 결과만이 아니라 무언가를 행하는 ‘과정’까지도 의미를 부여하고 즐길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머무름의 향기, 느릿느릿한 걸음의 향기를 기꺼이 받아들이자.

 

 

* 제때 죽을 수 없는 사람은 불시에 끝날 수밖에 없다. 죽음은 삶이 고유하게 종결될 것을 전제한다. 죽음이란 종결의 형식인 것이다. 의미 있는 종결의 형식을 빼앗긴 삶은 불시에 중단될 수 있을 뿐이다. 종결 내지 완결이 불가능해지고 방향도 끝도 없는 전진, 영구적인 미완성과 새로운 시작만이 남아 있는 세계, 즉 삶이 하나의 형태로, 하나의 전체로 마무리되지 못하는 세계에서는 죽는 것이 쉽지 않게 된다. 그래서 삶의 과정은 불시에 끊어지고 만다. 20

 

* 정보들은 서사적 길이나 폭을 알지 못한다. 정보들은 중심도 없고 방향성도 없으며, 우리에게 물밀 듯이 닥쳐온다. 정보에는 향기가 없다. 그 점에서 정보는 역사와 다르다. 보드리야르가 주장하는 바와는 달리, 정보와 역사의 관계는 점점 더 완벽해지는 시뮬라시옹과 원본, 또는 시뮬라시옹과 기원 사이의 관계 같은 것이 아니다. 정보는 오히려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보아야 한다. 정보에는 오나전히 다른 시간성이 내재되어 있다. 정보는 원자화된 시간, 즉 점-시간의 현상이다.

점들 사이에서는 필연적으로 공허가 입을 쩍 벌리고 있다.........그리하여 점-시간은 비어있는 간극을 제거하거나 단축하고자 하는 강박을 낳는다.......이러한 가속화의 힘은 삶의 모든 영역을 지배한다. 원자화된 시간은 서사적 긴장이 없는 까닭에 사람들의 주의를 지속적으로 묶어두지 못한다. 그 대신 인간의 지각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 또는 노골적인 것을 공급받는다. 점-시간은 사색적인 머무름을 허용하지 않는다. 43-4.

 

* 우리가 전적으로 목표에만 집중한다면, 목표 지점에 이르는 공간적 간격은 그저 최대한 빨리 극복해야 할 장애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순전히 목표 지향적인 태도는 사이공간의 의미를 파괴한다. 이로써 사이공간의 의미는 독자적인 가치라고는 전혀 없는 복도로 축소된다. 가속화는 사이공간의 극복에 필요한 사이시간을 완전히 없애버리려는 시도이다. 이에 따라 길의 풍부한 의미는 사라진다. 길에서는 더 이상 향기가 나지 않는다. 아니, 길 자체가 아예 사라진다. 가속화는 세계의 의미론적 빈곤을 초래한다. 공간과 시간은 더 이상 많은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69.

 

* 향기는 느리다. 매체적인 측면에서 보더라도 향기는 조급성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향기를 시각적 이미지처럼 빠르게 연속적으로 교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각적 이미지와는 반대로 향기는 가속화되지 않는다. 향기가 지배하는 사회라면 아마도 변화나 가속화를 추구하는 경향이 발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회는 추억과 기억을 자양분으로 하는 사회, 느린 것과 긴 것을 먹고사는 사회일 것이다. 반면 조급성의 시대는 “영화적” 사회, 즉 시각의 영향이 두드러진 시대이다. 81.

 

* 이러한 시간들의 향기는 서사적이지 않고, 사색적이다. 이들은 선후관계로 짜여 있지 않다. 오히려 이들은 모두 스스로 자기 안에 머물러 있다.

 

봄의 백화, 가을의 달 -

여름의 서늘한 바람, 겨울의 눈.

정신에 쓸데없는 일이 매달려 있지 않다면

그게 바로 사람에게 좋은 때라네.

좋은 시간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쓸데없는 것”을 비워낸 정신이다. 100

 

* 숲은 고요히 쉰다

계곡물은 쏟아진다

절벽은 영구하다

비는 똑똑 듣는다

밭은 기다린다

샘물은 솟는다

바람은 거주한다

축복은 곰곰 생각한다

하이데거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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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의 발달 문학과지성 시인선 350
문태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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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문장은 느릿느릿하다. 늙은 소가 지는 해를 등지고 물끄러미 밭고랑을 바라보듯, 조용한 구석에 앉아 시인의 언어를 찬찬히 들여다본다. 언제였을까? 처음 이 시인이 좋아진 것이. ‘가재미’란 시를 읽으며 울컥 눈물이 났었지. 지인 중에 아픈 사람이라곤 단 한명도 없었는데 말이다. 그때부터였을까? 아니야, ‘비가 오려 할 때’를 읽으며 머릿속에 그려지는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하염없이 마음이 착해졌던 때였을까? 시인의 언어가 삶에 녹아든다면, 발걸음은 좀 더 느려지고, 시선은 좀 더 오래 머물며, 소유는 좀 더 단촐해지겠지. 고작 시집 한 권이 삶을 이토록 흔드는군.

 

* 당신에게 미루어놓은 말이 있어

 

오늘은 당신에게 미루어놓은 말이 있어

 

길을 가다 우연히 갈대숲 사이 개개비의 둥지를 보았네

 

그대야, 나의 못다 한 말은

 

이 외곽의 둥지처럼 천둥과 바람과 눈보라를 홀로 맞고 있으리

 

둥지에는 두어 개 부드럽고 말갛고 따뜻한 새알이 있으리

 

나의 가슴을 열어젖히면

 

당신에게 미루어놓은 나의 말은

 

막 껍질을 깨치고 나올 듯

 

작디작은 심장으로 뛰고 있으리

 

* 두꺼비에 빗댐

 

내 걸음 가다 멎는 곳 당신 얼굴 들썽들썽해

천천히 오직 천천히

당신의 집과 마당을 다 둘러 나왔소

 

습한 곳에 바쳐질 조촐한 나의 목숨

나의 서정

 

* 물끄러미

 

한낮에 덩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입이 뾰족한 들쥐가 마른 덩굴 아래를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갈잎들은 지는 일로 하루를 살았다

오늘은 일기에 기록할 것이 없었다

헐거워지는 일로 하루를 살았다

나는 식은 재를 손바닥 가득 들어 올려보았다

 

* 조금씩 자꾸 웃는 아이

 

들키지 않도록 살금살금

아무도 없는 부뚜막에서

장독대 낮은 항아리 곁에서

쪼그리고 앉아

토란잎에 춤추는 이슬처럼

생글생글 웃는 아이

 

비밀을 갖고 가

저곳서

혼자 조금씩 자꾸 웃는 아이

 

언제였던가.

 

간질간질하던 때가

고백을 하고 막 돌아서던 때가

소녀처럼,

샛말간 얼굴로 저곳서 나를 바라보던 생의 순간은

 

* 엎드린 개처럼

 

배를 깔고 턱을 땅에 대고 한껏 졸고 있는 한 마리 개처럼

이 세계의 정오를 지나가요

나의 꿈은 근심 없이 햇빛의 바닥을 기어가요

목에 쇠사슬이 묶인 줄을 잊고

쇠사슬도 느슨하게 정오를 지나가요

원하는 것은 없어요

백일홍이 핀 것을 내 눈 속에서 보아요

눈은 반쯤 감아요, 벌레처럼

나는 정오의 세계를 엎드린 개처럼 지나가요

이 세계의 바닥이 식기 전에

나의 꿈이 싸늘이 식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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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거침없는 사랑
김용택 / 푸른숲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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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병우의 소나무 그림이 조그맣게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이 시집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온통 사랑으로 가득한, 하루에 한 편씩 사랑하는 사람에게 읽어 주기에 가장 알맞은, 어느 곳을 펼쳐 보아도 눈물이 날 것 같은, 도저히 누구라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시집. 대체 이 시인은 어떠한 감성을 지녔기에 가장 단순한 언어의 조합으로 이토록 완벽하게 사랑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까? 시인의 수필이나 시를 읽을 때마다 늘 감탄하고 행복하지만 특히 이 시집은 아름답다. 책 속에 있는 모든 시를 읽는 데는 한 시간이 걸리지만, 읽고 또 읽어도 자꾸 손길이 간다. 수일동안 하염없이 시집을 들춰보며 사랑의 소중함에 대해 생각한다. 아름답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을까, 사연 없는 사랑이 어디 있을까, 더 많이 사랑해야지, 더 많이 표현해야지, 자꾸 자꾸 다짐하며 책장을 넘긴다.

 

*다 당신입니다

 

개나리꽃이 피면 개나리 꽃 피는 대로

살구꽃이 피면은 살구꽃이 피는 대로

비오면 비오는 대로

그리워요

보고 싶어요

손잡고 싶어요

 

당신입니다

 

* 눈 오시네

어,

눈 오시네

눈이 와

산에 눈이 먼저

오시네

눈 먼저 오시고

그대

오시려나

 

어, 눈 오시네

눈이

하얀

눈송이가

그리며

그대 곱게 그려내네

 

* 너무 먼 당신

 

초승달이 저녁 하늘에 걸리고

풀벌레가 밤을 새워 웁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너무 멀고

저렇게 생각하면 당신은 내게 너무 무겁습니다

금새 질 달 보며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의 강에 쉼 없이 흐르는

물이고 싶습니다

당신의 산과 들에 내리는

비이고 싶습니다

당신의 바짓가랑이를 적시는

나는 아침 이슬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의 마음 가장 자리에 앉는

눈송이이고 싶습니다

당신이 가시는 길 앞에 달빛이고 싶고

잠든 당신의 곁에 머무는 바람결이고 싶고

물가에 앉아 물 보는 당신의 그 마음을 거드는 나는

잔물결이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나의 세상에 당신을 가두고

당신의 세상에 내가 살고 싶습니다

 

* 그대, 거침없는 사랑

 

아무도 막지 못할

새벽처럼

거침없이 달려오는

그대 앞에서

나는

꼼짝 못하는

한떨기 들꽃으로 피어납니다

몰라요 몰라

나는 몰라요

캄캄하게

꽃 핍니다.

 

* 저 들에 저 들국 다 져불것소

 

날이면 날마다

내 맘은

그대 오실 저 들길에 가

서 있었습니다.

이 꽃이 피면 오실랑가

저 꽃이 피면 오실랑가

꽃 피고 지고

저 들길에 해가 뜨고

저 들길에서 해가 졌지요

 

그대 어느 산그늘에 붙잡힌

풀꽃같이 서 있는지

내 몸에 산그늘 내리면

당신이 더 그리운 줄을

당신은 아실랑가요

 

대체 무슨 일이다요

저 꽃들 다 져불면 오실라요

찬바람 불어오고

강물 소리 시려오면

내 맘 어디 가 서 있으라고

이리 어둡도록 안 온다요

나 혼자 어쩌라고

그대 없이 나 혼자 어쩌라고

저 들에 저 들국 지들끼리 다 져불것소.

 

* 당신 없는 하루

 

해 뜨니

앞 강물은 저리 흐르요

당신 떠난 이 나라

쳐다볼 곳 없는 내 눈길이

먼 허공을 헤매이고 헛헛한 마음도

이리 기댈 곳 없으니

이 맘이 시방 맘이 아니요

차라리

이 몸 이 맘

이 강물이 다 가져가불고

저 강물에 얼른얼른

오늘 해도 져불면 좋것소

 

* 사랑

 

사랑은 혁명입니다

거기

사람들이 흰밥 먹으며 사는

아름답고 큰 나라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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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나태주 지음 / 푸른길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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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한편이 갖는 힘은 얼마나 위대한가. 때로 시는 연인의 다정한 속삭임, 달콤한 커피, 아이의 깨끗한 미소, 충분한 휴식처럼 다가온다. 특히 아무것도 하기 싫은데 해야 할 일은 잔뜩 쌓여 있는, 추운 겨울의 오후라면 더욱 그렇다. 잠깐 휴식을 취하려 시집을 펼쳤는데 첫 장부터 너무 좋아 끝까지 다 읽고 말았다. 시는 모름지기 조금씩 읽어야 제 맛인데, 통째로 읽으니 더욱 맛있다. 시인의 언어는 단순하지만, 단순함이 아름다운 시를 만든다. 얇은 시집 한 권을 읽으며 시인의 삶을 엿본 기분이다. 시집의 맨 끝장에 시인은 이렇게 적었다. “정년퇴임하면서 결심한 일이 있다. 이제 나는 절대로 남을 위해서 살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해서 살겠다는 결심이 그것이다. 남을 위해서 먹기 싫은 술도 먹지 않겠고 가기 싫은 모임에도 가지 않을 것이며 만나기 싫은 사람은 단호히 만나지 않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나 좋은 대로만 살 것이다.” 아, 이 말을 실천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안다. 그래, 나도 그렇게 살아야지. 불필요한 만남과 일들을 줄여야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기에도 짧은 인생이다. 나보다 앞서 삶을 살고 있는 시인의 선언을 읽으며 생각한다. 하루가 저물고 있다. 충분한 하루였다.

 

* 꽃신

 

꽃을 신고 오시는 이

누구십니까?

 

아, 저만큼

봄님이시군요!

 

어렵게 어렵게 찾아 왔다가

잠시 있다 떠나가는 봄

 

짧기에 더욱 안타깝고

안쓰러운 사랑

 

사랑아 너도 갈 때는

꽃신 신고 가거라.

 

* 새사람

 

그럼요

날마다 새날이고

봄마다 새봄이구요

사람마다 새사람

 

그중에서도 당신은

새봄에 새로 그리운

사람 중에서도 첫 번째

새사람입니다.

 

* 새해 아침

 

언제나 좋은 벗

 

당신의 향기가

나를 살립니다.

 

* 충분한 하루

 

하나님 오늘은 이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밝은 해를 보게 하시고

세 끼 밥을 먹게 하시고

성한 다리로 길을 걷게 하셨을뿐더러

길을 걸으며 새소리를 듣게 하셨으니

얼마나 크신 축복인지요

더구나 아무하고도 말다툼 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 신세 크게 지지 않고 살게 해주셨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이제 빠르게 지나가는 저녁시간입니다

하나님 오늘은 이것으로 충분했습니다.

내일도 하루 충분하게 살게 하여주십시오.

 

* 오후

 

구름의 잔에

음악을 풀어 넣는다

 

비어 있는 인생이

문득 향기롭다.

 

* 귓속말 2

 

순간순간 어렵게 헤어지고

하루하루 힘들게 만난다

 

같이 가자 우리

멀리까지 같이 가자

 

울면서 말을 해도 너는 끝내

알아듣지 못한다.

 

* 마음을 얻다

 

있는 것도 없다고

당신이 말하면

없는 것이고

 

없는 것도 있다고

당신이 말하면

있는 것입니다

 

후회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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