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의 발달 문학과지성 시인선 350
문태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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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문장은 느릿느릿하다. 늙은 소가 지는 해를 등지고 물끄러미 밭고랑을 바라보듯, 조용한 구석에 앉아 시인의 언어를 찬찬히 들여다본다. 언제였을까? 처음 이 시인이 좋아진 것이. ‘가재미’란 시를 읽으며 울컥 눈물이 났었지. 지인 중에 아픈 사람이라곤 단 한명도 없었는데 말이다. 그때부터였을까? 아니야, ‘비가 오려 할 때’를 읽으며 머릿속에 그려지는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하염없이 마음이 착해졌던 때였을까? 시인의 언어가 삶에 녹아든다면, 발걸음은 좀 더 느려지고, 시선은 좀 더 오래 머물며, 소유는 좀 더 단촐해지겠지. 고작 시집 한 권이 삶을 이토록 흔드는군.

 

* 당신에게 미루어놓은 말이 있어

 

오늘은 당신에게 미루어놓은 말이 있어

 

길을 가다 우연히 갈대숲 사이 개개비의 둥지를 보았네

 

그대야, 나의 못다 한 말은

 

이 외곽의 둥지처럼 천둥과 바람과 눈보라를 홀로 맞고 있으리

 

둥지에는 두어 개 부드럽고 말갛고 따뜻한 새알이 있으리

 

나의 가슴을 열어젖히면

 

당신에게 미루어놓은 나의 말은

 

막 껍질을 깨치고 나올 듯

 

작디작은 심장으로 뛰고 있으리

 

* 두꺼비에 빗댐

 

내 걸음 가다 멎는 곳 당신 얼굴 들썽들썽해

천천히 오직 천천히

당신의 집과 마당을 다 둘러 나왔소

 

습한 곳에 바쳐질 조촐한 나의 목숨

나의 서정

 

* 물끄러미

 

한낮에 덩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입이 뾰족한 들쥐가 마른 덩굴 아래를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갈잎들은 지는 일로 하루를 살았다

오늘은 일기에 기록할 것이 없었다

헐거워지는 일로 하루를 살았다

나는 식은 재를 손바닥 가득 들어 올려보았다

 

* 조금씩 자꾸 웃는 아이

 

들키지 않도록 살금살금

아무도 없는 부뚜막에서

장독대 낮은 항아리 곁에서

쪼그리고 앉아

토란잎에 춤추는 이슬처럼

생글생글 웃는 아이

 

비밀을 갖고 가

저곳서

혼자 조금씩 자꾸 웃는 아이

 

언제였던가.

 

간질간질하던 때가

고백을 하고 막 돌아서던 때가

소녀처럼,

샛말간 얼굴로 저곳서 나를 바라보던 생의 순간은

 

* 엎드린 개처럼

 

배를 깔고 턱을 땅에 대고 한껏 졸고 있는 한 마리 개처럼

이 세계의 정오를 지나가요

나의 꿈은 근심 없이 햇빛의 바닥을 기어가요

목에 쇠사슬이 묶인 줄을 잊고

쇠사슬도 느슨하게 정오를 지나가요

원하는 것은 없어요

백일홍이 핀 것을 내 눈 속에서 보아요

눈은 반쯤 감아요, 벌레처럼

나는 정오의 세계를 엎드린 개처럼 지나가요

이 세계의 바닥이 식기 전에

나의 꿈이 싸늘이 식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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