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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향기 - 머무름의 기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3월
평점 :
작가가 구사하는 언어는 간결하고 시처럼 향기가 난다. 그의 모든 생각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옳다고 생각한다. 결과만이 아니라 무언가를 행하는 ‘과정’까지도 의미를 부여하고 즐길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머무름의 향기, 느릿느릿한 걸음의 향기를 기꺼이 받아들이자.
* 제때 죽을 수 없는 사람은 불시에 끝날 수밖에 없다. 죽음은 삶이 고유하게 종결될 것을 전제한다. 죽음이란 종결의 형식인 것이다. 의미 있는 종결의 형식을 빼앗긴 삶은 불시에 중단될 수 있을 뿐이다. 종결 내지 완결이 불가능해지고 방향도 끝도 없는 전진, 영구적인 미완성과 새로운 시작만이 남아 있는 세계, 즉 삶이 하나의 형태로, 하나의 전체로 마무리되지 못하는 세계에서는 죽는 것이 쉽지 않게 된다. 그래서 삶의 과정은 불시에 끊어지고 만다. 20
* 정보들은 서사적 길이나 폭을 알지 못한다. 정보들은 중심도 없고 방향성도 없으며, 우리에게 물밀 듯이 닥쳐온다. 정보에는 향기가 없다. 그 점에서 정보는 역사와 다르다. 보드리야르가 주장하는 바와는 달리, 정보와 역사의 관계는 점점 더 완벽해지는 시뮬라시옹과 원본, 또는 시뮬라시옹과 기원 사이의 관계 같은 것이 아니다. 정보는 오히려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보아야 한다. 정보에는 오나전히 다른 시간성이 내재되어 있다. 정보는 원자화된 시간, 즉 점-시간의 현상이다.
점들 사이에서는 필연적으로 공허가 입을 쩍 벌리고 있다.........그리하여 점-시간은 비어있는 간극을 제거하거나 단축하고자 하는 강박을 낳는다.......이러한 가속화의 힘은 삶의 모든 영역을 지배한다. 원자화된 시간은 서사적 긴장이 없는 까닭에 사람들의 주의를 지속적으로 묶어두지 못한다. 그 대신 인간의 지각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 또는 노골적인 것을 공급받는다. 점-시간은 사색적인 머무름을 허용하지 않는다. 43-4.
* 우리가 전적으로 목표에만 집중한다면, 목표 지점에 이르는 공간적 간격은 그저 최대한 빨리 극복해야 할 장애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순전히 목표 지향적인 태도는 사이공간의 의미를 파괴한다. 이로써 사이공간의 의미는 독자적인 가치라고는 전혀 없는 복도로 축소된다. 가속화는 사이공간의 극복에 필요한 사이시간을 완전히 없애버리려는 시도이다. 이에 따라 길의 풍부한 의미는 사라진다. 길에서는 더 이상 향기가 나지 않는다. 아니, 길 자체가 아예 사라진다. 가속화는 세계의 의미론적 빈곤을 초래한다. 공간과 시간은 더 이상 많은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69.
* 향기는 느리다. 매체적인 측면에서 보더라도 향기는 조급성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향기를 시각적 이미지처럼 빠르게 연속적으로 교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각적 이미지와는 반대로 향기는 가속화되지 않는다. 향기가 지배하는 사회라면 아마도 변화나 가속화를 추구하는 경향이 발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회는 추억과 기억을 자양분으로 하는 사회, 느린 것과 긴 것을 먹고사는 사회일 것이다. 반면 조급성의 시대는 “영화적” 사회, 즉 시각의 영향이 두드러진 시대이다. 81.
* 이러한 시간들의 향기는 서사적이지 않고, 사색적이다. 이들은 선후관계로 짜여 있지 않다. 오히려 이들은 모두 스스로 자기 안에 머물러 있다.
봄의 백화, 가을의 달 -
여름의 서늘한 바람, 겨울의 눈.
정신에 쓸데없는 일이 매달려 있지 않다면
그게 바로 사람에게 좋은 때라네.
좋은 시간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쓸데없는 것”을 비워낸 정신이다. 100
* 숲은 고요히 쉰다
계곡물은 쏟아진다
절벽은 영구하다
비는 똑똑 듣는다
밭은 기다린다
샘물은 솟는다
바람은 거주한다
축복은 곰곰 생각한다
하이데거 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