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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미술관의 유령들 - 그림으로 읽는 욕망의 윤리학
백상현 지음 / 책세상 / 2014년 8월
평점 :
모든 것을 ‘결핍’으로 설명하려는 라깡 이론 중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이 책은 라깡을 제외하고서라도 그 자체로 매우 재미있다. 또한 라깡의 이론을 비유로 빗대어 혹은 그림에 적용하여 차근 차근 설명하고 있기에 그동안 그림을 보며 궁금했던 부분들을 쉽게 이해(납득) 할 수 있었다. 새로운 화가와 비디오 아티스트를 알게 되는 기쁨까지 누렸으니, 이 책은 좋은 책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서론부터 에필로그까지 한 문장도 소홀히 하지 않은 저자 덕분에 몸은 좀 피곤했지만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시간이었다.
* 반면 스푸마토 기법을 이용해 신비로운 느낌과 모호함을 한껏 강조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들에는 응시를 달래는 이미지의 모호함 속에서 시각으로 전환되었던 눈의 기능을 다시 응시로 되돌리려는 미끄러짐이 강조되어 있다. 다빈치의 그림들이 더 많은 욕망을 오래 지속시킬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고야의 검은 그림 연작으로 말하자면 이와 같은 대상 a의 미혹을 훌쩍 넘어서버린 이미지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검은 그림에서 보여지는 얼굴과 같은 이미지들은 그 너머에 있는 공백의 공허를 가리고 은폐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의 의미만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쨌든 그 최소한의 의미들은 감상자의 주의를 죽음 또는 공포와 같이 파괴적인 의미화의 지점으로 이끌어간다. 그러나 의미의 역할은 거기까지이다. 이미지들은 더 이상의 설명을 거부한 채 소멸해버리고(공백에 먹혀버리고), 감상자의 응시는 어느새 공백의 가장자리에 너무 가까이 접근해버렸음을 깨닫게 된다.
고야는 바로 그와 같은 방식으로 자신이 그린 이미지들의 파괴적인 효과 속에서 공백의 가장자리로 접근하는 데 성공했다.
114~15
* 리히터의 유령이미지 역시 이와 동일한 기능을 한다. 그의 그림은 세계의 풍경과 인물들을 사로잡고 있는 질서의 선명함을 오염시키는 일종의 ‘오류’를 생산해낸다. 갑작스런 충격으로 시각을 상실할 때의 이미지, 또는 텔레비전의 주파수가 맞지 않을 때의 이미지를 흉내 내고 있는 리히터의 그림 속 이미지들은 결국 세계의 선명함을 거부하려는 욕망 속에서 피어오른 신기루의 형상을 하고 있다.
세계 이미지의 선명함을 거부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존재를 지배하고 있는 세계의 질서를, 그 정당성을 거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잠시만이라도 리히터의 이미지가 품고 있는 욕망에 사로잡혀 본 사람이라면 더 이상 미술관 바깥의 익숙했던 풍경을, 그것의 정돈된 선명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게 될 것이다. 이제 그는 세계의 사물들을 명확히 구별해주는 윤곽선의 선명함에 사로잡히는 대신 흐릿한 시각 장애의 상태, 아무것도 보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보려는 응시의 눈빛을 욕망하게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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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의 공백’은 시간의 일관성이라는, 역시 판타즘의 산물일 수밖에 없는 사유의 구조를 해체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시간적 사유의 바닥 같은 것이다. 그것은 ‘시간의 수조’ 밑바닥에서 느끼는 보다 자유로운 시간이다. 그러나 일상은 우리를 그와 같은 자유로운 시간 체험으로부터 분리하고 차단하고 금지한다. 우연한 사건으로 ‘시간의 공백’을 체험한 후 이를 일종의 착각으로 간주하는 것은 우리가 시간의 일관성이라는 틀에 갇혀 있기 때문은 아닐까? 사람들은 대부분 시간을 쪼갤 수도, 늘릴 수도, 알려진 형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접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한 채 살아간다. 어린 시절의 상상적 이미지의 세계 속에서 자유롭게 굴절되며 변형 가능하던 시간의 흐름은 이제 시곗바늘의 엄격한 움직임 속에서 재단되며, 이를 벗어나는 어떠한 상상도 불가능한 것으로 선고된다. 만일 이러한 규범에서 벗어날 경우 그것은 ‘광기’라는 이름으로 간단히 배제돼버린다. 287
* 느리게 독서하는 사람이 기다려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순간이다. 세계라는 책 속에서 연쇄되는 문장들, 이미지들 사이에 가득 메워져 있었던 의미가 누락되는 순간-리오타르는 이러한 순간을 문장 사이의 ‘분쟁’이 출현하는 순간이라고 정의한다-세계의 관찰자는 공백을 보게 될 것이다. 시간의 수조로 하강하던 인간이 마침내 바닥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후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단어들 사이에서, 문장들 사이에서, 이미지들 사이에서 공백을 본 세계의 관찰자는 어떤 일을 하게 될까? 그는 아마도 ‘창조’라고 불리는 인간 고유의 실천을 욕망하게 될 것이다. ‘세계’라는 책이 강제하는 의미의 질서를 훌쩍 뛰어넘는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책을 써나가게 될 거라는 말이다. 이제 그는 읽는 대신 쓰게 될 것이고, 보는 대신 그리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백의 전령으로서의 유령이미지가 관객에게서 감상자의 지위를 박탈하고 예술가로서 다시 태어날 것을 요청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공백이란 책의 빈 페이지 혹은 하얀 캠퍼스의 표면이다. 감상자는 이제 예술작품이 그를 위해 준비한 백지를 채워야 하는 자유라는 ‘의무’를 이행할 것을 요청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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