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가 맨 앞 문학동네 시인선 52
이문재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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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이 이렇게 두껍다니. 만 원도 하지 않는 시집에 시가 수북이 들어 있어 몸둘 바를 모르겠다.

가만히 앉아 굴러들어오는 복을 받은 기분. 좋은 시는 또 어찌나 많은지,

아무리 베껴 적어도 끝이 없이 나와 중간에 포기했다.

모처럼 시집 한권으로 배가 부르다. 감사합니다

 

 

 

어떤 경우

 

어떤 경우에는

내가 이 세상 앞에서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내가 어느 한 사람에게

세상 전부가 될 때가 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봄날

 

대학 본관 앞

부아앙 좌회전하던 철가방이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저런 오토바이가 넘어질 뻔했다.

청년은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막 벙글기 시작한 목련꽃을 찍는다.

 

아예 오토바이에서 내린다.

아래에서 찰칵 옆에서 찰칵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 찰칵찰칵

백목련 사진을 급히 배달할 데가 있을 것이다.

부아앙 철가방이 정문 쪽으로 튀어나간다.

 

계란탕처럼 순한

봄날 이른 저녁이다.

 

 

      

 

 

   봄이 고인다

 

봄이 고이더라

공중에도 고이더라

바닥없는 곳에도 고이더라.

 

봄이 고여서

산에 들에 물이 오르더라

풀과 나무에 연초록

연초록이 번지더라

 

봄은 고여서

너럭바위도 잔뿌리를 내리더라

낮게 갠 하늘 한 걸음 더 내려와

아지랑이 훌훌 빨아들이더라

천지간이 더워지더라

 

꽃들이 문을 열어젖히더라

진짜 만개는 꽃이 문 열기 직전이더라

벌 나비 윙윙 벌떼처럼 날아들더라

이것도 영락없는 줄탁 줄탁이려니

눈을 감아도 눈이 시더라

눈이 시더라

 

 

 

 

 

아직 멀었다

 

지하철 광고에서 보았다

 

인디언들이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옵니다

그 이유는, 인디언들은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기 때문입니다

 

하늘은 얼마나 높고

넓고 깊고 맑고 멀고 푸르른가

 

땅 위에서

삶의 안팎에서

나의 기도는 얼마나 짧은가

 

어림도 없다

난 아직 멀었다

 

 

 

 

 

코알라 생각

 

종일 잠만 잔다

하루 네 시간 먹을 때만 잠에서 깬다

먹을 때에도 두 눈을 똑바로 뜨는 법이 없다

하루 스무 시간 잠만 잔다

 

먹는 것도 한 가지다

유칼립투스 나뭇잎 한 가지

다른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평생 유칼리나무 가지에 걸터앉아

먹고 자고 자고 먹고

땅을 밟거나 하늘 우러를 일 없다

 

잠자는 것이 사는 것이다

치열한 잠이 치열한 삶이다

두 눈 지그시 감고 있는 것이

부릅 두 눈 치뜨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바위가 그렇고

나무가 그렇다 어둠이 그렇고

빛과 고요와 침묵이 다 그렇다

 

움직이는 바위는 바위가 아니다

날아다니는 나무 환한 어둠은

너무나 어둠이 아니다

침묵에게는 침묵이 전부다

어둠에게는 어둠이 최고다

 

종일 잠만 자는 코알라가

하늘다람쥐 따위를 부러워할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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