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이처 소나타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영범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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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탕은 사실 육체적인 것에 있는 게 아닙니다. 육체적 방탕은 추악한 일도 아니고 진정한 방탕도 아닙니다. 진정한 방탕이란 바로 육체 관계를 갖고 있는 여자에 대해 도덕적으로 자신을 해방시켜 버리는 데 있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이러한 해방을 제가 취해야 할 당연한 행동이라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론 절 사랑했기 때문에 몸을 허락했던 여자에게 돈을 지불하지 못해 고통스러웠던 적이 한 번 있었습니다. 저는 그 여자에게 돈을 보내고 나서야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말하자면 그렇게 함으로써 그 여자와 아무런 도덕적 관련이 없다고 여긴다는 걸 보여준 후에서야 마음이 편안해진 겁니다. 26-7

 

 

* 이상한 일은, 아름다움이 곧 선이라는 완전한 착각이 자주 일어난다는 겁니다. 예쁜 여자가 바보 같은 소리를 해도 사람들은 그걸 알아듣지도 못하고 똑똑하다고 합니다. 예쁜 여자가 추악한 말과 행동을 해도 사람들은 그걸 애교가 있다고 합니다. 그녀가 바보 같은 소릴 하지도 않고 추악한 짓도 하지 않으면 그녀가 정말 똑똑하고 도덕적이며 멋지다고 확신합니다. 38-9

 

 

* “선생님은 우리 계급의 여자들이 창녀촌의 여자들과는 다른 욕구에 따라 산다고 하시지만, 저는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증명하겠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삶의 목표 그리고 삶의 내적인 내용에 따라 서로 다르다면, 이 차이가 외양에 확실히 반영될 거고 그럼 외양도 다를 겁니다. 하지만 불행하고 멸시당하는 여자들과 가장 고상한 상류사회의 귀족 처녀들을 관찰해 보세요. 옷차림이나 모자 모양도 똑같고, 향수도 똑같습니다. 팔이나 어깨, 젖가슴을 노출하는 것도 똑같고, 허리를 눈에 확 띄도록 팽팽히 조이는 것도 똑같지 않습니까? 또한 고가의 반짝이는 물건, 즉 보석에 대한 강렬한 욕망도 똑같고, 이들이 즐기는 유흥이나 춤과 음악 그리고 노래도 똑같습니다. 그 불행한 여자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유혹하는 데 열중하는 것처럼, 이 귀족 아가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차이란게 전혀 없습니다. 잘라 말하면, 단기간 이용되는 창녀들은 통상적으로 경멸을 당하지만, 장기간 이용되는 창녀들은 존경받습니다. 44

 

 

* “아이고!.....이 소나타는 무서운 작품입니다. 아니, 보편적으로 음악이란 무서운 겁니다. 그게 뭘까요? 저는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음악이란 게 뭘까요? 그게 뭘 하는 걸까요? 아니, 뭣 때문에 음악이 그런 겁니까? 사람들은 음악이 영혼을 고양하는 효과가 있다고 하지만 터무니없는 거짓말입니다. 음악은 끔찍한 영향을 미칩니다. 저 자신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음악은 영혼을 전혀 고양하지 못합니다. 음악은 영혼을 전혀 고양하지도 가라앉히지도 못하고, 흥분시키거나 자극합니다.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까요? 음악은 저 자신을 망각하게 하고, 저의 진정한 위치를 망각하게 하며, 저를 제 위치가 아닌 어떤 다른 위치로 옮깁니다. 음악의 영향을 받고 있으면 제가 느끼지 못하는 걸 느끼는 것 같고,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걸 이해하는 것 같고, 할 수 없는 걸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음악에는 하품이나 웃음과 같은 효과가 있다는 말로 이걸 설명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졸리지 않아도 하품하는 사람을 보면 따라서 하품을 하게 됩니다. 웃고 싶지 않아도 웃음소리를 들으면 따라서 웃게 됩니다.

음악은 저의 정신 상태를 작곡가가 가졌던 정신 상태로 즉시 본능적으로 옮기더군요. 저는 정신에 의해 작곡가와 하나로 결합되면서 작곡가와 함께 이 상태에서 저 상태로 옮겨 다니지만,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크로이처 소나타>를 작곡한 사람은 베토벤이 아닙니까? 그는 자신이 왜 그러한 상태에 놓여 있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상태가 의미 있었지만, 저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이처럼 음악은 오로지 자극할 뿐이지 끝나지 않는 법입니다. 호전적인 행진곡이 연주되면 군인들이 지나갈 겁니다. 음악이 감동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춤곡을 연주하면 저는 춤을 춥니다. 음악이 감동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EH한 미사곡을 연주하면 저는 성찬을 받습니다. 역시 음악이 감동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자극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극 속에는 뭘 해야만 한다는 게 없습니다. 이와 같이 음악은 아주 무섭고, 가끔 아주 커다란 영향을 끼치기도 합니다. 중국에서는 음악을 국가가 관장한다고 합니다. 그래야 되는 겁니다. 원한다면 누구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음악으로 최면을 걸어 자기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옳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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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셀프 트래블 - 2015~2016 최신판 셀프 트래블 가이드북 Self Travel Guidebook 25
한혜원.정승원 지음 / 상상출판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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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여행책을 뒤져 보았지만 현재 2015~16 최신판은 이 책밖에 없다. 마음에 썩 들지 않지만 최선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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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우리말 풀이사전
박남일 지음 / 서해문집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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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이 가득 담겨 있는 좋은 사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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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빛난다 - 허무와 무기력의 시대, 서양고전에서 삶의 의미 되찾기
휴버트 드레이퍼스 외 지음, 김동규 옮김 / 사월의책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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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이아>, <신곡>, <모비딕>을 읽었다면, 이 책의 모든 문장들이 빛날 것이다. 한 권도 읽지 못했다면 이 책에서 빛나는 문장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호메로스에게 있어 신들이 조율하는 자라면, 인간 위대성의 정수는 신들이 맞춰놓은 정조에 자신이 조율되도록 놔두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조는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정조는 솟구쳐서 잠시동안 누군가를 사로잡다가는 이내 그를 떠난다. 그리스인들은 정조의 이런 일과적인 특성을 퓌시스physis(자연, 생기, 출현)라 불렀다. 이처럼 정조가 일시적이라는 생각은 호메로스의 다신주의에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호메로스의 세계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신들이 만신전을 형성한다는 점일 것이다. 신들은 저마다 특정한 정조를 비춰주며, 그 정조를 지키려는 의식들 일체를 뒷받침해준다. 신들은 저마다 자기 영역에서 가장 탁월한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 빛나는 사례들이다. 최고 상태에 있는 인간들은 세계를 규정하는 이들 정조들 가운데 하나 또는 다른 하나에 대해 온몸을 열어 잠시 동안 휩싸이거나 붙들리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단일한 신이 아니라 신들의 만신전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다양한 삶의 방식을 통일하는 밑바탕의 원리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예컨대 아프로디테가 에로틱한 영역에서 갖는 탁월성과 가정의 수호신 헤라가 갖는 탁월성은 서로 어울릴 수가 없다. 그리스인들은 신들의 정조에 얼마만큼 열려 있는가를 통해 인간의 탁월성을 이해했고, 또한 그 정조가 일시적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시대의 실존에서는 다양한 신들이 제각기 비추고 있는 의미들을 서로 화해시킬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처럼 서로 어울릴 수 없는 신들의 다신주의적 복수성을 이해한다면 헬레네의 능력도 이해가 된다. 즉 메넬라오스와 함께 가정적인 삶을 꾸려나가다가 파리스와의 에로틱한 삶으로 거침없이 옮겨가는 능력 말이다. 헬레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이런 이해들을 화해시키거나 그것들에 순위를 매길 필요성을 못 느낀다. 그냥 각각의 상황에 휩쓸리도록 자신을 열어두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호메로스가 그녀를 “여인들 가운데 빛나는” 존재라고 한 것이다. 149-51

 

 

* 아이스킬로스에게 제우스는 더 이상 만신전을 관장하는 인격화된 신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우스가 <오레스테이아>에 나오는 복수의 여신들과 새로운 올림포스 신들처럼 어떤 문화적 추동력을 상징하는 존재인 것도 아니다. 대신에 제우스는 이런 모든 힘들을 가능케하는 근거,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행위들의 근거가 된다. 그는 모든 것에 깔려있는 배경으로서, 딱히 무엇이라고 묘사할 수는 없어도 모든 유의미한 사건들의 근저에 놓인 무엇이다. 예를 들면, 코러스는 “제우스, 그가 무엇이든” 이라고 언급하기도 하고, “제우스가 한 일이 아니라면 죽을 자들 가운데서 행한 것이므로”라고 덧붙이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제우스는 감춰진 배경으로서 그 자체로는 재현 불가능하지만, 문화의 모든 의미심장한 관례들과 실천들을 지탱해주는 토대라는 것이다. 이런 관념은 성스러움에 관한 매우 근본적이고도 강력한 생각으로서, 특히 유대-기독교적인 신 관념에서 중점적으로 나타난다. 179-80

 

 

* 신전, 대성당, 서사시, 연극, 그리고 기타 예술작품들은 그 문화에서 장려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삶만을 떠받들고 주목하게 해준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작품은, 부모가 아이들의 어릴 적 사진을 보고 그 시절을 떠올리듯이 그렇게 무엇을 재현represent하는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신전이 “아무것도 그려 보여주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오히려 예술작품은 작동work한다. 즉 예술작품은 특정한 삶의 방식을 드러내고 주목시켜주는 일들을 한데 모아 보여준다. 모름지기 빛을 발하는 예술작품은 그런 삶의 방식을 비추고 주목하게 해주며, 자신의 빛으로 모든 사물을 빛나게 한다. 예술작품은 그 세계의 진리를 구현한다. 184

 

 

* 이 과정에서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저자가 플라톤에 대한 뛰어난 비판자였음이 드러난다. 플라톤과 달리 그는 영원하고 추상적인 관념들이 아닌 나무나 탁자와 같은 물질적 사물들이야말로 가장 실재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플라톤과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장한 것과 달리, 몸을 가진 존재는 절대로 허약하거나 욕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몸은 오히려 힘을 지닌 것이고, 몸을 가진 개체는 몸이 없는 영혼보다 더 안전한다.

기독교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은 플라톤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들이 원하던 사람임을 깨닫게 된다. 이제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를 통해 기독교를 명료화하고자 애썼다. 이런 해설자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이 토마스 아퀴나스였다. 그는 <신학대전>이라는 거대한 과제를 떠맏았는데, 이 책은 실재에 관한 그리스적 이해와 기독교적 이해를 세부에 이르기까지 완전하게 화해시키려 한 작품이었다. 이런 아퀴나스 신학을 대중화한 사람이 바로 아퀴나스보다 한 세기 뒤에 살았던 단테 알리기에리였다. 216

 

 

* 음유시인들 덕분에 단테는 자기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경험이 한 여인에 대한 t k랑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단테는 제1운동자의 궤도 속으로 이끌려 들어간다. 하지만 신의 관조를 통해 얻은 축복은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그의 모든 개인적 의지, 즉 베에트리체에 대한 사랑이나 정치에 헌신하고자 하는 의지를 없애버린다. 확실히 단테는 축복받았다고 할 수도 있다. 축복이 우리들 개인을 지우면 지울수록 우리는 더욱 강렬한 기쁨에 젖게 되니 말이다. 그러나 이토록 행복한 축복과 견주어볼 때 우리가 지상에서 얻는 모든 기쁨은 하찮은 것이 된다. 단테는 이것을 “온갖 달콤함을 능가하는 기쁨”이라고 표현한다. 단테는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모든 피조물을 만든 창조주이 사랑 속에 흡수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로 실존의 충만함에 이르는 길일까? 그것은 실존의 충만함에 이르는 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의미 있는 삶을 회피하는 길처럼 보인다. 사살상 이것은 중세적 형태의 허무주의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신의 사랑 앞에서는 베아트리체의 사랑도, 단테의 정치적 열정도 모두 사소한 것이 되고, 이런 삶 속에서 의미 있는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기 때문이다. 237

 

 

* 에이해브는 로마 기독교 세계를 몰락시키는 악마적 사악함과 자신을 나란히 세움으로써 악마의 육화를 완성한다. 그러나 멜빌은 이 구절을 완성할 의향이 없는 듯하다. 실제로 그는 호손에게 그것을 스스로 완성하라고 말한다. 추측건대 이것은 책을 읽는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할 것이다. 표면적 진리들에 대해 스스로를 닫는 내면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종교라면 무엇이건 멜빌은 “(그 종교의)~이름으로 당신에게 세례를 베풀지 않겠다”고 말하는 듯하다. 나는 모든 다신적 진리들을 당신 스스로 발견하도록 놓아둔다. 그런 진리들 속에서 살아가고, 그 속에서 모든 즐거움과 슬픔을 맛보도록 하자. 325-6

 

 

* 다 자란 성인이 나무 막대기를 들고 딱딱한 공을 맞추려고 하는 모습이나, 덩치 큰 젊은이들이 선 너머로 타원형 구체를 던지거나 들고 뛰는 광경을 보고 비웃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스포츠가 성스러운 의미를 지닌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스포츠에는 어떤 순간들이 존재한다. 경기하는 순간이나 그것을 목격하는 순간들 말이다. 그 순간이 오면 뭔가 압도적인 것이 우리 앞에 일어나 손으로 만질 수 잇을 것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며, 거센 파도처럼 우리를 덮어버린다. 이런 순간이 오면 사건과의 물리적 거리도 문제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성스러움으로 빛나는 순간이다. 335

 

 

* 무슨 이런 하품 나는 고민을 야구 경기장에서 한다는 말인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칸트의 경고 속에는 어떤 의미심장한 뜻이 있다. 결국 야구장에서 관중과 하나가 되어 일어서는 것과, 히틀러의 집회에서 군중들이 하나가 되어 일어서는 것 사이에는 포착하기가 매우 힘든 거리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루 게릭의 고별사를 위대한 스포츠 연설이 아니라 하나의 수사학적 웅변으로 본다면, 그 거리는 더욱 좁혀질 것이다. 현상의 반짝임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만일 우리가 루 게릭의 고별사와 히틀러의 선동 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지적할 수 없다면, 아마도 칸트가 말한 성숙함이야말로 지루하기는 해도 우리가 따라야 하는 가장 현명한 지침이 될 것이다. 350

 

 

* 서양의 숨겨진 역사는 우리에게 한 가지 형태의 성스러움만이 아니라 상이하고도 양립 불가능한 성스러움의 형태들을 여럿 남겨 놓았다. 퓌시스는 우리를 파도처럼 고양시키는 거칠고 열광적인 성스러움을 보여주었고, 포이에시스(창작)는 사물들을 가장 훌륭하고 성스러운 상태로 만드는 온화한 양육적 스타일을 보여주며, 테크놀로지는 모든 성스러운 것들을 비웃는 삶의 자동적이고 자족적인 형태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오늘날의 역사 단계에서는 특별한 메타 포이에시스 기술이 필요하다. 이 기술은 우리에게 있는 성스러움의 양태들 각각을 공평하게 대우하는 기술이다. 373-4

 

 

* 에필로그 -빛나는 모든 것들

 

늙고 지혜로운 스승에게 오랫동안 가르침을 받아온 두 제자가 있었다. 어느날 스승이 말했다. “제자들아, 너희들은 이제 세상에 나갈 때가 되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빛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면, 너희들의 인생은 복될 것이다.”

제자들은 아쉬움과 흥분이 뒤섞인 채 스승을 떠나 각자의 길로 갔다. 여러 해가 지난 후 그들은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서로를 다시 만난 것에 행복해했고, 상대방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들으려는 기대감으로 들떴다.

첫 번째 제자가 두 번째 제자에게 시무룩하게 말했다.

“나는 세상에 있는 많은 빛나는 것들을 보는 법을 배웠지. 하지만 여전히 불행하네. 슬프고 실망스러운 것들 역시 많이 보았기에 스승님의 충고를 따를 수 없다고 느낀다네. 아마 나는결코 행복과 즐거움으로 충만해질 수가 없을 것 같으이. 솔직히 말해서 모든 것들이 빛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없었으니까 말이야.”

두 번째 제자는 행복감에 반짝이며 첫 번째 제자에게 말했다.

“모든 것들이 빛나는 건 아니라네. 다만 빛나는 모든 것들이 존재하는 것이지.” 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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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전과 영원 - 푸코.라캉.르장드르
사사키 아타루 지음, 안천 옮김 / 자음과모음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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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와 라캉을 이토록 재밌고 이해하기 쉽게 쓴 책이라니. 도서관에서 빌려온, 반납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10권이 넘는 책을 모두 제쳐두고 며칠 동안 이 책만 읽었다. 봄이 와서 꽃은 피고, 햇살은 반짝이는데 800페이지가 넘는 책이기에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초조하게 책장만 넘겼다. 처음부터 끝까지 재밌다. 소설을 읽는 마음이었다.

 

 

* 따라서 팔루스 때문에 “기관으로 국소화 되지 않은 순전한 성관계”는 사라진다. 비참하기까지 한 하나의 기관만을, 하나의 시니피앙만을 두고 성관계는 직조되어간다. 그래서 라캉은 팔루스의 차원에서 성관계는 없다고 한 것이고, 우리는 팔루스야말로 향락을 “통제하는” “조정기(레귤레이터)”라고 말한 것이다. 향락이 어마어마한 절대적 향락이 되지 않도록 규제, 조정, 변압, 변환, 치수하는 것이라고.

팔루스의 향락은 길들여져 있고 합법적이다. 그리고 그것ㅇ로 족하다. 아무렴. 그래야 한다. 라캉은 팔루스의 향락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규제 때문에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빼앗기고 어디인가 죽은 것으로서 성을 영위하고 그 온건한 향락을 흔쾌히 살아갈 것이기에. 하루하루의 성적인 다정함, 그 격렬하지만 평온한 기쁨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묘한 슬픔 따위 신경 쓸 필요는 없다. 162

 

 

* 잉여향락도 평온한 하루하루의 “가벼운 양념”에 불과하다. 그것은 아무것도 뒤흔들지 않고,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으로 족하다. 대상 a와 잉여 향락이 향락을 흡수하고 조정하고 있는 한, 세계는 “대체로” 평화롭다. 그것이 아무리 분쟁, 비리, 착취가 널려있는 세계라 하더라도. 라캉 이론에 정통한 사회학자들은 말한다. 자본주의는 “성관계는 없다”라는 “불가능”한 구멍을 중심으로 하염없이 충동을 회전시키고 있다고. 그렇다. 그들의 발언은 이 세계의 향락을 긍정하는 것이 된다. 권력을 추구하는 것도 좋다. 돈을 추구하는 것도 좋다........게다가 그것은 자본주의를, 사회를 뒤흔들 일이 없는 안전한 향락이니까. 팔루스와 대상 a는 향락의 레귤레이터다. 179-80

 

 

* 그러나 라랑그(상징계에 속하지 않는 말), 신을 연모하는 여성의 말은 특정한 내용을 갖는다. 기도의 외침, 연모의 한숨, 상흔의 얼룩, 시구를 고르는 한순간의 망설임이다. 연애편지로서의 언어, 사랑의 문자로서의 언어, 이렇게 말하자. 언어란 언어가 아니다. 언어는 형식화되지 않는다. 동일성을 지니지 않는다. 그것을 열기를 띄고, 향기가 나고, 땀이 나고, 묵직하고, 불투명한 둔탁함을 지닌 그 무엇이다. 그것은 때때로 긁히고, 고이고, 탁해진다. 그리고 산뜻하게 뛰쳐나간다. 205

 

 

* 글쓰기. 르장드르가 말하듯 “사회란 텍스트다.” 그렇다면 글쓰기란 사회를 직조하고 다시 짜내는 것, 그리고 그 궁극점에 있어 “낳는 것”에 다름 아니다. 신의 여자가 되어 낳는 것. 그것이 이 “연애편지”였다. 따라서 그녀들은 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것이 진정한 개념이 될 땎K지. 진정한 신의 아이를 낳게 될 때까지 그것을 멈출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미 라캉이 “쓰이지 않기를 그만두지 않는 것”이라고 정의한 저 “불가능성”은 무너졌다. 연애편지를 써가는 하루하루의 영위를 통해 의미를, 개념을, 사회가 만들어내려는 것, 텍스트를 고쳐-쓰는 것, 텍스트를 분만하는 것. 이것이 신비주의자의 시도이고, “전부가 아닌” 여성의 향락인 것이다. 211

 

 

* <앙코르>에서 1년 후 10쪽 정도 되는 만년의 인터뷰에서 라캉은 종교와 정신분석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진정한 종교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입니다.- 216-7

 

 

* 서양은 자기가 지닌 “표현의” “문학적” 자유라는 픽션, 말 그대로 “도그마”를 아무 전제없이 “보편적”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역사적 추세에 의해 “보편적”이 되었는지는 전혀 자각하지 못한다. 그러하기에 “기본적 인권”인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픽션이 픽션이라는 것조차 모르는 이슬람들은 “야만”이고 “말이 안 통한다”는 경멸적인 언사가 미디어에 넘친다. 392

* 벤슬라마는 유럽의 “표현의 자유” 원리주의를 공격하는 한편, 이슬람의 “표현의 검열” 원리주의를 공격한다. 395

 

 

* 어떤 사람이 무엇인가를 쓴다. 이 막막하고 어떤 결론에 이를지 전혀 모르는 작업, 저 새벽의 작업, 신앙과 무신앙 사이에 있는 저 잿빛 공간의 작업을 그녀는 어찌어찌 마무리하게 된다. 믿고 있는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믿지 않은 것도 아닌, 이 자기가 쓴 것이 그 순간 “돌연” 자기가 믿고 있는 것이 된다. 이를 읽은 타인 또한 당연히 그녀가 그것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리라. 그도 그럴 것이 “여기에 써 있으”니까. 그리고 불현듯, 돌연 그녀는 깨닫게 된다. 어느새 자신도 믿고 있다는 것을. 자기도, 자기가 쓴 것을 의심의 여지가 없는 신념으로 받아들이고 말았음을.

이렇게 표현해보자. 텍스트를 쓴다는 것은 텍스트인 자신의 신체에 그것을 문신으로 새긴다는 것이다. 정처 없는, 의지할 곳도 없고 끝도 없는 작업의 산물은 “돌연” 주체를 “결정”하고 작품으로 “결정”된다. 텍스트를 낳기란 “돌연” 새겨지고 결정된다는 것이고, 만들어진 것-픽션이란 이 “돌연” 제 3항을 낳는 작업과 그 산물이다. 417-8

 

 

* 이는 “학교의 학급 나누기, 자리 바꾸기, 성적 등수”를 뜻한다. “교실, 복도, 운동장에서의 학생의 정렬, 숙제나 시험을 통해 모든 학생에게 부과되는 서열, 매주 매월 매년 학생 각자가 갖게 되는 서열, 연령순에 따른 학급의 배치, 난이도에 따른 교재와 과제의 순서”이다. “이런 모든 강제적 배열 속에서 학생 각자가 차지하는 서열은 그 나이, 성적, 품행에 따라서 그때그때 변화한다. 학생은 이러한 일련의 세분화된 바둑판 모양의 항목들 위를 끊임없이 이동한다.” 즉 “일렬로 배치된 간격들로 명료하게 구분되는 공간 속에서, 학생 개개인은 서로 끊임없이 순서가 뒤바뀌는 운동”이다. 499

 

 

* 언뜻 비소한 그러나 구체적이고 한순간 한순간의 힘겨루기와 다툼이 문제가 된다. 교사의 눈을 훔쳐 도망치는 학생이고, 자리에 눕히려는 간호사의 손을 뿌리치고자 애쓰는 치매 노인의 뜻밖의 완력, 차가운 물을 계속 뿌려대도 정신과 의사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광인......푸코는 깨닫게 된다. 그들의 투쟁하는 외침, 투쟁의 울림을 자기가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그들의 말과 글이 법 문서로, 규율 권력의 문서화 절차 때문이었다. 그것을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는 특권을 지닌 자신의 입장은 그들과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규율 권력과의 미세한 힘겨루기가 없었다면 그들의 존재와 그 외침은 역사의 암흑 속에 사라지고 말지 않았을까? 기묘한 역설이다. 562

 

 

* 푸코는 단언한다. 나치스보다 규율적이고 생명권력적이었던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규율권력, 생명 권력, 이들이 나치 사회 전체를 빈틈없이 뒤덮어, 있는 힘껏 지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푸코는 계속해서 말한다. 나치 사회는 전면적으로 (복지를) 보정했고, “전면적으로 세큐리티를 확보했고, 전면적으로 조정과 규율을 실행함과 동시에 이 사회에 의해 가장 완벽한 살인 권력이 활보하게 됩니다. 즉, 이 낡은, 죽이는 주권 권력이. 이 죽이는 권력은 나치 사회의 전 사회 신체를 관통합니다.” 599

 

 

* 즉, 18세기 이후 성은 끊임없이 “전면적으로 담론상의 비정상적인 흥분”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괜찮다. 성은 소중하고, 만인이 성적 욕망을 갖고 있고, 이는 과학적으로도 정신분석적으로도 보장되어 있으니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너는 어떨 때, 어떤 식으로, 어떤 자극으로, 어떤 것에 성적 쾌락을 느끼느냐? 무슨 말이든 자유롭게 하렴.’ 이리하여 보증을 받아 안도한, 흥분으로 숨을 헐떡거리는 담론이 번성해간다. 권력에 거슬러, 도덕에 거슬러, 성에 대해 득이양양하게 말하는 자도 많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런 쪽이 많았으리라. 그러나 이미 보아온 것처럼 “그것은 바로 권력이 행사되는 장소에서, 그 행사 수단으로서” 발화되었던 것이다. 성을 말하는 것은, 성은 더는 침범 행위가 아니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성에 대해 세세한 부분까지 조사하고, 심문하고, 관찰하고, 문장으로 쓰고, 자기 검증하고, 청취하고, 기록해 “경제, 교육, 의학, 재판의 각 차원에서 성 담론을 부추겨 추출하고 조종하는” “하릴없이 거대한 말의 산”이 쌓여간 것이다. 아마 지금도. 그러나 그래도 “묘한 우려에 잠겨 스스로에게 말한다. 우리는 성에 대해 충분히 말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너무도 겁이 많고 소심하다”고. 615

 

 

* 이제 권력은 입 다물라 명령하지 않는다. 권력은 침묵을 강제하지 않는다. 권력은 말하라고 명령하고, 말하도록 유도하고, 자세히 말하도록 부추긴다. 고백하라는 유혹이 있기 때문에 자기 안에 “비밀”이 출현한다. 우리의 이로를 염두에 두었을 때 흥미로운 푸코의 말을 하나만 인용하자. “고백이란 말하는 주체와 말해진 문장의 주체가 합치하는 담론의 의식이다. 그것은 또한 권력관계 안에서 전개되는 의식이다.” 619

 

 

* 권력이 있는 곳에, 권력 그 한복판에 저항은 존재한다. 따라서 저항은 권력 바깥에 없다. 권력이 작용하는 곳곳에서, 그 순간마다 저항은 있다. 622

 

 

*이리하여 자유주의는 몇 가지 전략을 취하게 된다. 푸코가 인용하는 것은 자유주의의 격언 “위험 속에서 살라”다. 이러한 “위기의 자극”은 자유주의의 주된 함의“다. 그렇다. 위험을 감수하고 투자해야 한다. 위험을 감수하고 창업해야 한다. 위험을 감수하고 시장으로 나가야 한다. 그러나 자유주의의 위기 전략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푸코는 말한다. ”묵시록의 기사가 사라진 대신, 하루하루의 위험이 출현하고, 등장하고, 침입합니다. 이 일상적인 위험은 항구적으로 활기를 얻어 다시 현실화되고 유통됩니다.“ 즉, 규율 권력을 논했던 <감시와 처벌>의 논지를 여기에서 다시 다룬다. 추리소설, 경찰소설, 언론의 사회면 기사, 변태 범죄자에 대한 기나긴 논설. 그야말로 ”개인, 가족, 인종, 인류의 위험“을 언론 매체가 선동하게 되는 것이다. ‘요즘 이상한 사람이 많으니까 감시 카메라도 어쩔 수 없어요. 실제로 묘한 차림을 한 녀석들이 저 도로변에서 사라졌잖아요. 그러고 보니 댁에도 어린 따님이 있지요?’ 위기의 선동. 이에 더해 암흑가로의 유혹이 섞인 위험의 선동. 무엇을 위해서? 자유 안에 가두어두기 위해서, 세큐리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익을 낳기 위해서. 그렇다. ”자유주의가 없다면 위기의 문화도 없었던 것입니다.“ 669

 

 

*즉, 간략히 말해 신자유주의 사회란 "기업의“, 더 정확히 말해 ”창업“의, ”창업가의 사회다. 가정도 “공동체”도 기업 주변에 조직된다........................그리고 이 신자유주의가 바로 푸코가 마지막으로 “생명 정치”와 연결한 대상이었다. 그렇다. 생물학적 신체는 여기에서 어떻게 되는가? 간단하다. 푸코는 흥미롭게도 “자격”을 갖추고, ”자격“을 항상 필요로 하는 노동자의 신체를 ”기계“라고 지칭하고, 자격을 요구하는 사회가 되어간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단적으로 노동자와 기업인의 신체는 ”인적 자본“이 되는 것이고 생물학은 ”경제학적 분석“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679

 

 

* 자기에게 전념하고, 자기를 검증하고, 자기를 점검하는 것. 자기와 싸우고, 절제하고, 단련하고, 영혼을 갈고 닦고, 평정을 손에 넣는 것. 즉, 자신을 완전히 통치하고 통제하는 것. 나는 전적으로 윤리적, 도덕적, 돌발적 격정이나 욕망에도 굴하지 않는다. 빈곤과 공포와 욕망도 이겨낸 나는 이들을 극복한 인간이다. 자신의 완전한 지배, 정치적 육체적으로 비할 바 없이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고, 흔들리지 않고, 이는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는 자신의 소유다. 726

 

 

* 자기에의 배려에서 쾌락이란 끝없는 단련과 금욕과 수련과 배려와 교류 끝에, 그 과정 속에서 손에 넣을 수 있는 “자기로서 존재하는 것” 자체의 쾌락이고 기쁨인 것이다. 미로서의 자기, 예술가로서의 삶. 그리고 푸코는 이렇게 말하게 된다. -삶이 미적 예술 작품의 재로라는 관념에 나는 매료됩니다.- 727

 

 

* 자기애의 배려, 생존의 미학은 그 어떤 결론도 될 수 없다. 그것은 푸코가 세속화라는 전략무기를 간발의 차로 꿰뚫어보지 못한 증좌일 뿐이다. 737

 

 

* “동격” “소요” “돌연변이” 속에서 “사유는 보는 것과 말하는 것 사이의 간격, 분리 속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그것은 다이어그램의 새로운 창출이고, 이는 주사위 던지기, 비장의 카드를 꺼내는 도박자의 “승부”다. 경쟁도, 이익도 아닌 순전한 분만의, 개념의 싸움이다. <바깥>의 바람에 노출된, 도박꾼들의 영원한 싸움. 그 정밀한 소요. 그렇다. 블랑쇼는 이 바깥바람이 불어오는 고안의 때를 “밤”이라 불렀던 것이다. 이렇게 말했었다. “밤 속에서, 짐승이 다른 짐승의 소리를 듣는 것과 같은 순간이 항시 있는 법이다. 그것이 또 하나의 밤이다.” 글 쓰는-자의 싸움. 그 밤의, <바깥>의 폭풍. 영원한 야전. 확인하자. <바깥>은 내부의 외부이므로 바깥이 아니다. 그런 실체화된 외부 따위는 전혀 문제가 아니다. 내부에서 내부를 만들어내는 자의 삶이야말로 <바깥>인 것이다. 주체는 창조 행위라는 도박을 할 때 <바깥>에서 가해지는 습격의 벽이 되고, 찢겨진 곳이 된다. “찢겨짐은 이제 천이 겪는 우발적 사고가 아니라 바깥쪽 천이 뒤틀리고, 감입하고, 이중화활 때의 새로운 규칙이 된다. ‘마음대로’의 규칙 또는 우연한 방출, 주사위 던지기다. ”안이란 바깥의 작용이고, 그것은 하나의 주체화다.“그리고 우리는 작가가 된다. 우리는 무한한 고안의, 안트로포스적 허공의, 역사의 절대적인 끝없음 속에서 ”<바깥>으로의 감입”으로서 계속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작가다. “‘더는 작가가 없다’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오만하기 그지없습니다.”

이 <바깥>. 이 영원한 야전. 끝없는 고안의 춤. 라캉은 이를 여성의 향락이라 부르리라. 771-2

* 그렇다. 오늘은 다른 어떤 날과도 다를 바 없는 하루이고, 그 어떤 날들도 오늘과 다를 바 없는 하루, 다른 날들과 하나도 닮은 데가 없는 이 하루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끝이 없다. 우리가 태어나 죽는 찰나의 영겁, 짧은 영원 속에서 몇 번이나 밤은 도래할 것이다. <바깥>의 시간이. <바깥> 바람을 쐬고, 그 삐걱거림을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울리는 작은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는 한없는 그 <바깥>의 주름, <바깥>의 효과가 된다. 거기에서 우리는 무한히 고안을 계속할 것이다. 안트로포스의 고안하는 힘에 한계는 없다. 가자. 우리는 가자. 우리는 글 쓰고 노래하고 춤추고 사유하자. <거울>을 만들어내기 위해. 제3자를 만들어내기 위해. 근거율을 만들어내기 위해. 공격하기 위해. 손에 쥐기 위해. 지키기 위해. 굶주림에 저항하고 추위에 저항하고 죽음에 저항에 살아남기 위해. 모든 죽음과 위험의 선동을 웃어넘기기 위해. 전진하기 위해. 옆으로 한 발 나가기 위해. 소격을 유지하기 위해. 자유를 직조하기 위해. 투쟁하기 위해. 도박하기 위해. 이기기 위해. 지기 위해. 승리하고 패배하는 기쁨을 위해. 773-4

 

 

* 대왕과 서슴없이 대치하는 이 개의 삶을 푸코는 “주권적인 삶”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견유학파는 거의 알몸이고, 방사에 이르기까지 사람들 앞에서 할 정도로, 그 무엇도 가리지 않는 “가시성” 속에 있었다. 공중의 눈 앞에서 태워지기를 바라기조차 했던 페레그리누스를 형용하는 푸코 자신의 말에 따르면 “견유학파적 삶의 절대적 가시성” 속에 있었다. 개는 다 보여준다. 자신의 삶을, 치부를, 성을, 자신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이 개는 “감시”도 한다. 분명히 푸코는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견유학파는 자신의 전부를 사람들의 시선에 드러내 보이는 대신, 타인의 전부를 감시하는 자이고자 한다.“........개는 감시를 당하고만 있지는 않는다. 개는 감시한다.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는, 가난하고 알몸인, 반항하는 주권자인 개의 감시다. 여기에서는 푸코가 오랫동안 양립할 수 없다고 우겨왔던 주권 권력과 규율 권력이, 나중에 자신도 인정한 것으로 양립할 수 있는 것으로, 그러나 새로운 다른 모습으로 결정했다. 801-2

 

 

* 여기에는 무엇인가 다른 것이 있다. 여기에 있는 것은 “다른 삶”으로 변하기를 희구하는, 기묘하리만큼 집요한 지속이다. 투쟁의 지속이다. 보편적인 것, 불변한 것에 저항하려는 자들의 지속이다. 혁명, 예술, 영성을 관통하며 조용히 명동하기를 멈추지 않는 “투쟁의 울림소리”. 이 집요한 개들. 먼 옛날부터 최근까지 끊기는 일 없이 지속되어온 그 표현한 모습, 짖어대는 소리.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기에 주구가 아닌 개들. 신출귀몰한 개들. 이는 초역사적인 것에 대한 저항의 초역사성이다. 불멸, 영구한 것은 존재하지 않고 그것은 항상 전복 가능하다는 사실 자체의 “영원”이다. 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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