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전과 영원 - 푸코.라캉.르장드르
사사키 아타루 지음, 안천 옮김 / 자음과모음 / 201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푸코와 라캉을 이토록 재밌고 이해하기 쉽게 쓴 책이라니. 도서관에서 빌려온, 반납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10권이 넘는 책을 모두 제쳐두고 며칠 동안 이 책만 읽었다. 봄이 와서 꽃은 피고, 햇살은 반짝이는데 800페이지가 넘는 책이기에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초조하게 책장만 넘겼다. 처음부터 끝까지 재밌다. 소설을 읽는 마음이었다.

 

 

* 따라서 팔루스 때문에 “기관으로 국소화 되지 않은 순전한 성관계”는 사라진다. 비참하기까지 한 하나의 기관만을, 하나의 시니피앙만을 두고 성관계는 직조되어간다. 그래서 라캉은 팔루스의 차원에서 성관계는 없다고 한 것이고, 우리는 팔루스야말로 향락을 “통제하는” “조정기(레귤레이터)”라고 말한 것이다. 향락이 어마어마한 절대적 향락이 되지 않도록 규제, 조정, 변압, 변환, 치수하는 것이라고.

팔루스의 향락은 길들여져 있고 합법적이다. 그리고 그것ㅇ로 족하다. 아무렴. 그래야 한다. 라캉은 팔루스의 향락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규제 때문에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빼앗기고 어디인가 죽은 것으로서 성을 영위하고 그 온건한 향락을 흔쾌히 살아갈 것이기에. 하루하루의 성적인 다정함, 그 격렬하지만 평온한 기쁨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묘한 슬픔 따위 신경 쓸 필요는 없다. 162

 

 

* 잉여향락도 평온한 하루하루의 “가벼운 양념”에 불과하다. 그것은 아무것도 뒤흔들지 않고,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으로 족하다. 대상 a와 잉여 향락이 향락을 흡수하고 조정하고 있는 한, 세계는 “대체로” 평화롭다. 그것이 아무리 분쟁, 비리, 착취가 널려있는 세계라 하더라도. 라캉 이론에 정통한 사회학자들은 말한다. 자본주의는 “성관계는 없다”라는 “불가능”한 구멍을 중심으로 하염없이 충동을 회전시키고 있다고. 그렇다. 그들의 발언은 이 세계의 향락을 긍정하는 것이 된다. 권력을 추구하는 것도 좋다. 돈을 추구하는 것도 좋다........게다가 그것은 자본주의를, 사회를 뒤흔들 일이 없는 안전한 향락이니까. 팔루스와 대상 a는 향락의 레귤레이터다. 179-80

 

 

* 그러나 라랑그(상징계에 속하지 않는 말), 신을 연모하는 여성의 말은 특정한 내용을 갖는다. 기도의 외침, 연모의 한숨, 상흔의 얼룩, 시구를 고르는 한순간의 망설임이다. 연애편지로서의 언어, 사랑의 문자로서의 언어, 이렇게 말하자. 언어란 언어가 아니다. 언어는 형식화되지 않는다. 동일성을 지니지 않는다. 그것을 열기를 띄고, 향기가 나고, 땀이 나고, 묵직하고, 불투명한 둔탁함을 지닌 그 무엇이다. 그것은 때때로 긁히고, 고이고, 탁해진다. 그리고 산뜻하게 뛰쳐나간다. 205

 

 

* 글쓰기. 르장드르가 말하듯 “사회란 텍스트다.” 그렇다면 글쓰기란 사회를 직조하고 다시 짜내는 것, 그리고 그 궁극점에 있어 “낳는 것”에 다름 아니다. 신의 여자가 되어 낳는 것. 그것이 이 “연애편지”였다. 따라서 그녀들은 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것이 진정한 개념이 될 땎K지. 진정한 신의 아이를 낳게 될 때까지 그것을 멈출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미 라캉이 “쓰이지 않기를 그만두지 않는 것”이라고 정의한 저 “불가능성”은 무너졌다. 연애편지를 써가는 하루하루의 영위를 통해 의미를, 개념을, 사회가 만들어내려는 것, 텍스트를 고쳐-쓰는 것, 텍스트를 분만하는 것. 이것이 신비주의자의 시도이고, “전부가 아닌” 여성의 향락인 것이다. 211

 

 

* <앙코르>에서 1년 후 10쪽 정도 되는 만년의 인터뷰에서 라캉은 종교와 정신분석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진정한 종교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입니다.- 216-7

 

 

* 서양은 자기가 지닌 “표현의” “문학적” 자유라는 픽션, 말 그대로 “도그마”를 아무 전제없이 “보편적”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역사적 추세에 의해 “보편적”이 되었는지는 전혀 자각하지 못한다. 그러하기에 “기본적 인권”인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픽션이 픽션이라는 것조차 모르는 이슬람들은 “야만”이고 “말이 안 통한다”는 경멸적인 언사가 미디어에 넘친다. 392

* 벤슬라마는 유럽의 “표현의 자유” 원리주의를 공격하는 한편, 이슬람의 “표현의 검열” 원리주의를 공격한다. 395

 

 

* 어떤 사람이 무엇인가를 쓴다. 이 막막하고 어떤 결론에 이를지 전혀 모르는 작업, 저 새벽의 작업, 신앙과 무신앙 사이에 있는 저 잿빛 공간의 작업을 그녀는 어찌어찌 마무리하게 된다. 믿고 있는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믿지 않은 것도 아닌, 이 자기가 쓴 것이 그 순간 “돌연” 자기가 믿고 있는 것이 된다. 이를 읽은 타인 또한 당연히 그녀가 그것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리라. 그도 그럴 것이 “여기에 써 있으”니까. 그리고 불현듯, 돌연 그녀는 깨닫게 된다. 어느새 자신도 믿고 있다는 것을. 자기도, 자기가 쓴 것을 의심의 여지가 없는 신념으로 받아들이고 말았음을.

이렇게 표현해보자. 텍스트를 쓴다는 것은 텍스트인 자신의 신체에 그것을 문신으로 새긴다는 것이다. 정처 없는, 의지할 곳도 없고 끝도 없는 작업의 산물은 “돌연” 주체를 “결정”하고 작품으로 “결정”된다. 텍스트를 낳기란 “돌연” 새겨지고 결정된다는 것이고, 만들어진 것-픽션이란 이 “돌연” 제 3항을 낳는 작업과 그 산물이다. 417-8

 

 

* 이는 “학교의 학급 나누기, 자리 바꾸기, 성적 등수”를 뜻한다. “교실, 복도, 운동장에서의 학생의 정렬, 숙제나 시험을 통해 모든 학생에게 부과되는 서열, 매주 매월 매년 학생 각자가 갖게 되는 서열, 연령순에 따른 학급의 배치, 난이도에 따른 교재와 과제의 순서”이다. “이런 모든 강제적 배열 속에서 학생 각자가 차지하는 서열은 그 나이, 성적, 품행에 따라서 그때그때 변화한다. 학생은 이러한 일련의 세분화된 바둑판 모양의 항목들 위를 끊임없이 이동한다.” 즉 “일렬로 배치된 간격들로 명료하게 구분되는 공간 속에서, 학생 개개인은 서로 끊임없이 순서가 뒤바뀌는 운동”이다. 499

 

 

* 언뜻 비소한 그러나 구체적이고 한순간 한순간의 힘겨루기와 다툼이 문제가 된다. 교사의 눈을 훔쳐 도망치는 학생이고, 자리에 눕히려는 간호사의 손을 뿌리치고자 애쓰는 치매 노인의 뜻밖의 완력, 차가운 물을 계속 뿌려대도 정신과 의사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광인......푸코는 깨닫게 된다. 그들의 투쟁하는 외침, 투쟁의 울림을 자기가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그들의 말과 글이 법 문서로, 규율 권력의 문서화 절차 때문이었다. 그것을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는 특권을 지닌 자신의 입장은 그들과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규율 권력과의 미세한 힘겨루기가 없었다면 그들의 존재와 그 외침은 역사의 암흑 속에 사라지고 말지 않았을까? 기묘한 역설이다. 562

 

 

* 푸코는 단언한다. 나치스보다 규율적이고 생명권력적이었던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규율권력, 생명 권력, 이들이 나치 사회 전체를 빈틈없이 뒤덮어, 있는 힘껏 지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푸코는 계속해서 말한다. 나치 사회는 전면적으로 (복지를) 보정했고, “전면적으로 세큐리티를 확보했고, 전면적으로 조정과 규율을 실행함과 동시에 이 사회에 의해 가장 완벽한 살인 권력이 활보하게 됩니다. 즉, 이 낡은, 죽이는 주권 권력이. 이 죽이는 권력은 나치 사회의 전 사회 신체를 관통합니다.” 599

 

 

* 즉, 18세기 이후 성은 끊임없이 “전면적으로 담론상의 비정상적인 흥분”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괜찮다. 성은 소중하고, 만인이 성적 욕망을 갖고 있고, 이는 과학적으로도 정신분석적으로도 보장되어 있으니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너는 어떨 때, 어떤 식으로, 어떤 자극으로, 어떤 것에 성적 쾌락을 느끼느냐? 무슨 말이든 자유롭게 하렴.’ 이리하여 보증을 받아 안도한, 흥분으로 숨을 헐떡거리는 담론이 번성해간다. 권력에 거슬러, 도덕에 거슬러, 성에 대해 득이양양하게 말하는 자도 많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런 쪽이 많았으리라. 그러나 이미 보아온 것처럼 “그것은 바로 권력이 행사되는 장소에서, 그 행사 수단으로서” 발화되었던 것이다. 성을 말하는 것은, 성은 더는 침범 행위가 아니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성에 대해 세세한 부분까지 조사하고, 심문하고, 관찰하고, 문장으로 쓰고, 자기 검증하고, 청취하고, 기록해 “경제, 교육, 의학, 재판의 각 차원에서 성 담론을 부추겨 추출하고 조종하는” “하릴없이 거대한 말의 산”이 쌓여간 것이다. 아마 지금도. 그러나 그래도 “묘한 우려에 잠겨 스스로에게 말한다. 우리는 성에 대해 충분히 말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너무도 겁이 많고 소심하다”고. 615

 

 

* 이제 권력은 입 다물라 명령하지 않는다. 권력은 침묵을 강제하지 않는다. 권력은 말하라고 명령하고, 말하도록 유도하고, 자세히 말하도록 부추긴다. 고백하라는 유혹이 있기 때문에 자기 안에 “비밀”이 출현한다. 우리의 이로를 염두에 두었을 때 흥미로운 푸코의 말을 하나만 인용하자. “고백이란 말하는 주체와 말해진 문장의 주체가 합치하는 담론의 의식이다. 그것은 또한 권력관계 안에서 전개되는 의식이다.” 619

 

 

* 권력이 있는 곳에, 권력 그 한복판에 저항은 존재한다. 따라서 저항은 권력 바깥에 없다. 권력이 작용하는 곳곳에서, 그 순간마다 저항은 있다. 622

 

 

*이리하여 자유주의는 몇 가지 전략을 취하게 된다. 푸코가 인용하는 것은 자유주의의 격언 “위험 속에서 살라”다. 이러한 “위기의 자극”은 자유주의의 주된 함의“다. 그렇다. 위험을 감수하고 투자해야 한다. 위험을 감수하고 창업해야 한다. 위험을 감수하고 시장으로 나가야 한다. 그러나 자유주의의 위기 전략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푸코는 말한다. ”묵시록의 기사가 사라진 대신, 하루하루의 위험이 출현하고, 등장하고, 침입합니다. 이 일상적인 위험은 항구적으로 활기를 얻어 다시 현실화되고 유통됩니다.“ 즉, 규율 권력을 논했던 <감시와 처벌>의 논지를 여기에서 다시 다룬다. 추리소설, 경찰소설, 언론의 사회면 기사, 변태 범죄자에 대한 기나긴 논설. 그야말로 ”개인, 가족, 인종, 인류의 위험“을 언론 매체가 선동하게 되는 것이다. ‘요즘 이상한 사람이 많으니까 감시 카메라도 어쩔 수 없어요. 실제로 묘한 차림을 한 녀석들이 저 도로변에서 사라졌잖아요. 그러고 보니 댁에도 어린 따님이 있지요?’ 위기의 선동. 이에 더해 암흑가로의 유혹이 섞인 위험의 선동. 무엇을 위해서? 자유 안에 가두어두기 위해서, 세큐리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익을 낳기 위해서. 그렇다. ”자유주의가 없다면 위기의 문화도 없었던 것입니다.“ 669

 

 

*즉, 간략히 말해 신자유주의 사회란 "기업의“, 더 정확히 말해 ”창업“의, ”창업가의 사회다. 가정도 “공동체”도 기업 주변에 조직된다........................그리고 이 신자유주의가 바로 푸코가 마지막으로 “생명 정치”와 연결한 대상이었다. 그렇다. 생물학적 신체는 여기에서 어떻게 되는가? 간단하다. 푸코는 흥미롭게도 “자격”을 갖추고, ”자격“을 항상 필요로 하는 노동자의 신체를 ”기계“라고 지칭하고, 자격을 요구하는 사회가 되어간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단적으로 노동자와 기업인의 신체는 ”인적 자본“이 되는 것이고 생물학은 ”경제학적 분석“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679

 

 

* 자기에게 전념하고, 자기를 검증하고, 자기를 점검하는 것. 자기와 싸우고, 절제하고, 단련하고, 영혼을 갈고 닦고, 평정을 손에 넣는 것. 즉, 자신을 완전히 통치하고 통제하는 것. 나는 전적으로 윤리적, 도덕적, 돌발적 격정이나 욕망에도 굴하지 않는다. 빈곤과 공포와 욕망도 이겨낸 나는 이들을 극복한 인간이다. 자신의 완전한 지배, 정치적 육체적으로 비할 바 없이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고, 흔들리지 않고, 이는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는 자신의 소유다. 726

 

 

* 자기에의 배려에서 쾌락이란 끝없는 단련과 금욕과 수련과 배려와 교류 끝에, 그 과정 속에서 손에 넣을 수 있는 “자기로서 존재하는 것” 자체의 쾌락이고 기쁨인 것이다. 미로서의 자기, 예술가로서의 삶. 그리고 푸코는 이렇게 말하게 된다. -삶이 미적 예술 작품의 재로라는 관념에 나는 매료됩니다.- 727

 

 

* 자기애의 배려, 생존의 미학은 그 어떤 결론도 될 수 없다. 그것은 푸코가 세속화라는 전략무기를 간발의 차로 꿰뚫어보지 못한 증좌일 뿐이다. 737

 

 

* “동격” “소요” “돌연변이” 속에서 “사유는 보는 것과 말하는 것 사이의 간격, 분리 속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그것은 다이어그램의 새로운 창출이고, 이는 주사위 던지기, 비장의 카드를 꺼내는 도박자의 “승부”다. 경쟁도, 이익도 아닌 순전한 분만의, 개념의 싸움이다. <바깥>의 바람에 노출된, 도박꾼들의 영원한 싸움. 그 정밀한 소요. 그렇다. 블랑쇼는 이 바깥바람이 불어오는 고안의 때를 “밤”이라 불렀던 것이다. 이렇게 말했었다. “밤 속에서, 짐승이 다른 짐승의 소리를 듣는 것과 같은 순간이 항시 있는 법이다. 그것이 또 하나의 밤이다.” 글 쓰는-자의 싸움. 그 밤의, <바깥>의 폭풍. 영원한 야전. 확인하자. <바깥>은 내부의 외부이므로 바깥이 아니다. 그런 실체화된 외부 따위는 전혀 문제가 아니다. 내부에서 내부를 만들어내는 자의 삶이야말로 <바깥>인 것이다. 주체는 창조 행위라는 도박을 할 때 <바깥>에서 가해지는 습격의 벽이 되고, 찢겨진 곳이 된다. “찢겨짐은 이제 천이 겪는 우발적 사고가 아니라 바깥쪽 천이 뒤틀리고, 감입하고, 이중화활 때의 새로운 규칙이 된다. ‘마음대로’의 규칙 또는 우연한 방출, 주사위 던지기다. ”안이란 바깥의 작용이고, 그것은 하나의 주체화다.“그리고 우리는 작가가 된다. 우리는 무한한 고안의, 안트로포스적 허공의, 역사의 절대적인 끝없음 속에서 ”<바깥>으로의 감입”으로서 계속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작가다. “‘더는 작가가 없다’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오만하기 그지없습니다.”

이 <바깥>. 이 영원한 야전. 끝없는 고안의 춤. 라캉은 이를 여성의 향락이라 부르리라. 771-2

* 그렇다. 오늘은 다른 어떤 날과도 다를 바 없는 하루이고, 그 어떤 날들도 오늘과 다를 바 없는 하루, 다른 날들과 하나도 닮은 데가 없는 이 하루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끝이 없다. 우리가 태어나 죽는 찰나의 영겁, 짧은 영원 속에서 몇 번이나 밤은 도래할 것이다. <바깥>의 시간이. <바깥> 바람을 쐬고, 그 삐걱거림을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울리는 작은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는 한없는 그 <바깥>의 주름, <바깥>의 효과가 된다. 거기에서 우리는 무한히 고안을 계속할 것이다. 안트로포스의 고안하는 힘에 한계는 없다. 가자. 우리는 가자. 우리는 글 쓰고 노래하고 춤추고 사유하자. <거울>을 만들어내기 위해. 제3자를 만들어내기 위해. 근거율을 만들어내기 위해. 공격하기 위해. 손에 쥐기 위해. 지키기 위해. 굶주림에 저항하고 추위에 저항하고 죽음에 저항에 살아남기 위해. 모든 죽음과 위험의 선동을 웃어넘기기 위해. 전진하기 위해. 옆으로 한 발 나가기 위해. 소격을 유지하기 위해. 자유를 직조하기 위해. 투쟁하기 위해. 도박하기 위해. 이기기 위해. 지기 위해. 승리하고 패배하는 기쁨을 위해. 773-4

 

 

* 대왕과 서슴없이 대치하는 이 개의 삶을 푸코는 “주권적인 삶”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견유학파는 거의 알몸이고, 방사에 이르기까지 사람들 앞에서 할 정도로, 그 무엇도 가리지 않는 “가시성” 속에 있었다. 공중의 눈 앞에서 태워지기를 바라기조차 했던 페레그리누스를 형용하는 푸코 자신의 말에 따르면 “견유학파적 삶의 절대적 가시성” 속에 있었다. 개는 다 보여준다. 자신의 삶을, 치부를, 성을, 자신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이 개는 “감시”도 한다. 분명히 푸코는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견유학파는 자신의 전부를 사람들의 시선에 드러내 보이는 대신, 타인의 전부를 감시하는 자이고자 한다.“........개는 감시를 당하고만 있지는 않는다. 개는 감시한다.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는, 가난하고 알몸인, 반항하는 주권자인 개의 감시다. 여기에서는 푸코가 오랫동안 양립할 수 없다고 우겨왔던 주권 권력과 규율 권력이, 나중에 자신도 인정한 것으로 양립할 수 있는 것으로, 그러나 새로운 다른 모습으로 결정했다. 801-2

 

 

* 여기에는 무엇인가 다른 것이 있다. 여기에 있는 것은 “다른 삶”으로 변하기를 희구하는, 기묘하리만큼 집요한 지속이다. 투쟁의 지속이다. 보편적인 것, 불변한 것에 저항하려는 자들의 지속이다. 혁명, 예술, 영성을 관통하며 조용히 명동하기를 멈추지 않는 “투쟁의 울림소리”. 이 집요한 개들. 먼 옛날부터 최근까지 끊기는 일 없이 지속되어온 그 표현한 모습, 짖어대는 소리.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기에 주구가 아닌 개들. 신출귀몰한 개들. 이는 초역사적인 것에 대한 저항의 초역사성이다. 불멸, 영구한 것은 존재하지 않고 그것은 항상 전복 가능하다는 사실 자체의 “영원”이다. 8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