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빛난다 - 허무와 무기력의 시대, 서양고전에서 삶의 의미 되찾기
휴버트 드레이퍼스 외 지음, 김동규 옮김 / 사월의책 / 201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오디세이아>, <신곡>, <모비딕>을 읽었다면, 이 책의 모든 문장들이 빛날 것이다. 한 권도 읽지 못했다면 이 책에서 빛나는 문장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호메로스에게 있어 신들이 조율하는 자라면, 인간 위대성의 정수는 신들이 맞춰놓은 정조에 자신이 조율되도록 놔두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조는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정조는 솟구쳐서 잠시동안 누군가를 사로잡다가는 이내 그를 떠난다. 그리스인들은 정조의 이런 일과적인 특성을 퓌시스physis(자연, 생기, 출현)라 불렀다. 이처럼 정조가 일시적이라는 생각은 호메로스의 다신주의에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호메로스의 세계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신들이 만신전을 형성한다는 점일 것이다. 신들은 저마다 특정한 정조를 비춰주며, 그 정조를 지키려는 의식들 일체를 뒷받침해준다. 신들은 저마다 자기 영역에서 가장 탁월한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 빛나는 사례들이다. 최고 상태에 있는 인간들은 세계를 규정하는 이들 정조들 가운데 하나 또는 다른 하나에 대해 온몸을 열어 잠시 동안 휩싸이거나 붙들리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단일한 신이 아니라 신들의 만신전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다양한 삶의 방식을 통일하는 밑바탕의 원리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예컨대 아프로디테가 에로틱한 영역에서 갖는 탁월성과 가정의 수호신 헤라가 갖는 탁월성은 서로 어울릴 수가 없다. 그리스인들은 신들의 정조에 얼마만큼 열려 있는가를 통해 인간의 탁월성을 이해했고, 또한 그 정조가 일시적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시대의 실존에서는 다양한 신들이 제각기 비추고 있는 의미들을 서로 화해시킬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처럼 서로 어울릴 수 없는 신들의 다신주의적 복수성을 이해한다면 헬레네의 능력도 이해가 된다. 즉 메넬라오스와 함께 가정적인 삶을 꾸려나가다가 파리스와의 에로틱한 삶으로 거침없이 옮겨가는 능력 말이다. 헬레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이런 이해들을 화해시키거나 그것들에 순위를 매길 필요성을 못 느낀다. 그냥 각각의 상황에 휩쓸리도록 자신을 열어두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호메로스가 그녀를 “여인들 가운데 빛나는” 존재라고 한 것이다. 149-51

 

 

* 아이스킬로스에게 제우스는 더 이상 만신전을 관장하는 인격화된 신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우스가 <오레스테이아>에 나오는 복수의 여신들과 새로운 올림포스 신들처럼 어떤 문화적 추동력을 상징하는 존재인 것도 아니다. 대신에 제우스는 이런 모든 힘들을 가능케하는 근거,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행위들의 근거가 된다. 그는 모든 것에 깔려있는 배경으로서, 딱히 무엇이라고 묘사할 수는 없어도 모든 유의미한 사건들의 근저에 놓인 무엇이다. 예를 들면, 코러스는 “제우스, 그가 무엇이든” 이라고 언급하기도 하고, “제우스가 한 일이 아니라면 죽을 자들 가운데서 행한 것이므로”라고 덧붙이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제우스는 감춰진 배경으로서 그 자체로는 재현 불가능하지만, 문화의 모든 의미심장한 관례들과 실천들을 지탱해주는 토대라는 것이다. 이런 관념은 성스러움에 관한 매우 근본적이고도 강력한 생각으로서, 특히 유대-기독교적인 신 관념에서 중점적으로 나타난다. 179-80

 

 

* 신전, 대성당, 서사시, 연극, 그리고 기타 예술작품들은 그 문화에서 장려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삶만을 떠받들고 주목하게 해준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작품은, 부모가 아이들의 어릴 적 사진을 보고 그 시절을 떠올리듯이 그렇게 무엇을 재현represent하는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신전이 “아무것도 그려 보여주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오히려 예술작품은 작동work한다. 즉 예술작품은 특정한 삶의 방식을 드러내고 주목시켜주는 일들을 한데 모아 보여준다. 모름지기 빛을 발하는 예술작품은 그런 삶의 방식을 비추고 주목하게 해주며, 자신의 빛으로 모든 사물을 빛나게 한다. 예술작품은 그 세계의 진리를 구현한다. 184

 

 

* 이 과정에서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저자가 플라톤에 대한 뛰어난 비판자였음이 드러난다. 플라톤과 달리 그는 영원하고 추상적인 관념들이 아닌 나무나 탁자와 같은 물질적 사물들이야말로 가장 실재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플라톤과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장한 것과 달리, 몸을 가진 존재는 절대로 허약하거나 욕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몸은 오히려 힘을 지닌 것이고, 몸을 가진 개체는 몸이 없는 영혼보다 더 안전한다.

기독교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은 플라톤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들이 원하던 사람임을 깨닫게 된다. 이제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를 통해 기독교를 명료화하고자 애썼다. 이런 해설자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이 토마스 아퀴나스였다. 그는 <신학대전>이라는 거대한 과제를 떠맏았는데, 이 책은 실재에 관한 그리스적 이해와 기독교적 이해를 세부에 이르기까지 완전하게 화해시키려 한 작품이었다. 이런 아퀴나스 신학을 대중화한 사람이 바로 아퀴나스보다 한 세기 뒤에 살았던 단테 알리기에리였다. 216

 

 

* 음유시인들 덕분에 단테는 자기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경험이 한 여인에 대한 t k랑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단테는 제1운동자의 궤도 속으로 이끌려 들어간다. 하지만 신의 관조를 통해 얻은 축복은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그의 모든 개인적 의지, 즉 베에트리체에 대한 사랑이나 정치에 헌신하고자 하는 의지를 없애버린다. 확실히 단테는 축복받았다고 할 수도 있다. 축복이 우리들 개인을 지우면 지울수록 우리는 더욱 강렬한 기쁨에 젖게 되니 말이다. 그러나 이토록 행복한 축복과 견주어볼 때 우리가 지상에서 얻는 모든 기쁨은 하찮은 것이 된다. 단테는 이것을 “온갖 달콤함을 능가하는 기쁨”이라고 표현한다. 단테는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모든 피조물을 만든 창조주이 사랑 속에 흡수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로 실존의 충만함에 이르는 길일까? 그것은 실존의 충만함에 이르는 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의미 있는 삶을 회피하는 길처럼 보인다. 사살상 이것은 중세적 형태의 허무주의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신의 사랑 앞에서는 베아트리체의 사랑도, 단테의 정치적 열정도 모두 사소한 것이 되고, 이런 삶 속에서 의미 있는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기 때문이다. 237

 

 

* 에이해브는 로마 기독교 세계를 몰락시키는 악마적 사악함과 자신을 나란히 세움으로써 악마의 육화를 완성한다. 그러나 멜빌은 이 구절을 완성할 의향이 없는 듯하다. 실제로 그는 호손에게 그것을 스스로 완성하라고 말한다. 추측건대 이것은 책을 읽는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할 것이다. 표면적 진리들에 대해 스스로를 닫는 내면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종교라면 무엇이건 멜빌은 “(그 종교의)~이름으로 당신에게 세례를 베풀지 않겠다”고 말하는 듯하다. 나는 모든 다신적 진리들을 당신 스스로 발견하도록 놓아둔다. 그런 진리들 속에서 살아가고, 그 속에서 모든 즐거움과 슬픔을 맛보도록 하자. 325-6

 

 

* 다 자란 성인이 나무 막대기를 들고 딱딱한 공을 맞추려고 하는 모습이나, 덩치 큰 젊은이들이 선 너머로 타원형 구체를 던지거나 들고 뛰는 광경을 보고 비웃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스포츠가 성스러운 의미를 지닌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스포츠에는 어떤 순간들이 존재한다. 경기하는 순간이나 그것을 목격하는 순간들 말이다. 그 순간이 오면 뭔가 압도적인 것이 우리 앞에 일어나 손으로 만질 수 잇을 것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며, 거센 파도처럼 우리를 덮어버린다. 이런 순간이 오면 사건과의 물리적 거리도 문제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성스러움으로 빛나는 순간이다. 335

 

 

* 무슨 이런 하품 나는 고민을 야구 경기장에서 한다는 말인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칸트의 경고 속에는 어떤 의미심장한 뜻이 있다. 결국 야구장에서 관중과 하나가 되어 일어서는 것과, 히틀러의 집회에서 군중들이 하나가 되어 일어서는 것 사이에는 포착하기가 매우 힘든 거리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루 게릭의 고별사를 위대한 스포츠 연설이 아니라 하나의 수사학적 웅변으로 본다면, 그 거리는 더욱 좁혀질 것이다. 현상의 반짝임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만일 우리가 루 게릭의 고별사와 히틀러의 선동 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지적할 수 없다면, 아마도 칸트가 말한 성숙함이야말로 지루하기는 해도 우리가 따라야 하는 가장 현명한 지침이 될 것이다. 350

 

 

* 서양의 숨겨진 역사는 우리에게 한 가지 형태의 성스러움만이 아니라 상이하고도 양립 불가능한 성스러움의 형태들을 여럿 남겨 놓았다. 퓌시스는 우리를 파도처럼 고양시키는 거칠고 열광적인 성스러움을 보여주었고, 포이에시스(창작)는 사물들을 가장 훌륭하고 성스러운 상태로 만드는 온화한 양육적 스타일을 보여주며, 테크놀로지는 모든 성스러운 것들을 비웃는 삶의 자동적이고 자족적인 형태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오늘날의 역사 단계에서는 특별한 메타 포이에시스 기술이 필요하다. 이 기술은 우리에게 있는 성스러움의 양태들 각각을 공평하게 대우하는 기술이다. 373-4

 

 

* 에필로그 -빛나는 모든 것들

 

늙고 지혜로운 스승에게 오랫동안 가르침을 받아온 두 제자가 있었다. 어느날 스승이 말했다. “제자들아, 너희들은 이제 세상에 나갈 때가 되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빛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면, 너희들의 인생은 복될 것이다.”

제자들은 아쉬움과 흥분이 뒤섞인 채 스승을 떠나 각자의 길로 갔다. 여러 해가 지난 후 그들은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서로를 다시 만난 것에 행복해했고, 상대방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들으려는 기대감으로 들떴다.

첫 번째 제자가 두 번째 제자에게 시무룩하게 말했다.

“나는 세상에 있는 많은 빛나는 것들을 보는 법을 배웠지. 하지만 여전히 불행하네. 슬프고 실망스러운 것들 역시 많이 보았기에 스승님의 충고를 따를 수 없다고 느낀다네. 아마 나는결코 행복과 즐거움으로 충만해질 수가 없을 것 같으이. 솔직히 말해서 모든 것들이 빛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없었으니까 말이야.”

두 번째 제자는 행복감에 반짝이며 첫 번째 제자에게 말했다.

“모든 것들이 빛나는 건 아니라네. 다만 빛나는 모든 것들이 존재하는 것이지.” 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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