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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ㅣ 현대문화센터 세계명작시리즈 26
오스카 와일드 지음, 하윤숙 옮김 / 현대문화센터 / 2009년 10월
평점 :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The picture of Dorian Grey)를 읽었다. 처음에『옥중기』를 읽고 그의 아름답고 간결한 문체가 마음에 들었었다. 옛날 옛적 1854년에 더블린에서 태어난 오스카 와일드. 또 아일랜드이다. 대체 그 작은 나라에 유명한 작가들이 얼마나 많이 있단 말이냐. 부러울 따름이다. 늘 코트에 꽃을 꽂고 다녔다는 그. 이렇게 낭만적인 사람이 있다니.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그의 생각은 그가 쓴 글에서도 볼 수 있지만 책 표지에 쓰이는 그의 초상화 사진만 봐도 느껴진다. 한 손은 턱을 괴고 한 손은 무릎을 짚고 있으며 뚫어지게 카메라를 응시하는 그의 눈빛, 신경 써서 웨이브를 준 머리카락. 대부처럼 걸쳐 입은 밍크코트. 살짝 미소 짓고 있는 입술. 그를 만나면 누구라도 그에게 호감을 보일 것 같다. 도리언 그레이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는 너무 일찍 태어났다. 동성애 행위는 곧 죄였던 시기에 그는 동성애 혐의를 받았고(실제로 동성연애자였다고 한다) 그래서 작가의 명성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감옥에 수감되었다. 게다가 망명까지 해야 됐고 파리에서 쓸쓸하게 죽어야 했으니 조금만 용기를 가지면 커밍아웃을 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를 본다면 얼마나 억울할까.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문체는 아름답다. 헨리 워튼 경의 냉소적이고 삐딱한 말투만 제외한다면 소설은 온통 낭만,젊음,예술을 찬양하는 분위기로 달콤함을 넘어선다. 주인공 그레이는 눈부신 외모를 가지고 있지만 아직 너무 젊은 나이이기에 자신의 아름다움을 인식하지 못한다. 바질 홀워드라는 화가가 어느 날 그레이를 만나 그의 아름다움에 충격을 받고, 그를 모델로 많은 그림을 그린다. 바질은 그레이로 인해 충만한 영감을 얻고 훌륭한 그림들을 계속 그려낸다. 이때 바질의 친구 헨리 워튼 경 등장. 바질은 그를 좋아하지만 그의 위험한 사상과 삶을 바라보는 냉소적인 시선을 경계한다. 바질을 통해 그레이와 헨리가 만나고 그레이는 헨리의 능란한 말솜씨에 빠져든다. 헨리는 그레이에게 젊음은 한 순간이니 지금을 즐기라고 충고한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바질은 그레이의 초상화를 완성한다. 그레이는 자신의 초상화를 보며 말한다. “얼마나 슬픈 일인가요! 나는 점점 늙어갈 테고 끔찍하고 무서운 모습으로 변하겠지요.....언제까지나 젊음을 간직하는 것은 나고, 늙어가는 것이 이 그림이라면. 그럴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나는 모든 것을 줄 거예요. 이 세상을 통틀어 내가 주지 못할 건 하나도 없어요. 할 수만 있다면 내 영혼도 바칠 거에요.” 바질은 그레이에게 초상화를 선물하고 그레이는 헨리를 점점 따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레이는 우연히 극장에 갔다가 17살 여배우 시빌 베인이 줄리엣을 연기하는 모습에 빠져든다. 그녀는 아름답고 순수하다. 둘은 낭만적인 사랑에 빠진다. 그레이는 그녀를 소개시켜주려 헨리와 바질을 데리고 그녀의 연극을 보러 간다. 그러나 시빌은 형편없는 연기를 보여준다. 실망하여 왜 그랬냐고 묻는 그레이에게 시빌은 말한다. “오늘 밤 처음으로 나는 지금까지 내가 공연을 벌였던 곳에서 텅 빈 허공을, 가짜 모조물을, 공허한 연극의 어리석음을 깨달았어요.....내사랑! 차밍 왕자님! 삶의 왕자님! 나는 그림자가 지겨워졌어요.....난 무대가 싫어요. 내 안에 아무 느낌도 없는 열정을 흉내 낼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나를 불태우는 이 뜨거운 불을 흉내 낼 수는 없어요......사랑에 빠진 상태에서 연기를 한다는 건 모독이에요. 당신 덕분에 깨달았어요.” 그러나 도리언은 자신이 사랑한 것은 당신의 예술성 때문이었다고 말하며 그녀를 떠난다. 그리고 그날 밤 시빌은 자살한다.
집으로 돌아온 도리언이 무심결에 자신의 초상화를 보는 순간 그림 속 자신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한 것을 보게 된다. ‘입 주위에 잔인한 주름이 보였다’ 그는 자신이 예전에 했던 말, 자신의 아름다움이 훼손되지 않고 그림이 대신 늙었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두려움에 빠진 그는 초상화를 이층 방에 숨겨놓고 이때부터 그의 인생은 쾌락으로 흘러간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마음대로 이용하고 즐긴다. 그는 음악에 심취하고, 악기를 모으고, 보석을 연구하였으며, 아름다운 직물과 자수를 모은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먹고 놀고 즐기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타락시킨다. 그는 시간이 지나도 늙지 않지만 그의 초상화는 점점 추악해져간다.
도리언은 몇몇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고, 은폐한다. 점점 괴로움과 죄책감에 휩싸인 그는 이제부터 선하게 살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나 초상화가 남아 있다. 그는 자신의 초상화를 없애면 아무도 자신이 추악하다는 것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고 칼로 그림을 찌른다.
순수하고 깨끗했던 한 젊은이가 아름다움을 지속하고 싶은 탐욕으로 영혼이 점점 망가져가는 것을 보니 무서워졌다. 이것은 지금 이 시대의 모습이 아닌가? 조금이라도 젊게 보이기 위해 온갖 수술을 감행하고, 섹시하다는 말이 칭찬이 되고, 성의 상품화가 도를 넘어버린 현대. 추악해진 수많은 그레이의 초상화가 온 사방에 걸려있는 것 같다. 그레이는 왜 외면의 아름다움이 전부라고 생각했을까? 쾌락주의자 헨리의 비정상적이고 냉소적인 생각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바질은 왜 헨리의 사상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와 가깝게 지냈을까? 파멸의 시작은 헨리의 말로부터 비롯되었다. 사람들은 그럴 듯한 그의 말에 감탄하고, 공감하였으며, 동화되었다. 문득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본다. 아니 혹시 내가 헨리는 아닌지 모르겠다.
# 유혹에 저항하면 영혼은 금지된 것에 대한 갈망으로, 또는 기괴한 규칙 때문에 불법적이고 기괴한 것으로 되어버린 것에 대한 욕망으로 병들어가지.
# 결국 여자는 두 종류라는 걸 알았네. 수수한 여자와 색깔이 화려한 여자. 수수한 여자는 매우 쓸모가 있지. 훌륭한 인격을 가졌다는 평판을 얻고 싶다면 그런 여자를 저녁식사에 데려가게나. 다른 여자는 매우 매력적이지. 하지만 이들은 한 가지 실수를 저지른다네. 젊어 보이기 위해 화장을 하는 거야.
# 그래, 당신은 내 사랑을 죽였어요. 내 상상력을 흔들어놓곤 하던 당신이 이제는 호기심조차 일으키지 않는다고요. 당신은 내게 아무런 힘도 미치지 못해요. 내가 당신을 사랑했던 건 당신이 경의로운 사람이고, 천재성과 지성을 갖추었으며, 위대한 시인의 꿈을 이해하고 예술이라는 그림자에 형태와 실질적인 내용을 불어넣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당신은 이 모든 것을 저 멀리 내던져버렸어. 당신은 천박하고 어리석어요. 세상에! 당신을 사랑하다니 내가 미쳤지!.......난 당신을 유명하고 화려하고 멋진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어요.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숭배했을 거고, 당신은 내 이름을 널리 알렸겠지. 그런데 지금 당신은 뭐죠? 얼굴만 예쁜 삼류 배우일 뿐이야.
# 보통 여자들은 항상 스스로를 위로한다네. 감상적인 빛깔을 찾아다니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여자도 있지. 나이가 몇이든 상관없이 엷은 자줏빛 옷을 입은 여자는 절대로 믿지 말게. 또 서른다섯 살이 넘은 여자가 분홍색 리본을 좋아한다면 그런 여자도 절대로 믿어서는 안되네. 과거의 사연이 있다는 걸 의미하거든. 어떤 여자들은 자기 남편에게서 갑자기 좋은 성품을 발견하며 스스로를 위로한다네.
# 그를 파멸로 몰아넣은 건 그의 아름다움이었다. 그토록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던 아름다움과 젊음이 그를 파멸시킨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없었더라면 그의 삶에 어떤 얼룩도 묻지 않았을지 모른다. 아름다운 외모는 그에게 단지 가면일 뿐이고, 젊음은 그저 흉내일 뿐이었다. 아무리 좋다 한들 젊음이란 무엇인가? 초록의 미숙한 시간, 천박한 기분과 병적인 생각으로 가득한 시간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