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어둠의 이야기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1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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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한 책이다. 모처럼 굉장한 작가를 발견했다. 오즈의 <나의 미카엘>, <여자를 안다는 것> 책이 있다는 건 알았으나 제목이 끌리지 않아 미루었던 책인데 당장 읽어야겠다. 루시디의 <한밤의 아이들> 책을 읽었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다. 소설은 온통 낮선 지명과 명칭들로 가득 차 있는데 손을 놓을 수가 없다. 전화가 걸려온 친구에게 다짜고짜 굉장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일 권-

* 여섯 살쯤 되었을 때 인생 최고의 날이 왔다. 아버지가 나를 위해 아버지 책장 중 하나를 비워 공간을 마련하고 그곳에 내 책들을 두게 해 준 것이다. 정확히는, 맨 아래 칸의 약 4분의 1가량 되는 30센티미터 정도를 내주었다. 나는 그때까지 침대 곁 의자 위에 놓여 있던 모든 책을 끌어안고 책장으로 가 적절한 방식으로, 책등은 바깥 세계를 책배는 벽을 향하도록 잘 세워두었다.

그것은 일종의 입문 의례, 성인식이었다. 누구든 책을 세워서 꽂았다는 것은, 그가 이제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라는 뜻이다. 나는 이제 아버지와 같았다. 내 책들은 이미 세워져 있었다. 48

 

* 그 서재로 말하자면, 심지어 마루에서 높은 천장까지, 창문과 현관까지 뻗은 책 선반 수십 개의 곧고 검은 행렬, 뭔가 엄격하고 금욕적인 곳, 무언가 고요하고 엄격한 장엄함 같은 공간이며, 경솔하고 천박한 것은 견딜 수 없고 우리 모두 거역할 수 없는 장소여서, 그곳에서는 요셉 큰할아버지조차 늘 속삭이며 말했다.

큰할아버지의 거대한 서재에서 나는 향기는 내 온 삶을 따라다녔다. 먼지에 뒤덮이고 숨겨진 일곱 개의 지혜가 내뿜는 매혹적인 향기, 비밀스러운 고행자의 삶, 학문의 길에 헌신한 고요하고 은둔적인 삶의 냄새, 가혹한 침묵의 유령은 지식의 가장 깊은 우물에서부터 휘몰아쳐 올라왔다. 그것들은 죽은 현자들의 속삭임과 깊에 묻힌 작가들의 비밀스러운 생각의 발로이자, 선조들이 가졌던 욕망의 차가운 애무였다. 101

 

* 그러고는 그는 유쾌하게 반짝이는 푸른 눈을 하고 따스한 음성으로 그림을 그려내듯, 천천히 낭랑한 이디시어로 장폴 사르트르가 바로 몇 년 뒤 발견했던 것을 분명하게 설명해나갔다. “그런데 지옥이 뭐냐? 천국은 뭐고? 분명 그 모든 것이 우리 안에 있단다. 우리 각자의 집에 있어. 모든 방에서 너희는 지옥과 천국을 발견할 수 있을 게다. 모든 문 뒤에. 두 겹 담요 아래. 사실은 이런 거야. 작은 사악함으로 사람은 사람에게 지옥이 되지. 작은 연민, 작은 관대함으로 사람은 사람에게 천국이 되고.” 290

 

* “아무도” 어머니가 말했다. “누군가에 대해 그 어떤 것도 모른단다. 심지어 가장 가까운 이웃에 대해서도 모르고. 심지어 네가 결혼한 사람에 대해서도 모르고. 아니면 네 부모나 자식에 대해서도 모를 일이지. 전혀. 심지어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모르는데. 우리는 아무것도 몰라. 만일 때로 우리가 순간 마침내 뭔가 알게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게 더 나빠. 왜냐하면 아무것도 모르고 사는 게 오류 속에 사는 것보다 더 나으니까. 사실 누가 알겠니? 다시 생각해보면 암흑 속에 사는 것보다 오류 속에 사는 편이 훨씬 더 쉬울지도 모르겠구나?” 300

 

* 소설을 쓰는 것은, 내가 한 번 말한 적이 있는데, 레고로 에돔 산을 만들려 하는 것과 같다. 혹은 성냥개비로 파리 전체, 거물이며, 광장이며, 가로수 길, 맨 마지막으로 거리의 벤치까지 만들려 하는 것과 같거나.

8만 단어짜리 소설을 쓴다면 수천 번 결정을, 그것도 그저 플롯의 개략적인 내용에 대한 결정이 아니라, 누가 살고 누가 죽을 건지, 누가 사랑에 빠지고 누가 불충할 것인지, 누가 부자가 되고 누가 자기를 웃음거리로 만들 것인지를 결정하고 인물의 이름이며 외양, 그들의 습관이나 직업, 장을 나누는 일, 책 제목(이런 것들이 가장 단순하고 가장 광범위한 결정이다)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502

 

-이 권-

 

* 우리는 조용히 신중해지는 법을 배웠다. 침묵이 금이다. 분별 있게 말할 수 없다면 인기를 가로채지 않는 게 최선이다. 다른 사람 위로 들어올려져, 선생님의 책상에 앉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고, 자신의 머리에 도취될 수 있으나, 추락은 순식간이고 고통스럽다. 형편없는 기호나 지나친 영특함은 굴욕을 야기할 수 있었다. 어떤 공적 발화건 사전에 준비하는 것이 중요했다. 언제나 두 번 생각해야 하고, 그게 가만히 있는 것보다 나은지 자신에게 물어봐야 한다. 21

 

* 그리고 각각의 침대 발치에는 예수살렘에는 없는, 어머니 말로는 오크나무라고 하는 광택이 나는 두꺼운 재질로 된 서랍장이 있었는데, 어머니는 내게 그걸 손가락으로 만져보고 손으로 쭉 쓰다듬어보라고 독려했다. 냄새도 맡아보고, 혀끝으로 감촉도 느껴보고, 손가락으로 만져봐서, 물체의 따스함, 매끄러움, 냄새, 거칠기, 강도, 두드렸을 때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소리, 그녀가 ‘반응’이나 ‘거부’라고 부르던 그 모든 것들을 겪어봐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가 말하기를, 모든 재질, 모든 옷감, 가구, 모든 전기 기구, 모든 사물들이 다 다른 반응과 거부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들은 고정되어 있지는 않지만 어떤 계절이나 낮과 바 시간에 따라, 만지고 냄새 맡는 사람에 따라, 빛과 그늘, 심지어 우리가 이해할 방법이 없는 막연한 성향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히브리어에서 무생물과 욕망을 같은 단어로 쓰는 것은 우연이 아니란다. 이것저것에 대한 욕망을 가지거나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우리뿐만이 아니며, 무생물과 식물 역시 자신들만의 내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고, 탐욕스럽지 않은 방식으로 느끼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는 법을 아는 자만이 이따금 그것을 분별할 수 있단다. 17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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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간다 창비시선 366
이영광 지음 / 창비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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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굴

 

너는 내 표정을 읽고

나는 네 얼굴을 본다

 

너는 쾌활하고 행복하게 마시고 떠든다

그래서

나도 쾌활하고 행복하게 마시고 떠든다

 

그러다 너는 취해 운다

그래서 나는 취하지 않고 운다

 

눈물을 닦으며 너는 너를 사랑한다

눈물을 닦으며,

나는 네 사랑을 사랑한다

 

너는 나를 두고 집으로 갈 것이다

나는 너를 두고, 오래 밤길을 잃을 것이다

 

네 얼굴엔 무수한 표정들이 돛처럼 피어나고

내 얼굴은 무수한 표정들에 닻처럼 잠겨 있다

 

 

* 사랑의 발명

 

살아다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너는 말했지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취해 말했지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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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의 회화 파레시아 총서 1
마리본 세종 엮음, 미셸 푸코 외 지음, 오트르망.심세광.전혜리 옮김 / 그린비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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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사람은 위대한 이유가 있다. 마네도 푸코도.

 

* 마네가 한 일-아무튼 그것은 서구 회화에서 마네가 일으킨 변혁들 가운데 중요한 하나라고 생각합니다-은 말하자면 그림에 재현된 바 안에서 서구 회화의 전통이 그때까지 숨기고 피해 가려 했던 캔버스의 속성, 특질, 한계가 다시 튀어나오게 한 것이었습니다.

사각형의 표면, 커다란 수평축과 수직축, 캔버스를 비추는 실제 조명, 감상자가 그림을 이 뱡향 저 방향에서 바라볼 가능성, 이 모든 것이 마네의 그림에 현존하며, 마네는 자신의 그림들 안에 이것들을 다시 부여하고 재현했습니다. 그리고 마네는 오브제로서의 그림, 물질성으로서의 그림, 외부의 빛을 받고 감상자가 그 앞에 서거나 주변을 돌게 될 채색된 사물로서의 그림을 재발명-어쩌면 발명?-합니다. 이러한 오브제로서의 그림의 발명과 재현된 것 안에 캔버스의 물질성을 다시 삽입시킨 것이 마네가 회화에 일으킨 중대한 변혁의 핵심을 이루며, 또 이런 의미에서 저는 마네가 인상주의를 준비한 것에 한정되지 않고 초기 르네상스 이후 서구 회화에서 근본적이었던 바를 흔들었다고 생각합니다. 26

 

* 요컨대 <올랭피아>의 나신을 향하면서 나신을 비추는 것은 우리의 시선입니다. 우리가 <올랭피아>의 나신을 가시적으로 만듭니다. <올랭피아>를 향한 우리의 시선은 횃불을 들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선이 빛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올랭피아>의 가시성과 나신의 책임자입니다. 57

* 따라서 세 가지 양립 불가능성의 체계가 존재합니다. 요컨대 화가는 중앙에 위치해야 하고 또 오른쪽에 위치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있어야 하고 또 아무도 없어야 합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선이 있어야 하고 아래서 위로 올려다보는 시선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보는 대로의 광경을 보기 위해 어디에 위치해야 할지를 알 수 없는 삼중의 불가능성, 즉 감상자가 위치해야 하는 안정적이고 정해진 장소의 배재가 <폴리-베르제르의 바>의 근본적인 속성이며, 이 그림을 볼 때 체험하는 매력과 거북살스러움을 설명합니다. 70 -푸코

 

* 오랫동안 회화에는 정서적 자극을 가함으로써 가르치기도 하고 즐거움을 주기도 하는 임무가 부여되어 왔습니다. 왜냐하면 정념은 단순히 회화의 주제인 것만이 아니라 목적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감상자의 영혼을 감동시키고 정서를 발생시켜야 합니다. 하지만 감상자가 침묵하는 회화와 만나게 되면 정서의 전파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대되었던 정서는 발생하지 않습니다..107

 

* (마네는) 물질적 표면으로서의 그림을 강조함으로써 그림이 세계를 향해 열린 창이라는 것을, 그리고 피라미드식 시각의 교차가 믿게 하려 했던 회화의 정의를 부정했던 것입니다. 마네는 캔버스의 투명성이라는 착시 효과와 결별하고 회화의 빗물질성이라는 환상을 고발합니다. 115-6 -카롤 탈롱-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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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야네 말 창비시선 373
이시영 지음 / 창비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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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곧

 

양들이 조심조심 외나무다리를 건너 귀가하고 있습니다

곧, 저녁입니다

 

* 대지의 잠

 

어제 내린 눈 위에 오늘 내린 눈이 가만히 닿았습니다.

“춥지 않니?” “아니.” “어떻게 왔어?” “그냥 바람에 떠돌다가 날려서.” “그래, 그럼 내 위에 누워보렴.” 둘은 서로의 시린 가슴을 안고 깊은 잠에 들었습니다.

 

 

* 바닥

 

가로등은 심심하여 빌밑을 헤적이다가

용기를 내어 은행나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깜짝 놀란 은행나무가 노오란 잎들을 우수수 쏟았다

가을이었다

 

* 마침내

 

그는 물가에 다다랐다

그리고 성큼성큼 물 위로 걸어갔다

마침내 호수가 맑고 잔잔하였다

 

* 춘천

 

소설가 오정희 씨가 서울 나들이를 위해 춘천 역사에 들어서며 어떻게 알았는지 금테 모자를 눌러쓴 귀밑머리 희끗한 역장이 다가와 이렇게 인사한다고 합니다.

“오 선생님, 춘천을 너무 오래 비워두시면 안됩니다.”

그리고 측백나무 울타리 가에서 서울행 열차의 꽁무니가 안 보일 때까지 배운한다고 합니다.

아, 나도 그런 춘천에 가 한번 살아봤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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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을 적시며 창비시선 342
이상국 지음 / 창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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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늘

 

누가 기뻐서 시를 쓰랴

 

새들도 갈 데가 있어 가지를 떠나고

 

때로는 횡재처럼 눈이 내려도

 

사는 일은 대부분 상처이고 또 조잔하다

 

누가 뭐라든 그의 편이 되어주는 것이다

 

나의 시는 나의 그들이다

 

 

* 산그늘

 

장에서 돌아온 어머니가 나에게 젖을 물리고 산그늘을 바라본다

 

가도 가도 그곳인데 나는 냇물처럼 멀리 왔다

 

해 지고 어두우면 큰 소리로 부르던 나의 노래들

 

나는 늘 다른 세상으로 가고자 했으나

 

닿을 수 없는 내 안의 어느 곳에서 기러기처럼 살았다

 

살다가 외로우면 산그늘을 바라보았다

 

 

 

* 그도 저녁이면

 

북천에는 내 아는 백로가 살고 있다

 

그의 직장은 물막이 보

 

물 웅웅거리는 어도 옆

 

부부가 함께 출근하는 날도 있지만

 

보통은 혼자 일한다

 

다른 한쪽은 새끼를 돌보거나 집안일을 할 것이다

 

그는 고기를 잡는 것보다

 

하염없이 물속을 들여다보는 게 일인데

 

종일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도 저녁이면 술 생각이 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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