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전과 영원 - 푸코.라캉.르장드르
사사키 아타루 지음, 안천 옮김 / 자음과모음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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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와 라캉을 이토록 재밌고 이해하기 쉽게 쓴 책이라니. 도서관에서 빌려온, 반납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10권이 넘는 책을 모두 제쳐두고 며칠 동안 이 책만 읽었다. 봄이 와서 꽃은 피고, 햇살은 반짝이는데 800페이지가 넘는 책이기에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초조하게 책장만 넘겼다. 처음부터 끝까지 재밌다. 소설을 읽는 마음이었다.

 

 

* 따라서 팔루스 때문에 “기관으로 국소화 되지 않은 순전한 성관계”는 사라진다. 비참하기까지 한 하나의 기관만을, 하나의 시니피앙만을 두고 성관계는 직조되어간다. 그래서 라캉은 팔루스의 차원에서 성관계는 없다고 한 것이고, 우리는 팔루스야말로 향락을 “통제하는” “조정기(레귤레이터)”라고 말한 것이다. 향락이 어마어마한 절대적 향락이 되지 않도록 규제, 조정, 변압, 변환, 치수하는 것이라고.

팔루스의 향락은 길들여져 있고 합법적이다. 그리고 그것ㅇ로 족하다. 아무렴. 그래야 한다. 라캉은 팔루스의 향락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규제 때문에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빼앗기고 어디인가 죽은 것으로서 성을 영위하고 그 온건한 향락을 흔쾌히 살아갈 것이기에. 하루하루의 성적인 다정함, 그 격렬하지만 평온한 기쁨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묘한 슬픔 따위 신경 쓸 필요는 없다. 162

 

 

* 잉여향락도 평온한 하루하루의 “가벼운 양념”에 불과하다. 그것은 아무것도 뒤흔들지 않고,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으로 족하다. 대상 a와 잉여 향락이 향락을 흡수하고 조정하고 있는 한, 세계는 “대체로” 평화롭다. 그것이 아무리 분쟁, 비리, 착취가 널려있는 세계라 하더라도. 라캉 이론에 정통한 사회학자들은 말한다. 자본주의는 “성관계는 없다”라는 “불가능”한 구멍을 중심으로 하염없이 충동을 회전시키고 있다고. 그렇다. 그들의 발언은 이 세계의 향락을 긍정하는 것이 된다. 권력을 추구하는 것도 좋다. 돈을 추구하는 것도 좋다........게다가 그것은 자본주의를, 사회를 뒤흔들 일이 없는 안전한 향락이니까. 팔루스와 대상 a는 향락의 레귤레이터다. 179-80

 

 

* 그러나 라랑그(상징계에 속하지 않는 말), 신을 연모하는 여성의 말은 특정한 내용을 갖는다. 기도의 외침, 연모의 한숨, 상흔의 얼룩, 시구를 고르는 한순간의 망설임이다. 연애편지로서의 언어, 사랑의 문자로서의 언어, 이렇게 말하자. 언어란 언어가 아니다. 언어는 형식화되지 않는다. 동일성을 지니지 않는다. 그것을 열기를 띄고, 향기가 나고, 땀이 나고, 묵직하고, 불투명한 둔탁함을 지닌 그 무엇이다. 그것은 때때로 긁히고, 고이고, 탁해진다. 그리고 산뜻하게 뛰쳐나간다. 205

 

 

* 글쓰기. 르장드르가 말하듯 “사회란 텍스트다.” 그렇다면 글쓰기란 사회를 직조하고 다시 짜내는 것, 그리고 그 궁극점에 있어 “낳는 것”에 다름 아니다. 신의 여자가 되어 낳는 것. 그것이 이 “연애편지”였다. 따라서 그녀들은 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것이 진정한 개념이 될 땎K지. 진정한 신의 아이를 낳게 될 때까지 그것을 멈출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미 라캉이 “쓰이지 않기를 그만두지 않는 것”이라고 정의한 저 “불가능성”은 무너졌다. 연애편지를 써가는 하루하루의 영위를 통해 의미를, 개념을, 사회가 만들어내려는 것, 텍스트를 고쳐-쓰는 것, 텍스트를 분만하는 것. 이것이 신비주의자의 시도이고, “전부가 아닌” 여성의 향락인 것이다. 211

 

 

* <앙코르>에서 1년 후 10쪽 정도 되는 만년의 인터뷰에서 라캉은 종교와 정신분석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진정한 종교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입니다.- 216-7

 

 

* 서양은 자기가 지닌 “표현의” “문학적” 자유라는 픽션, 말 그대로 “도그마”를 아무 전제없이 “보편적”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역사적 추세에 의해 “보편적”이 되었는지는 전혀 자각하지 못한다. 그러하기에 “기본적 인권”인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픽션이 픽션이라는 것조차 모르는 이슬람들은 “야만”이고 “말이 안 통한다”는 경멸적인 언사가 미디어에 넘친다. 392

* 벤슬라마는 유럽의 “표현의 자유” 원리주의를 공격하는 한편, 이슬람의 “표현의 검열” 원리주의를 공격한다. 395

 

 

* 어떤 사람이 무엇인가를 쓴다. 이 막막하고 어떤 결론에 이를지 전혀 모르는 작업, 저 새벽의 작업, 신앙과 무신앙 사이에 있는 저 잿빛 공간의 작업을 그녀는 어찌어찌 마무리하게 된다. 믿고 있는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믿지 않은 것도 아닌, 이 자기가 쓴 것이 그 순간 “돌연” 자기가 믿고 있는 것이 된다. 이를 읽은 타인 또한 당연히 그녀가 그것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리라. 그도 그럴 것이 “여기에 써 있으”니까. 그리고 불현듯, 돌연 그녀는 깨닫게 된다. 어느새 자신도 믿고 있다는 것을. 자기도, 자기가 쓴 것을 의심의 여지가 없는 신념으로 받아들이고 말았음을.

이렇게 표현해보자. 텍스트를 쓴다는 것은 텍스트인 자신의 신체에 그것을 문신으로 새긴다는 것이다. 정처 없는, 의지할 곳도 없고 끝도 없는 작업의 산물은 “돌연” 주체를 “결정”하고 작품으로 “결정”된다. 텍스트를 낳기란 “돌연” 새겨지고 결정된다는 것이고, 만들어진 것-픽션이란 이 “돌연” 제 3항을 낳는 작업과 그 산물이다. 417-8

 

 

* 이는 “학교의 학급 나누기, 자리 바꾸기, 성적 등수”를 뜻한다. “교실, 복도, 운동장에서의 학생의 정렬, 숙제나 시험을 통해 모든 학생에게 부과되는 서열, 매주 매월 매년 학생 각자가 갖게 되는 서열, 연령순에 따른 학급의 배치, 난이도에 따른 교재와 과제의 순서”이다. “이런 모든 강제적 배열 속에서 학생 각자가 차지하는 서열은 그 나이, 성적, 품행에 따라서 그때그때 변화한다. 학생은 이러한 일련의 세분화된 바둑판 모양의 항목들 위를 끊임없이 이동한다.” 즉 “일렬로 배치된 간격들로 명료하게 구분되는 공간 속에서, 학생 개개인은 서로 끊임없이 순서가 뒤바뀌는 운동”이다. 499

 

 

* 언뜻 비소한 그러나 구체적이고 한순간 한순간의 힘겨루기와 다툼이 문제가 된다. 교사의 눈을 훔쳐 도망치는 학생이고, 자리에 눕히려는 간호사의 손을 뿌리치고자 애쓰는 치매 노인의 뜻밖의 완력, 차가운 물을 계속 뿌려대도 정신과 의사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광인......푸코는 깨닫게 된다. 그들의 투쟁하는 외침, 투쟁의 울림을 자기가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그들의 말과 글이 법 문서로, 규율 권력의 문서화 절차 때문이었다. 그것을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는 특권을 지닌 자신의 입장은 그들과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규율 권력과의 미세한 힘겨루기가 없었다면 그들의 존재와 그 외침은 역사의 암흑 속에 사라지고 말지 않았을까? 기묘한 역설이다. 562

 

 

* 푸코는 단언한다. 나치스보다 규율적이고 생명권력적이었던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규율권력, 생명 권력, 이들이 나치 사회 전체를 빈틈없이 뒤덮어, 있는 힘껏 지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푸코는 계속해서 말한다. 나치 사회는 전면적으로 (복지를) 보정했고, “전면적으로 세큐리티를 확보했고, 전면적으로 조정과 규율을 실행함과 동시에 이 사회에 의해 가장 완벽한 살인 권력이 활보하게 됩니다. 즉, 이 낡은, 죽이는 주권 권력이. 이 죽이는 권력은 나치 사회의 전 사회 신체를 관통합니다.” 599

 

 

* 즉, 18세기 이후 성은 끊임없이 “전면적으로 담론상의 비정상적인 흥분”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괜찮다. 성은 소중하고, 만인이 성적 욕망을 갖고 있고, 이는 과학적으로도 정신분석적으로도 보장되어 있으니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너는 어떨 때, 어떤 식으로, 어떤 자극으로, 어떤 것에 성적 쾌락을 느끼느냐? 무슨 말이든 자유롭게 하렴.’ 이리하여 보증을 받아 안도한, 흥분으로 숨을 헐떡거리는 담론이 번성해간다. 권력에 거슬러, 도덕에 거슬러, 성에 대해 득이양양하게 말하는 자도 많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런 쪽이 많았으리라. 그러나 이미 보아온 것처럼 “그것은 바로 권력이 행사되는 장소에서, 그 행사 수단으로서” 발화되었던 것이다. 성을 말하는 것은, 성은 더는 침범 행위가 아니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성에 대해 세세한 부분까지 조사하고, 심문하고, 관찰하고, 문장으로 쓰고, 자기 검증하고, 청취하고, 기록해 “경제, 교육, 의학, 재판의 각 차원에서 성 담론을 부추겨 추출하고 조종하는” “하릴없이 거대한 말의 산”이 쌓여간 것이다. 아마 지금도. 그러나 그래도 “묘한 우려에 잠겨 스스로에게 말한다. 우리는 성에 대해 충분히 말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너무도 겁이 많고 소심하다”고. 615

 

 

* 이제 권력은 입 다물라 명령하지 않는다. 권력은 침묵을 강제하지 않는다. 권력은 말하라고 명령하고, 말하도록 유도하고, 자세히 말하도록 부추긴다. 고백하라는 유혹이 있기 때문에 자기 안에 “비밀”이 출현한다. 우리의 이로를 염두에 두었을 때 흥미로운 푸코의 말을 하나만 인용하자. “고백이란 말하는 주체와 말해진 문장의 주체가 합치하는 담론의 의식이다. 그것은 또한 권력관계 안에서 전개되는 의식이다.” 619

 

 

* 권력이 있는 곳에, 권력 그 한복판에 저항은 존재한다. 따라서 저항은 권력 바깥에 없다. 권력이 작용하는 곳곳에서, 그 순간마다 저항은 있다. 622

 

 

*이리하여 자유주의는 몇 가지 전략을 취하게 된다. 푸코가 인용하는 것은 자유주의의 격언 “위험 속에서 살라”다. 이러한 “위기의 자극”은 자유주의의 주된 함의“다. 그렇다. 위험을 감수하고 투자해야 한다. 위험을 감수하고 창업해야 한다. 위험을 감수하고 시장으로 나가야 한다. 그러나 자유주의의 위기 전략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푸코는 말한다. ”묵시록의 기사가 사라진 대신, 하루하루의 위험이 출현하고, 등장하고, 침입합니다. 이 일상적인 위험은 항구적으로 활기를 얻어 다시 현실화되고 유통됩니다.“ 즉, 규율 권력을 논했던 <감시와 처벌>의 논지를 여기에서 다시 다룬다. 추리소설, 경찰소설, 언론의 사회면 기사, 변태 범죄자에 대한 기나긴 논설. 그야말로 ”개인, 가족, 인종, 인류의 위험“을 언론 매체가 선동하게 되는 것이다. ‘요즘 이상한 사람이 많으니까 감시 카메라도 어쩔 수 없어요. 실제로 묘한 차림을 한 녀석들이 저 도로변에서 사라졌잖아요. 그러고 보니 댁에도 어린 따님이 있지요?’ 위기의 선동. 이에 더해 암흑가로의 유혹이 섞인 위험의 선동. 무엇을 위해서? 자유 안에 가두어두기 위해서, 세큐리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익을 낳기 위해서. 그렇다. ”자유주의가 없다면 위기의 문화도 없었던 것입니다.“ 669

 

 

*즉, 간략히 말해 신자유주의 사회란 "기업의“, 더 정확히 말해 ”창업“의, ”창업가의 사회다. 가정도 “공동체”도 기업 주변에 조직된다........................그리고 이 신자유주의가 바로 푸코가 마지막으로 “생명 정치”와 연결한 대상이었다. 그렇다. 생물학적 신체는 여기에서 어떻게 되는가? 간단하다. 푸코는 흥미롭게도 “자격”을 갖추고, ”자격“을 항상 필요로 하는 노동자의 신체를 ”기계“라고 지칭하고, 자격을 요구하는 사회가 되어간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단적으로 노동자와 기업인의 신체는 ”인적 자본“이 되는 것이고 생물학은 ”경제학적 분석“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679

 

 

* 자기에게 전념하고, 자기를 검증하고, 자기를 점검하는 것. 자기와 싸우고, 절제하고, 단련하고, 영혼을 갈고 닦고, 평정을 손에 넣는 것. 즉, 자신을 완전히 통치하고 통제하는 것. 나는 전적으로 윤리적, 도덕적, 돌발적 격정이나 욕망에도 굴하지 않는다. 빈곤과 공포와 욕망도 이겨낸 나는 이들을 극복한 인간이다. 자신의 완전한 지배, 정치적 육체적으로 비할 바 없이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고, 흔들리지 않고, 이는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는 자신의 소유다. 726

 

 

* 자기에의 배려에서 쾌락이란 끝없는 단련과 금욕과 수련과 배려와 교류 끝에, 그 과정 속에서 손에 넣을 수 있는 “자기로서 존재하는 것” 자체의 쾌락이고 기쁨인 것이다. 미로서의 자기, 예술가로서의 삶. 그리고 푸코는 이렇게 말하게 된다. -삶이 미적 예술 작품의 재로라는 관념에 나는 매료됩니다.- 727

 

 

* 자기애의 배려, 생존의 미학은 그 어떤 결론도 될 수 없다. 그것은 푸코가 세속화라는 전략무기를 간발의 차로 꿰뚫어보지 못한 증좌일 뿐이다. 737

 

 

* “동격” “소요” “돌연변이” 속에서 “사유는 보는 것과 말하는 것 사이의 간격, 분리 속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그것은 다이어그램의 새로운 창출이고, 이는 주사위 던지기, 비장의 카드를 꺼내는 도박자의 “승부”다. 경쟁도, 이익도 아닌 순전한 분만의, 개념의 싸움이다. <바깥>의 바람에 노출된, 도박꾼들의 영원한 싸움. 그 정밀한 소요. 그렇다. 블랑쇼는 이 바깥바람이 불어오는 고안의 때를 “밤”이라 불렀던 것이다. 이렇게 말했었다. “밤 속에서, 짐승이 다른 짐승의 소리를 듣는 것과 같은 순간이 항시 있는 법이다. 그것이 또 하나의 밤이다.” 글 쓰는-자의 싸움. 그 밤의, <바깥>의 폭풍. 영원한 야전. 확인하자. <바깥>은 내부의 외부이므로 바깥이 아니다. 그런 실체화된 외부 따위는 전혀 문제가 아니다. 내부에서 내부를 만들어내는 자의 삶이야말로 <바깥>인 것이다. 주체는 창조 행위라는 도박을 할 때 <바깥>에서 가해지는 습격의 벽이 되고, 찢겨진 곳이 된다. “찢겨짐은 이제 천이 겪는 우발적 사고가 아니라 바깥쪽 천이 뒤틀리고, 감입하고, 이중화활 때의 새로운 규칙이 된다. ‘마음대로’의 규칙 또는 우연한 방출, 주사위 던지기다. ”안이란 바깥의 작용이고, 그것은 하나의 주체화다.“그리고 우리는 작가가 된다. 우리는 무한한 고안의, 안트로포스적 허공의, 역사의 절대적인 끝없음 속에서 ”<바깥>으로의 감입”으로서 계속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작가다. “‘더는 작가가 없다’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오만하기 그지없습니다.”

이 <바깥>. 이 영원한 야전. 끝없는 고안의 춤. 라캉은 이를 여성의 향락이라 부르리라. 771-2

* 그렇다. 오늘은 다른 어떤 날과도 다를 바 없는 하루이고, 그 어떤 날들도 오늘과 다를 바 없는 하루, 다른 날들과 하나도 닮은 데가 없는 이 하루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끝이 없다. 우리가 태어나 죽는 찰나의 영겁, 짧은 영원 속에서 몇 번이나 밤은 도래할 것이다. <바깥>의 시간이. <바깥> 바람을 쐬고, 그 삐걱거림을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울리는 작은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는 한없는 그 <바깥>의 주름, <바깥>의 효과가 된다. 거기에서 우리는 무한히 고안을 계속할 것이다. 안트로포스의 고안하는 힘에 한계는 없다. 가자. 우리는 가자. 우리는 글 쓰고 노래하고 춤추고 사유하자. <거울>을 만들어내기 위해. 제3자를 만들어내기 위해. 근거율을 만들어내기 위해. 공격하기 위해. 손에 쥐기 위해. 지키기 위해. 굶주림에 저항하고 추위에 저항하고 죽음에 저항에 살아남기 위해. 모든 죽음과 위험의 선동을 웃어넘기기 위해. 전진하기 위해. 옆으로 한 발 나가기 위해. 소격을 유지하기 위해. 자유를 직조하기 위해. 투쟁하기 위해. 도박하기 위해. 이기기 위해. 지기 위해. 승리하고 패배하는 기쁨을 위해. 773-4

 

 

* 대왕과 서슴없이 대치하는 이 개의 삶을 푸코는 “주권적인 삶”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견유학파는 거의 알몸이고, 방사에 이르기까지 사람들 앞에서 할 정도로, 그 무엇도 가리지 않는 “가시성” 속에 있었다. 공중의 눈 앞에서 태워지기를 바라기조차 했던 페레그리누스를 형용하는 푸코 자신의 말에 따르면 “견유학파적 삶의 절대적 가시성” 속에 있었다. 개는 다 보여준다. 자신의 삶을, 치부를, 성을, 자신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이 개는 “감시”도 한다. 분명히 푸코는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견유학파는 자신의 전부를 사람들의 시선에 드러내 보이는 대신, 타인의 전부를 감시하는 자이고자 한다.“........개는 감시를 당하고만 있지는 않는다. 개는 감시한다.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는, 가난하고 알몸인, 반항하는 주권자인 개의 감시다. 여기에서는 푸코가 오랫동안 양립할 수 없다고 우겨왔던 주권 권력과 규율 권력이, 나중에 자신도 인정한 것으로 양립할 수 있는 것으로, 그러나 새로운 다른 모습으로 결정했다. 801-2

 

 

* 여기에는 무엇인가 다른 것이 있다. 여기에 있는 것은 “다른 삶”으로 변하기를 희구하는, 기묘하리만큼 집요한 지속이다. 투쟁의 지속이다. 보편적인 것, 불변한 것에 저항하려는 자들의 지속이다. 혁명, 예술, 영성을 관통하며 조용히 명동하기를 멈추지 않는 “투쟁의 울림소리”. 이 집요한 개들. 먼 옛날부터 최근까지 끊기는 일 없이 지속되어온 그 표현한 모습, 짖어대는 소리.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기에 주구가 아닌 개들. 신출귀몰한 개들. 이는 초역사적인 것에 대한 저항의 초역사성이다. 불멸, 영구한 것은 존재하지 않고 그것은 항상 전복 가능하다는 사실 자체의 “영원”이다. 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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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타자
엠마누엘 레비나스 지음, 강영안 옮김 / 문예출판사 / 199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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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 앞에서는, 영웅이 붙잡는 마지막 기회가 있을 뿐 죽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영웅은 항상 마지막 기회를 볼 줄 아는 사람이다. 그는 완강하게 기회의 발견을 고집하는 인간이다. 따라서 죽음은 수용되지 않는다. 죽음은 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살은 모순적 개념이다. 죽음의 영원한 위협은 그의 본질의 일부이다. 주체의 지배가 보장되는 현재에는 희망이 있다. 희망은 일종의 목숨을 건 모험, 일종의 모순을 통해 죽음에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다. 희망의 죽음의 언저리에, 죽음의 순간에, 죽어가는 주체에게 주어진다. “나는 숨신다. 나는 희망한다.” 햄릿은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러한 불가능성에 대한 상세한 증언이다. 무는 불가능하다. 죽음을 받아들일 가능성, 존재의 노예 상태로부터 최고의 지배권을 탈취해 낼 수 있는 가능성은 인간에게 맡겨져 있는 것 같다. “존재하느냐 아니면 존재하지 않느냐”라는 말은 자신을 없앨 수 없다는 사실의 자각이다. 82

 

 

* 애무는 주체의 존재방식이다. 애무를 통해 주체는 타자와의 접촉에서 단지 접촉 이상의 차원으로 넘어간다. 감각 활동으로서의 접촉은 빛의 세계의 일부를 형성한다. 하지만 올바르게 말하자면 애무를 받는 대상은 손에 닿지 않는다. 이러한 접촉에서 주어지는 손의 미지근함이나 부드러움, 이것이 애무에서 찾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애무의 추구는, 애무가 찾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그 본질로 구성한다. <모른다>는 것, 근본적으로 질서잡혀 있지 않음, 이것이 애무에서 본질적인 것이다. 애무는 마치 도망가는 어떤 것과 하는 놀이, 어떤 목표나 계획이 전혀 없이 하는 놀이, 우리 것과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는 무엇과 하는 놀이가 아니라 다른 어떤 것, 언제나 다른 것, 언제나 접근할 수 없는 것, 언제나 미래에서 와야 할 것과 하는 놀이처럼 보인다. 애무는 아무 내용 없는, 순수한 미래를 기다리는 행위이다. 애무는 거머쥘 수 없는 것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열어 주는 이러한 배고픔의 증대, 점점 더 풍요해지는 약속으로 가득 차 있다. 애무는 헤아릴 수 없는 배고픔을 먹고 산다. 1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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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6-03-10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음과 애무에 대한 철학적 사색이군요. 재미있습니다. ;^^
 
일방통행로 / 사유이미지 발터 벤야민 선집 1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외 옮김 / 길(도서출판)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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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도는 직접 걸어가는가 아니면 비행기를 타고 그 위를 날아가는가에 따라 다른 위력을 보여준다. 텍스트 역시 그것을 읽는지 아니면 베껴 쓰는지에 따라 그 위력이 다르게 나타난다. 비행기를 타고 가는 사람은 자연 풍경 사이로 길이 어떻게 뚫려 있는지를 볼 뿐이다. 그에게 길은 그 주변의 지형과 동일한 법칙에 따라 펼쳐진다. 길을 걸어가는 사람만이 그 길의 영향력을 경험한다. 비행기를 탄 사람에게는 단지 펼쳐진 평원으로만 보이는 지형의 경우 걸어서 가는 사람에게 길은 돌아서는 길목마다 먼 곳, 아름다운 전망을 볼 수 있는 곳, 숲속의 빈터, 전경들을 불러낸다. 마치 전선에서 지휘관이 군인들을 불러내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베껴 쓴 텍스트만이 텍스트에 몰두하는 사람의 영혼에 지시를 내린다. 이에 반해 텍스트를 읽기만 하는 사람은 텍스트가 원시림을 지나는 길처럼 그 내부에서 펼쳐 보이는 새로운 풍경들을 알 기회를 갖지 못한다. 그냥 텍스트를 읽는 사람은 몽상의 자유로운 공기 속에서 자아의 움직임을 따라갈 뿐이지만, 텍스트를 베껴 쓰는 사람은 텍스트의 풍경들이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기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일-77

 

 

* 사랑하는 사람은 애인의 ‘실수’, 여성스러운 변덕이나 약점에만 연연해하지 않는다. 어떠한 아름다움보다 그의 마음을 더욱더 오래, 더욱더 사정없이 붙잡는 것은 얼굴의 주름살, 기미, 낡은 옷, 그리고 기울어진 걸음걸이다. 우리는 이를 이미 오래전에 경험했다. 어째서인가? 감정은 머리에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학설이 맞는다면, 또한 창문, 구름, 나무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머릿속이 아니라 그것들을 본 장소에 깃들어 있다는 학설이 맞는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애인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 자신을 벗어난 곳에 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우리는 고통스러울 정도의 긴장과 환희를 느낀다. 감정은 여인의 광채에 눈이 부셔서 새떼처럼 푸드득거린다. 그리고 잎으로 가려진 나무의 우묵한 곳에 은신처를 찾는 새처럼 감정은 사랑하는 육체의 그늘진 주름살, 투박한 몸짓, 그리고 눈에 잘 띄지 않는 결점을 찾아 그 안에 숨어 들어가 안전하게 은신처 안에서 몸을 움츠린다. 사모하는 사람에게 순식간에 일어나는 사랑의 떨림은 바로 거기, 결점이 되고 비난거리가 될 만한 것 안에 둥우리를 틀고 있다는 사실을 지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다. 일 80

 

 

* 수백 년 전 문자가 서서히 눕기 시작하여 직립의 비문이 탁자 위에 비스듬히 놓인 육필이 되다가 결국 서적인쇄에서 완전히 눕게 되었다면, 이제 그 문자가 다시금 서서히 바닥에서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미 신문은 수평으로보다는 수직으로 읽히고 있으며, 영화와 광고는 문자를 결국 강압적 방식으로 수직으로 내몰고 있다. 그리고 이 시대 사람들은 책을 한 권 펼쳐볼 엄두를 내기도 전에 변화무쌍하고 다채로우며 서로 다투는 철자들의 촘촘한 눈보라가 그들의 눈 위에 내려앉는다. 그렇게 때문에 사람들이 책의 태곳적 정적에 침잠할 기회가 거의 사라져버렸다. 일 94-5

 

 

* 부조 - 한 사람이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지내고 얘기를 나눈다. 그리고 몇 주 또는 몇 개월이 지난 뒤 그 여자와 떨어져 지내다보면 그 당시 얘기됐던 것이 다시 생각난다. 그런데 이제 그 모티프는 진부하고 야하고 깊이가 없어 보인다. 그리고 깨닫는다. 이야기를 나눌 때 사랑으로 그 위에 몸을 숙여주었던 그 여자만이 그것을 우리 앞에 그늘지게 하고 보호했다는 것을. 그리하여 마치 부조처럼 모든 주름들과 구석들 속에 그 생각이 살아 있었다는 것을. 지금처럼 우리가 혼자 있으면 그때 이야기했던 내용은 평범한 모습으로, 아무 위안도 그늘도 없이 우리의 인식의 빛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일 116-7

 

 

* 이 부지를 임대함

비평의 몰락을 한탄하는 바보들. 그들의 시간은 이미 오래전에 끝나버렸건만. 비평이란 적당한 거리 두기이다. 비평은 관점과 전망이 중요하고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직 가능했던 세계에 터전을 둔다. 그동안 사물들은 너무나 뜨겁게 인간사회에 밀착되어버렸다. 이제 ‘선입견 없는 공평함’과 ‘자유로운 시선’은 단순한 무능함을 드러내는 순진하기 짝이 없는 표현이 아니라면, 거짓말이 되어버렸다. 오늘날 사물의 심장을 들여다보는 가장 본질적이고 상업적인 시선은 광고다. 광고는 자유롭게 관찰할 수 있는 자유공간을 없애버리고 사물들을, 거대하게 부풀어 오르면서 화면 밖으로 우리를 향해 달려 나오는 자동차처럼, 그렇게 위험할 정도로 우리 앞에 가까이 밀어붙인다. 일 138

 

 

* 훌륭한 작가

휼륭한 작가는 자기가 생각하는 것 이상을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말한다는 것은 생각하기의 표현인 것만이 아니라 생각하기의 실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걸어간다는 것이 어떤 목표에 도달하고자 하는 소망의 표현인 것만이 아니라 그 소망의 실현인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실현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즉 그 실현이 목표에 정확하게 합당한 실현이 되는지, 아니면 탐욕스럽고 흐리멍덩하게 소망에 자신을 탕진하는지는 길을 가고 있는 자의 훈련 여부에 달려 있다. 그가 자신을 절제하면서 불필요하다거나 장황하거나 어슬렁거리는 동작들을 피하면 피할수록, 모든 신체의 자세는 자신에게 그만큼 더 족하게 되고, 그 신체를 더욱더 적절하게 운용하게 된다. 열악한 작가는 착상이 많이 떠올라 그 착상들 속에서 기력을 탕진해버린다. 이것은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열악한 달리기 선수가 사지를 맥 빠지게 움직이거나 지나치게 활발하게 움직이느라 기력을 탕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열약한 작가는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냉철하게 말할 줄 모른다. 재기발랄하게 훈련받은 신체가 펼치는 연기를 자신의 스타일에 맞게 사유를 부여했던 것이 바로 훌륭한 작가의 재능이다. 훌륭한 작가는 결코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을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쓰는 글은 그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만 도움을 준다. 사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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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세계 - 개정3판
막스 피카르트 지음, 최승자 옮김 / 까치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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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묵은 결코 수동적인 것이 아니고 단순하게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침묵은 능동적인 것이고 독자적인 완전한 세계이다. 침묵은 그야말로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에 위대하다. 침묵은 존재한다. 고로 침묵은 위대하다. 그 단순한 현존 속에 침묵의 위대함이 있다. 19

 

* 침묵은 오늘날 아무런 “효용성도 없는” 유일한 현상이다. 침묵은 오늘날의 효용의 세계에는 맞지 않는다. 침묵은 다만 존재할 뿐 아무런 다른 목적도 가지고 있지 않다. 침묵은 이용할 수가 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용한 모든 것들”보다는 침묵에서 더 많은 도움과 치유력이 나온다. 20-1

 

* 그러나 두 사람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자리에는 언제나 제삼자가 있다. 즉 침묵이 귀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말들이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좁은 공간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말들이 먼곳으로부터, 침묵이 귀기울이고 있는 그곳으로부터 온다는 것이 그 대화를 폭넓게 만들어주며,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말은 더한층 충만해진다. 27

 

* 인간이 침묵과 연관되어 있을 때, 인간은 자신의 지식으로 인해서 무거운 짐을 지지 않는다. 침묵이 그에게서 짐을 덜어 주는 것이다. 예전의 인간은 아무리 많은 것을 알고 있었어도 짓눌리지 않았다. 그 지식을 침묵이 인간과 함께 짊어졌던 것이다. 지식은 인간 내부에서 울혈되지 않았고, 지식의 과잉은 침묵 속에서 사라졌으며, 그리하여 인간은 언제나 새로운 순수함으로 사물 앞에 섰다. 84-5

 

*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환히 빛난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투명하다. 사랑의 원초적 형상이 그들의 얼굴을 통해서 환히 빛나는 것이다. 그 때문에 그들의 얼굴은 더욱 아름다워진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떠 있는 듯하다. 원초적 형상 위에 떠 있는 듯하다. 109

 

* 오늘날에는 시에게 심지어 소음의 세계를 표현하라고까지 요구한다. 인간은 시에서까지도 소음을 느끼려고 하며, 그것으로 소음이 정당화된다고 상상하며, 또한 어떤 운율속에 끼워넣으면 소음이 제압된다고 생각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외부 세계의 소음이 시의 소음에 의해서 진정될 수는 없다. 169

 

* 동화 속의 말들과 사건들은 어느 순간에든 도로 없어질 수 있을 만큼 아주 단순하다. 그것들은 어떤 복잡한 세계로부터 우선 벗어나야 할 필요가 없다. 동화의 아늑함은 거기에서 온다. 동화 속에서는 그 어떤 것도 고착되어 있지 않으며, 모든 것들이 자신을 포기하고 사라져버릴 차비가 되어 있다. 174

 

* 인간은 기계로부터 결코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기계가 영원의 한순간인 저 시간으로부터 인간을 떼어놓기 때문이다. 영속적으로 움직이는 기계가 시간으로 어떤 기계화된 지속성을 만들어내고, 그 지속성 안에서 영원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독립된 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기계화된 지속은 시간을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가득 채운다. 시간은 멎고 굳어져 공간으로 변해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220

 

* 라디오의 잡음은 점점 더 거세진다. 왜냐하면 자신이 침묵에 의해서 그리고 참된 말에 의해서 불시에 기습당할 것이라는 불안이 점점 더 커지기 때문이다. 242

 

* 병자에게는 항시 침묵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병자에게 있는 침묵은 예전과 같은 침묵이 아니다. 오늘날 병자 곁에 있는 침묵은 조금 섬뜩한 것이다. 왜냐하면 건강한 생명의 일부여야 하며, 그 건강한 생명 안에서 작용해야 하는 침묵이 이제 거기서 쫒겨나서 병자 곁에만 머물기 때문이다. 251

 

* 기도 속에서 말은 저절로 침묵 속으로 되돌아간다. 기도란 애초부터 침묵의 영역 안에 있었다. 기도는 인간으로부터 떨어져나가 신에게 받아들여진다. 그것은 침묵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그 안에서 사라진다. 기도는 그치지 않고 존재할 수 있지만, 기도의 말은 항시 침묵 속으로 사라진다. 기도는 말들을 침묵 속으로 쏟아붇는다. 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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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인간 -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50년 독서와 인생
오에 겐자부로 지음, 정수윤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 그리고 이건 자신 있게 드리는 말씀인데, 정신 차리고 지속적으로 책을 읽어나가면, 저절로 고전이 한 권, 두 권, 그것도 일생에서 아주 소중한 무언가가 될 작품이 여러분에게 다가오기 마련입니다. 그건 정말 신기할 정도예요. 어렵사리 만난 고전이 손에서 멀어져 갈 때도 있습니다. 제 경우엔 십 년이나 십오년 쯤, 무엇보다 소중한 고전을 읽지 않고 살았던 날도 가끔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기회가 생겨 그 책이 다시 제게 돌아와요. 153

 

 

* 졸업을 앞둔 제게 와타나베 선생은 앞으로 이렇게 독학을 하라고 책 읽는 방법을 가르쳐주셨는데, 그것은 3년마다 읽고 싶은 대상을 새로 골라서 그 작가, 시인, 사상가를 집중해서 읽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말이죠. 자기가 읽어온 것들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어요. 아울러 자신의 새로운 언어 감각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작용이 발생하는 거예요. 문체에 변화를 주고자 이제껏 읽지 않던 방향의 책도 고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저는 3년마다 제 문체를 바꿀 수 있었습니다. 0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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