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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세계 - 개정3판
막스 피카르트 지음, 최승자 옮김 / 까치 / 2010년 7월
평점 :
* 침묵은 결코 수동적인 것이 아니고 단순하게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침묵은 능동적인 것이고 독자적인 완전한 세계이다. 침묵은 그야말로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에 위대하다. 침묵은 존재한다. 고로 침묵은 위대하다. 그 단순한 현존 속에 침묵의 위대함이 있다. 19
* 침묵은 오늘날 아무런 “효용성도 없는” 유일한 현상이다. 침묵은 오늘날의 효용의 세계에는 맞지 않는다. 침묵은 다만 존재할 뿐 아무런 다른 목적도 가지고 있지 않다. 침묵은 이용할 수가 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용한 모든 것들”보다는 침묵에서 더 많은 도움과 치유력이 나온다. 20-1
* 그러나 두 사람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자리에는 언제나 제삼자가 있다. 즉 침묵이 귀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말들이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좁은 공간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말들이 먼곳으로부터, 침묵이 귀기울이고 있는 그곳으로부터 온다는 것이 그 대화를 폭넓게 만들어주며,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말은 더한층 충만해진다. 27
* 인간이 침묵과 연관되어 있을 때, 인간은 자신의 지식으로 인해서 무거운 짐을 지지 않는다. 침묵이 그에게서 짐을 덜어 주는 것이다. 예전의 인간은 아무리 많은 것을 알고 있었어도 짓눌리지 않았다. 그 지식을 침묵이 인간과 함께 짊어졌던 것이다. 지식은 인간 내부에서 울혈되지 않았고, 지식의 과잉은 침묵 속에서 사라졌으며, 그리하여 인간은 언제나 새로운 순수함으로 사물 앞에 섰다. 84-5
*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환히 빛난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투명하다. 사랑의 원초적 형상이 그들의 얼굴을 통해서 환히 빛나는 것이다. 그 때문에 그들의 얼굴은 더욱 아름다워진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떠 있는 듯하다. 원초적 형상 위에 떠 있는 듯하다. 109
* 오늘날에는 시에게 심지어 소음의 세계를 표현하라고까지 요구한다. 인간은 시에서까지도 소음을 느끼려고 하며, 그것으로 소음이 정당화된다고 상상하며, 또한 어떤 운율속에 끼워넣으면 소음이 제압된다고 생각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외부 세계의 소음이 시의 소음에 의해서 진정될 수는 없다. 169
* 동화 속의 말들과 사건들은 어느 순간에든 도로 없어질 수 있을 만큼 아주 단순하다. 그것들은 어떤 복잡한 세계로부터 우선 벗어나야 할 필요가 없다. 동화의 아늑함은 거기에서 온다. 동화 속에서는 그 어떤 것도 고착되어 있지 않으며, 모든 것들이 자신을 포기하고 사라져버릴 차비가 되어 있다. 174
* 인간은 기계로부터 결코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기계가 영원의 한순간인 저 시간으로부터 인간을 떼어놓기 때문이다. 영속적으로 움직이는 기계가 시간으로 어떤 기계화된 지속성을 만들어내고, 그 지속성 안에서 영원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독립된 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기계화된 지속은 시간을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가득 채운다. 시간은 멎고 굳어져 공간으로 변해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220
* 라디오의 잡음은 점점 더 거세진다. 왜냐하면 자신이 침묵에 의해서 그리고 참된 말에 의해서 불시에 기습당할 것이라는 불안이 점점 더 커지기 때문이다. 242
* 병자에게는 항시 침묵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병자에게 있는 침묵은 예전과 같은 침묵이 아니다. 오늘날 병자 곁에 있는 침묵은 조금 섬뜩한 것이다. 왜냐하면 건강한 생명의 일부여야 하며, 그 건강한 생명 안에서 작용해야 하는 침묵이 이제 거기서 쫒겨나서 병자 곁에만 머물기 때문이다. 251
* 기도 속에서 말은 저절로 침묵 속으로 되돌아간다. 기도란 애초부터 침묵의 영역 안에 있었다. 기도는 인간으로부터 떨어져나가 신에게 받아들여진다. 그것은 침묵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그 안에서 사라진다. 기도는 그치지 않고 존재할 수 있지만, 기도의 말은 항시 침묵 속으로 사라진다. 기도는 말들을 침묵 속으로 쏟아붇는다. 268